그런데 2000년 후반 들어 지방의 몇몇 신용금고가 쓰러지면서 시장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김씨는 다소 불안했지만 자산 기준 업계 수위권이고 자기자본 비율이 높은데다 증시에 상장돼 있는 우량 금고라는 점에서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실은 만기가 몇 달 안 남은 상황에서 중도해지로 인한 이자 손실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해 12월 사고를 친 건 이기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다. “신용금고 사고가 한두 곳 더 있을 것”이라는 ‘실언’을 한 것이다. 시중의 풍문으로 비틀거리던 업체들을 향해 정부가 확인사살을 하는 순간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졌고 김씨의 꿈이 적립되던 그 금고도 며칠을 못 넘기고 영업정지를 당했다. 당황한 김씨는 하루 월차를 내고 신용금고 본점을 찾아갔지만 고객의 항의와 직원의 읍소가 뒤엉킨 살풍경을 뒤로한 채 하릴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 소문’의 시대다. ‘사채연루설’이라는 소문은 고 최진실씨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사생활과 관련한 이러저러한 소문은 끊임없이 최씨 근처를 배회했고, 그가 스스로 목숨을 멈춘 지금 지나간 시간들의 많은 소문들은 그의 죽음과 연계돼 또 다른 소문으로 증식하고 있다. 소문은 연예인을 둘러싼 호사가들의 액세서리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소문은 호시탐탐 그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다.
안정된 예금을 흔든 경제수석의 한마디요즘 최대 화두인 경제 현상에서도 그 속에 개입한 주체의 집단적 심리가 실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반복된다. 불안은 영혼을 좀먹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소문이란 이름의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에 불과할 따름이다.
시장의 소문에 정책 당국자가 기름을 끼얹는 상황은 K씨가 시련을 겪었던 8년 전보다 지금이 더 심하다. 미국발 금융위기 속에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달러 매도 개입을 했다며 일찌감치 상대에게 패를 보여줘 “그런데도 이 모양이란 말인가”라는 시장의 탄식을 자아내게 했다. 위기설을 완강히 부인하던 그는 지난 10월6일 국감에선 돌연 “여러 가지가 겹쳐서 유동성 위기와 실물경제 위기가 동시에 오고 있다”고 자복했다. 외환시장은 “이젠 개입할 실탄마저 바닥난 게 아니냐”는 소문을 타고 패닉으로 치달았다.
전달자나 상황에 따라 괴담, 첩보, 정보, 제보 등으로 옷을 갈아입는 소문은 누군가에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다주지만, 그것이 ‘정의’의 편일 때도 있다. ‘제보’의 옷을 입은 소문이 기자들에게 제대로 걸려들 경우다. 지난 2월 교육부총리 후보로 거론된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의 부인이 위장 전입을 했다는 의 특종도 그렇게 출발했다. 신뢰할 만한 한 정보원에게서 ‘어 총장 부인이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논을 사기 위해 위장 전입했다는 소문’을 듣고, 덕양구에 논으로 등재된 필지의 등기부등본 3천 장을 일일이 확인하는 취재 끝에 사실관계가 확인됐다. 이처럼 소문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종종 사실로 확인되기 때문에 그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다. 10개 중 하나가 사실로 밝혀지면, 나머지 9개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다음에 나오는 소문 10개 중 9개를 사실로 믿는 ‘소문의 착시 효과’가 나타난다.
옛날 ‘서동요’의 경우처럼 소문은 특정한 목적 아래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고 퍼뜨려지기도 한다. 2002년 미국이 이라크전을 일으키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 소문들이 그렇다. “9·11 테러의 범인이 프라하에서 이라크 외교관을 만났다”(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거나 “이라크가 니제르에서 500t의 우라늄을 사려 한다”(조지 부시 대통령)는 등의 발언은 이후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현대판 ‘악당 서동’이라고 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미국발 금융위기의 오픈게임이 돼버린 한국의 ‘9월 위기설’도 촛불 민심에 위기감을 느낀 여권의 국면 전환용 자작극이 시장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혐의가 짙다. “최근 경제 상황은 외환위기와 유사하다”는 여당 정책위의장의 6월11일 발언과 그 뒤 이명박 대통령의 ‘제3차 오일쇼크’ 언급 등이 그 물증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이 아고라의 ‘미네르바’ 같은 인터넷 논객들에 의해 유포된 월가의 ‘한국 경제 리포트’와 맞물려 ‘소문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9월 위기설’은 여권의 국면 전환용?한번 격발된 소문은 주체하지 못하는 게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지난 2005년 연예인 80여 명의 성적 취향과 이성 관계, 술버릇 등에 관한 소문을 정리한 ‘연예계 엑스파일’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파문이 일었지만, 그 사건에서 한국 사회가 배운 것은 없다. 최근 비슷한 내용의 ‘엑스파일2’가 사이버 공간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다. 촛불집회 국면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괴문이 그럴듯하게 인터넷을 배회했다. 이보다 앞선 올해 초 국민 가수 나훈아의 바지 지퍼를 내린 것도 결국엔 소문이었다.
