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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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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찬 승리였고 시린 상처였다”

등록 2007-06-08 00:00 수정 2020-05-03 04:24

스무돌 맞는 1987년 6월항쟁, 주요 대선주자들은 당시 무엇을 했으며 어떤 의미를 두고 있을까

올해 6월은 1987년 6월 항쟁이 꼭 20년 되는 때이다.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열망이 분출된 6월항쟁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라는 과제를 우리에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항쟁의 자식들’은 여전히 현실에서 ‘오늘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을지로 고층빌딩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던진 회사원과, 하이힐을 벗어들고 구호를 외친 직장인과, 애를 둘러업고 김밥을 말아 나온 아주머니와,자식 걱정에 거리로 나섰다가 시위대 맨 앞줄에 서게 된 할아버지까지.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이 6월 거리의 주역이었다. 대선 주자들도 직·간접적으로 6월의 한 자락을 잡고 있었다. 은 당사자의 증언과 주변 취재, 관련 자료를 토대로 주요 대선 주자들의 6월을 재구성해봤다.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경제·사회 민주화’와 ‘보편적 인간성의 획득’이라는 6월항쟁의 ‘성과의 한계’를 보살피고 발전시킬 책무를 환기하려는 목적에서다. 보통 사람들의 6월은 어떠했는지 기자들의 기억을 통해 되돌아봤다. 6월항쟁에 이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도 점검했다. 편집자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깡마른 서울대 법대 휴학생 원희룡은 6월10일 하루 종일 친구들과 거리에 있었다. 해가 지면 명동성당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거리로 나섰다. 명동성당 농성장에는 얼굴이 하얀 간호대생들과 의대생들도 많았다. 더 이상 80년대 초·중반의 어둡고 비밀스런 소수 운동이 아니었다. 청년 원희룡은 가슴이 뛰었다. 최초로 경험한 ‘승리’의 예감이었다.

명동성장 농성장의 깡마른 청년, 원희룡

“그냥 시위대의 ‘원 오브 뎀’이었죠. 그럴듯한 팀의 멤버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모두가 주인이었죠.”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을지로 고층 오피스 빌딩에서 두루마리 화장지가 날렸고, 사람들은 음료수를 건넸다. 상인들은 콜록대며 쫓기는 학생들을 문 안으로 옮기고 셔터를 내렸다. “이런 것이었구나.” 뭉클한 느낌에 가슴 한쪽이 아렸다. 주변을 둘러싼 화이트칼라들은 넥타이를 매고 ‘호헌 철폐’를 외치고 박수도 쳤다.

“뭐! 회현동 쪽 경찰이 뚫렸다고?” 이해찬 민주통일민중연합(이하 민통련) 총무국장은 전화를 받으며 벌떡 일어섰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312호 사무실. 이곳에서 또 하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진행 중인 시위 현장 속보가 전화기 너머 다급한 음성과 팩스의 굉음을 타고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사무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저녁 7시30분. 회현 고가를 점거한 시위대는 투석전 끝에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해냈다. 뒤처진 태릉경찰서(지금의 노원경찰서) 소속 전경 40여 명이 시위대에 둘러싸여 무장해제당했다. 국본 사무실에는 순간 환호성이 넘쳤다. 이해찬은 의자 위로 몸을 무너뜨리듯 쓰러졌다. 한순간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일촉즉발의 긴장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은 한 대학생의 어이없는 죽음에서 시작됐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은 1월13일 신림동 하숙집 앞에서 경찰에 불법 연행된 지 11시간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그는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밤새 이어진 물고문을 이기지 못했다.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댈 것을 추궁받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스물한 살의 젊은 죽음이었다.