소문은 본래 그 사회에서 공유돼야 할 공공의 정보가 부족하고 의사소통의 방향이 국가에서 국민으로 일방향적인 때 주로 기승을 부린다. 사회 구성원 사이의 깊은 불신은 소문이 태어나고 자라는 훌륭한 자양분이다.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 각종 유언비어가 기승을 부린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는 언론인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할 만큼 언로는 봉쇄됐다. 정부는 북한의 5호 담당제와 비슷한 통반장 제도를 통해 국민이 국민을 감시하게 했다. 당연히 저잣거리와 술자리에는 민초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소문이 넘쳐났다. 이에 국가는 ‘막걸리 보안법’과 긴급조치라는 초법적 수단을 통해 처벌했다.
정당성이 부족한 독재 권력은 민초들 사이의 소문 하나하나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국방부가 제작하는 영화 에 출연한 탤런트가 동료들과 잡담하던 중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 박지만이 영화배우와 ‘썸싱’이 있다”는 항간의 소문을 발설했다가 구속된 것과 같은 웃지 못할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섹시한 춤과 음색으로 ‘1970년대 이효리’라 불리는 김추자의 노래 가 1975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금지곡이 된 건 역사적인 해프닝이다. 노래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손을 이리저리 흔드는 김씨의 춤이 북한 공작원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했다. 노랫말이 사회의 불신 풍조를 조장한다는 ‘도둑 제 발 저린’ 국가의 판단도 작용했다.
최진실씨 사채연루설의 진원지로 지목된 이른바 증권가 ‘찌라시’가 등장한 게 전두환 정권 때인 1980년대라는 것도 우연으로 볼 수 없다. 기관원이 언론사에 상주하며 뺄 기사와 넣을 기사를 지목하고, 공개될 수 있는 정보의 수준과 논조를 일러주는 ‘보도지침’의 시대였다. 모두가 언론의 보도 내용이 진실하지 않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는 ‘사설 정보’가 필요했다.
시대는 바뀌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소문은 인터넷을 타고 더 빨리, 더 넓게 퍼진다. ‘미디어와 정보의 홍수’ 시대에도 각종 소문과 괴담이 활개를 치는 이유는 뭘까?
미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이미 지적한 대로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저신뢰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에 설득력이 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독재 시절에 체화된 불신의 인식 구조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사회학)는 “독재의 폐해는 물리적 폭력이라는 측면에서도 컸지만 부패와 불신이라는 내상이 더 크다”며 “불신 사회를 신뢰의 사회로 바꿔나가는 게 민주화의 핵심인데, 10년은 너무 짧았던 셈”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국민이 국가나 사회를 믿지 못하고 가족을 중심으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난민 사회’적 특성이 소문을 창궐시키는 바탕이 된다고 본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난민 사회’이는 경제 현상에서도 관찰된다. 증시에서는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팔아라’라는 격언이 여전히 유효하다. 일반 투자자와 기관 투자자 사이의 정보의 비대칭성을 보완하기 위해 ‘공정공시’ 제도가 도입됐지만 시장의 풍문이나 언론 보도에 대해 진위를 묻는 조회 공시 요구가 뜰 무렵이면 주가는 이미 한바탕 급등락이 이뤄진 뒤다. 조회 공시에 대한 회사의 답변도 상투적이다. ‘당사의 신사업 진출설에 대해 현재로선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가 없다’는 식이다. 심지어 합병설 같은 조회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잡아뗀 뒤 며칠도 안 돼 시인하는 공시를 내기도 한다.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지정돼봤자 며칠간 거래 정지 등 솜방망이 처벌밖에 없어서다. 소문은 이런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다.
이른바 ‘찌라시’로 불리는 정보지 자료 취합에 참여하는 한 업체 관계자는 최근 외환시장 루머가 많아진 이유에 대해 “주식시장은 오뚝이와 같아서 일시적으로 요동치더라도 다시 균형을 잡는 반면, 환율은 거북이처럼 한번 뒤집어지면 일어나지 못해서 민감한 투자자들의 정보 수요가 많아진 탓”이라고 설명했다. 악성 루머에 대한 정부의 일제 단속 방침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소문이란 화장실에 한번 노크해보는 것인데 인기척도 안 해서 문을 열어젖히니 그제야 노발대발하는 꼴이다”라며 언성을 높였다. 정부가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선문답식 신비주의로 머무는 한 소문은 안개처럼 계속 피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여전히 거리낌 없이 소문이 양산되고 유통되는 두 번째 이유로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교육의 문제도 제기된다. 한국 사회는 소문을 접했을 때 서구 사회에 비해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더 높다는 지적이다.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의 말이다. “사회 구성원이 독립적으로 판단 내릴 능력이 클수록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사회는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라는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개연성을 믿는다.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법도 없이 사이버모욕죄?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프라이버시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들의 자세 또한 문제다. 이는 연예인에 대한 정보는 무엇이든 까발릴 수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연예인들을 공인이라고 하면서, 사생활에 해당하는 부분도 공적인 것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동연 문화사회연구소장)이라는 것이다. 알량한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워 무차별적인 연예인 신상 공개에 나서는 지상파와 케이블의 연예정보 프로그램은 공범이라기보다는 교사범에 가깝다.
나아가 연예인의 사생활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인터넷 뉴스를 축으로 ‘소문 산업’도 형성됐다. 예컨대 최진실씨 사채연루설이 떠돌면, 인터넷 뉴스는 ‘최진실이 사채설로 고통받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한다. 겉으로는 최진실씨에 동정적인 내용이지만, 기사를 읽고 난 독자에겐 ‘최진실에 대한 사채설이 있다’는 소문이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인터넷 뉴스를 통해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가수 나훈아씨 사태처럼 주류 미디어도 보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진다.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는 분석한다. “한국은 인터넷 이용률이 높으면서 포털을 포함해 분야별 거대 사이트 중심으로 돌아간다. 몇 개 사이트에 루머가 오르면 빠르게 퍼진다. 여기에 인터넷 매체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언론관이 부족한 상태에서 뉴스를 거르지 않고 보도한다. 게다가 속보 경쟁도 심하고 연예뉴스에 집중하니 소문 증폭의 시스템이 강력하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집중성은 없다.” 이렇게 한국은 소문이 퍼지기 쉬운 동네고, 다음이나 네이버는 동네의 게시판 같다.
이에 대한 대응법으로 강장묵 세종대 교수(컴퓨터공학)는 ‘네트워크 루머’라는 개념의 새 접근법을 제시한다. 기존 아날로그 시대의 루머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거치며 거짓이 확대되고 ‘없는 사실’도 엉겨붙는 속성이 있지만, 인터넷을 통한 소문의 유통 과정은 그렇지 않다. 디지털 네트워크에서는 다수의 대중과 전문가들이 하나의 소문을 놓고 검증하면서 진위가 가려지고 거짓은 도태되는 유기적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소문이 걸러질 수 있도록 인터넷을 발전시키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 마당에, 인터넷 실명제를 현재보다 강화하고 사이버모욕죄를 만드는 건 병든 사람의 몸에서 백혈구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게 마련이다. 강 교수는 “다수가 다수의 글을 검증하는 게 효율적일지, 소수 전문가가 다수의 글을 통제하는 게 바람직할지 고민해봐야 한다”며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한 프라이버시법도 만들지 않은 정부가 웬 사이버모욕죄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도 “정부가 충분한 정보를 공개하고 예측 가능한 프로그램을 보여주지 않으니 자꾸 괴담과 추측성 기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며 되레 소문의 밭에 퇴비를 잔뜩 뿌리고 있는 정부를 비판했다.
신용금고의 악몽이 잊혀져가는 2008년 가을. 40대가 된 K씨의 집(아직도 전세)으로 두 개의 우편물이 날아들었다. 첫 번째는 예금보험공사에서 온 안내문이었다. ‘귀하가 거래했던 신용금고의 정리 절차에 따라 채권자의 배당금이 나왔으니 수령해가라’는 통지였다. 세상이 너무 고마웠다. 두 번째는 아내 앞으로 온 AIG생명의 안내문이었다. ‘귀하의 변액보험 실적 변동은 국내외 금융시장의 변동에 따른 것으로 AIG 본사의 자금 위기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는 해명이었다. 세상이 다시 싫어졌다. 이때 TV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곧 펀드에 가입할 것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순간 K씨는 “미국산 쇠고기를 시식하듯 금융위기도 잠재워야 할 ‘괴담’으로 바라보는 것 아닌가” 하는 분노가 치밀었다. 아슬아슬한 ‘리만 브라더스’의 노크어찌된 셈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이후 20일이 넘도록 펀드 가입을 미루고 있다. 주가 부양책 발표와 더불어 가입할 예정이라니, 이런 부당 내부거래가 또 어디 있는가? 아슬아슬한 ‘리(이명박)만(강만수)브러더스’식 곡예가 연출되는 한 경제위기를 둘러싼 소문은 집요하게 야밤에 화장실 문을 두드릴 것이다. 소문은 앞으로 또 어떤 연예인의 여린 영혼을 낚아챌지도 모른다. 정부의 인터넷 여론 통제는 ‘막걸리 보안법’의 냄새를 풍기며 흉흉한 괴담의 시대를 부활시킬 수도 있다.
믿지 못하는 시대의 바이러스, 소문은 소리 없이 우리 사회를 점령해가고 있다.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쉿!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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