“종철이를 살려내라!” 민통련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등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2월7일(2·7국민추도대회)과 3월3일(3·3평화대행진)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노동운동가 노회찬은 남대문시장 앞에서 기를 쓰고 소리를 질렀다. 인천을 근거로 노동운동을 하던 그는 동료들과 전철을 타고 남대문으로 향했다. 그는 83년부터 수배 상태였다. 그해 여름을 감색 겨울바지 한 벌로 났다. 군사정권의 폭압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대규모 야외집회를 부담스러워했다. 두 번의 집회는 경찰의 원천봉쇄에 막혀 작게 사그라졌다. 박종철의 주검은 한 줌의 재로 변해 얼어붙은 임진강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군사정권은 거칠 게 없었다. 4월13일 전두환은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호헌 선언’을 내놓는다. 이틀 뒤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대한상공회의소·한국무역협회·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4·13 결단을 환영한다”는 성명서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재야 운동권의 ‘꾀돌이’ 이해찬

반전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생겼다. 5월18일 저녁 6시30분 서울 명동성당. 광주항쟁 7주년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미사가 끝난 뒤 김승훈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가 단상에 올랐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됐습니다.”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3320자 분량의 성명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저놈들이 사람을 죽인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그 열기를 한 곳으로 결집할 도화선이 필요했다. 흩어졌던 민주화 세력은 하나로 뭉쳐야 했다. 5월27일 아침 8시 서울 향린교회에서 모인 재야·학생·종교, 야권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인사들은 국본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쳤다. 국본은 6월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이하 범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6월8일부터 전단이 거리를 뒤덮었고, 시내 곳곳에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중무장한 경찰이 배치됐다.

서른여섯의 이해찬은 재야 운동권의 살림꾼이자 ‘꾀돌이’였다. 그해 시위 기획은 그의 몫이었다. 그는 “2·7과 3·3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지난 두 번의 집회로 경찰이 움직이는 논리를 알게 됐습니다. 경찰 1개 중대는 160명인데, 3개 중대가 한 팀으로 몰려다니죠. 전체 경찰이 100여 팀이라고 한다면 가용 병력은 4만8천 명입니다.” 그는 이 병력이 서울에 동시에 깔리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지만, 전국 분산 시위로 병력이 2만 명 정도만 된다면 뭔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대 앞의 사회과학 서점 ‘광장서적’을 운영하면서 책 운반용으로 고물 ‘브리샤’ 자동차를 한 대 구입했는데, 그 차를 끌고 서울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경찰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고물 브리샤는 그해 여름 민주화운동권의 ‘이동 상황실’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날이 밝았다. 민청련 초대의장 김근태는 경주교도소에서 6월10일을 맞았다. 그는 삼민투 배후조종 혐의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그의 머리·가슴·사타구니를 소금물에 적셔 전기로 지졌다. 그는 고문 사실을 부인 인재근을 통해 폭로했고, 양심수의 대명사가 됐다. 그는 옥중에서 동료 재소자들과 바깥 일정에 맞춰 민중의례를 하고 성명서를 낭독하고 구호도 외쳤다. ‘집회와 시위’ 방법은 문짝 두드리기였다. 나중에 그와 함께 옥중 생활을 했던 김영진 현 이기우 의원 보좌관(중앙대 총학생회장 출신)은 “섣불리 지도자로 나서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러 의견을 취합해 가장 현실적인 ‘처방’을 내놓곤 했죠.” 청년 고진화도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공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항쟁의 승리로 양심수들이 석방됐을 때 그는 나가지 못했다.

그날은 두 개 행사가 겹쳐 있었다. 하나는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뽑는 민주정의당(민정당) 전당대회였고, 다른 하나는 국본의 범국민대회였다. 전당대회는 정오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다. 체육관에는 꽃가루가 날렸고, 치어리더들이 어지럽게 춤을 췄다.

범국민대회가 예정된 서울시청 앞 성공회성당은 경찰에 봉쇄됐다. 성당 밖으로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같은 시각 대성당에서는 분단 42년의 독재 타도를 기원하는 종이 42번 울렸다. 인파 속에 노동운동가 심상정이 있었다. 그는 그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1985년 구로노동자 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 중이었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 500만원, 그를 잡은 경찰에게는 1계급 특진이라는 포상이 걸려 있었다. “역사는 결국 민중의 힘으로 발전한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었죠.” 그는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일을 하루 앞둔 1990년 1월21일 경찰에 연행돼 만삭인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징역 1년6개월, 2년 집행유예 형을 받고 풀려나왔다.

인천지역 노동자들을 조직한 노회찬

경찰은 6월10일 전국 20개 도시 104곳에서 4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이 중 3381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지만,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국본 집계로는 시위 참가자가 30만 명이 넘었다. 사람들은 밤새워 시위를 벌였고, 남은 이들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서울 명동성당으로 숨어들었다. 투석전은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또 하나의 젊은 죽음이 예고돼 있었다. 6월9일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생 이한열은 오후 5시 ‘범연세인 총궐기대회’에 참가해 교문 앞까지 진출했다가 건너편 길에서 전경들이 날리는 SY44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았다. 그는 즉시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뇌사상태에 빠졌다. 국본은 6월18일을 ‘최루탄 추방대회’로 정했다. 다시 한 번 대규모 집회가 계획됐다.

날이 밝았다. 6월18일 여성운동가 한명숙은 머리에 삼베 수건을 쓰고 종로 네거리에 서 있었다. 한국의 진보 여성단체들은 1987년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을 결성했다. 그날 여연 회원들의 손에는 꽃이 들려 있었다. “구속자 어머니들과 함께 전경들에게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일을 맡았죠.” 어머니들의 뒤에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쏘지 마!” 어머니들이 외쳤다. 전경들은 움찔했지만, 호소로 폭력을 막진 못했다. 다시 대규모 충돌이 이어졌다. 빌딩에서 두루마리 휴지와 서류들이 날아왔고, 청년들은 기침을 쏟아내며 돌을 던졌다.

투쟁의 물결은 지방으로도 이어졌다. 노회찬은 인천 부평역 앞에 있었다. 인천에는 조직화된 넥타이부대나 학생운동 세력이 없었다. 시위 참가자 대부분은 노동자였다. 집회는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밤 9시께 시작돼 새벽 2~3시까지 이어졌다. 그가 이끈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창립된 것은 5월18일 부평역 앞 아스팔트 위에서다. 그는 “가로등만 켜진 부평역 앞을 가득 채웠던 그 함성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저건 뭐지?” 학교에서 돌아온 정동영 기자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영국 웨일스대학과 카디프대학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다. 〈BBC〉의 ‘나인 어클락’ 뉴스였다. “〈BBC〉는 한국 대통령의 영국 방문도 단신으로 취급하는, 영국 중심의 보도로 유명한 방송이거든요.” 86년 그는 민정당을 출입하던 정치부 기자였다. 피 끓는 8년차였다. “전두환 독재의 폭압성이 극에 달해 무척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영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현장에 있지 못해 아쉽고 죄송했다”고 말했다. 권영길 프랑스 특파원도 서울에서 날아온 팩스로 고국의 소식을 접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의 6·8혁명과 비교하는 보도가 많았죠.” 권영길은 “79년 9월 서울을 떠났을 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지만, 이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88년 2월 귀국했다. 손학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 원장은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고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의원과 함께 서울대 운동권 ‘삼총사’라 불렸다. 80년 ‘서울의 봄’이 오자 영국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홀연히 유학길에 떠났다. 87년 7월 기사연에서 발행한 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그는 “선한 세력들이 이 시대의 징조를 바로 알고, 합심해서 악의 세력들을 이기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되길 바란다”고 적었다.

박근혜, 오랜 유폐에서 벗어나다

독재정권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국본은 결정타를 준비했다. 6월26일로 예정된 ‘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경찰력은 성난 시민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전국의 파출소 29곳, 경찰서 2곳, 민정당사 4곳이 불탔다. 국본은 6·10 대회 때의 3배가 넘는 100만 명이 이날 평화대행진에 참여했다고 추산했다. 결국 3일 뒤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뼈대로 한 6·29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항쟁은 뜻밖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은 오랜 유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정희에 이어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육영사업을 뺀 박근혜 일가의 활동을 가로막았다. 그는 국립묘지에서 부친의 공개 추도식도 열 수 없었다. 그해 여름 박근혜는 신당동 집과 능동 어린이회관을 오가면서 지냈다. 87년 7월 어린이회관 안에 어린이 생활교육기관 근화원을 세웠고, ‘근화원’과 정자 ‘목련정’, 교육장 ‘영혜루’의 이름을 지었다. 그해 가을 처음으로 부친의 공개 추도식을 열 수 있었고, 10년 뒤인 1997년 정계에 데뷔한다.

투쟁은 끝났고, 6월항쟁의 불은 급속히 가라앉았다. 국민들의 관심은 이제 직선제 개헌 이후의 정치 일정으로 옮겨갔다. 넥타이부대가 떠난 대오에 남은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7월로 접어들면서 급속한 산업화 기간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해온 노동자들의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울산의 대공장들은 앞다퉈 노조를 세우려 했고, 회사는 결사적으로 이를 막았다.

6월항쟁 뒤 어느 날 밤 부산과 울산의 판·검사들이 모여 회식 자리를 가졌다. “공안영장 문제로 검찰이 법원과 실랑이할 일은 이제 없겠다”고 누군가 말을 꺼냈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나왔다. 수긍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모두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울산지청 강력부 홍준표 검사가 술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아닙니다. 더 많아질 겁니다. 6·29 선언에는 노동자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잖습니까. 울산은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마약담당이던 홍 검사에게도 공안 사범이 배당됐다. 공안부 인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라서였다. “현대중공업 노동자 36명이 송치됐을 때 ‘전원 구속 전원 기소’가 방침이었는데, 내가 맡았던 한 명만 유일하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죠. 대검 공안부장에게 쌍욕까지 들었지만, 한 명이라도 나가야 노사 간 협상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 뒤 공안 부적격자로 찍혔죠.“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은 전국을 뒤흔든 혼란 속에서 열심히 일했다. 6월 한 달 동안 현대건설이 벌인 착공식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카심 가공송전선공사, 쿠웨이트 움구다이르 송전선공사, 쿠웨이트 파하힐 고속도로 교차로 공사 등 여럿이었다. 그는 지난 2월 민주화 세력을 겨냥해 “요즘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70~80년대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인데,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는 말로 구설수에 올랐다. 그 시절 그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도 맡고 있었다. 위원회는 6월항쟁이 올림픽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호사 천정배는 시국 사건 변호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애초 그의 꿈은 판·검사였지만, “전두환이 주는 임명장은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변호사가 됐고, ‘김&장 법률사무소’에 입사했다. 사람들은 잡히고, 감옥으로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결국 죽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남대문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렸다. 85년 10월이었다. 2년 남짓 바쁘게 일하던 중 6월항쟁이 터졌다. 이후 시국사건 변호 업무가 줄을 이었다. 87년 대선 때 벌어진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을 시작으로 그 뒤 임수경 방북, 문익환 방북, 리영희 방북 등 굵직굵직한 사건의 변호를 받았다. 1988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 창립됐고, 창립 멤버가 된다.

시국사건 변호에 숨 쉴 틈 없던 천정배

젊은 이한열이 숨진 것은 7월5일 새벽 2시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였다. 7월9일 아침 8시, 연세대 교정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바로 전날 감옥 문을 나온 문익환 목사가 목이 멘 소리로 열사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서울대 이애주 교수는 한풀이 춤을 췄다.

장례 행렬은 우리 현대사의 최대 집회로 기록될 만큼 실로 장대한 규모였다. 선두가 서울시청에 다다랐을 때 후미는 아직 연세대 교정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군사정권은 낮게 숨죽여 있었다. 모인 인파가 100만 명이었는지, 200만 명이었는지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따질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파였고,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그 현장에 장례위원회도, 국본 지도부도, 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 협의회도 없었다. 중심을 잃은 사람들은 광화문 쪽으로 머리를 돌렸고, 침묵하던 전경들의 최루탄이 불을 뿜었다. 사람들은 흩어졌고, 다시 모이지 못했다.

이후 양김은 분열했고, 군사정권은 5년 연장됐으며, 3당 합당으로 민주화 세력은 둘로 쪼개졌다. 넥타이부대가 빠진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정권의 탄압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20년이 지난 2007년 여름, 깡말랐던 청년 원희룡은 한나라당 재선 국회의원으로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 있다. 그는 “6월은 가슴 벅찬 승리이기도 했지만, 가슴 시린 상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노동운동가 노회찬은 달변 정치인으로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 있다. “6월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이 한데 이어졌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나아졌을까요?” 진보는 길을 잃었고, 양극화는 심화됐다. 이들은 이따금 잠을 이루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해 여름은 찬란했던가. 20년이 지난 일의 성패에 대해 공박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때 시민들은 청년 박종철의 죽음을 애도하며 노래를 불렀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중) 우리의 수많은 잘못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벅찬 함성들이 한밤의 꿈은 아니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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