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죽어서도 대동법을 외치다

등록 2006-10-13 15:00 수정 2020-05-02 19:24

백성의 피를 짜내는 공납을 폐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건 김육의 집념…양반 지주들의 집요한 반대와 맞서싸운 경제관료가 그리워지는 시대

▣ 이덕일 역사평론가

효종 즉위년(1649) 9월 좌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모친상으로 사직하자 효종은 조익(趙翼)을 좌의정으로, 잠곡(潛谷) 김육(金堉)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김육은 와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은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세 번째 사직서를 반려한 것은 절대 사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김육은 우의정 자리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자 그는 그해 11월 자신을 쓰려면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실시하라는 내용의 상차(上箚)를 올려 대동법 정국을 열었다.

“신을 쓰시려면 대동법을…”

“왕자(王者)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의 변란(天變)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군(人君)이 재변을 만나면 두려워하며 몸을 기울여 수성(修省)하는데 여기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고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행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케 해주는 것뿐입니다.”( 즉위년 11월5일)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정치가 최고의 정치라는 뜻이다. 김육은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동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대동법이 어떤 법이기에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고까지 말한 것일까?

대동법은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을 대체한 법으로서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되다가, 인조 원년(1623) 강원도로 확대됐지만 더 이상의 확대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지방의 특산물을 국가에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 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국가 수입의 60%를 차지하는 주요 세원(稅源)이 됐으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종류가 수천 가지인데다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으며,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뉘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됐다. 더 큰 문제는 불평등한 부과 기준이었다. 공납은 군현·마을 단위로 부과돼 가호(家戶) 단위로 분배되는데, 각 군현의 백성 수와 토지 면적이 달랐음에도 ‘공안’(貢案·공납부과대장)의 부과 액수는 비슷했다. 작은 군현과 작은 마을의 백성들이 불리할 것은 불문가지였다. 더 큰 문제는 한 군현·마을 안에서 대토지를 가진 양반 지주와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전호(佃戶·소작인)가 같은 액수를 부담하거나 가난한 전호들이 더 많이 부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정경유착의 원조라 할 방납업자(防納業者)들까지 농민 착취에 가세했다. ‘놓일 방’(放)자가 아니라 ‘막을 방’(防)자를 쓰는 이유는 공납업자들이 관리들과 짜고 농민들이 마련한 공물을 퇴짜 놓고 자신들의 물건을 사서 납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조 16년(1638) 충청감사였던 김육은 “공납으로 바칠 꿀 한 말(斗蜜)의 값은 목면(木綿) 3필(匹)이지만 인정(人情)은 4필”이라고 상소했는데, 인정이 바로 방납업자들의 수수료였다. 배보다 큰 배꼽인 인정은 모두 빈농들의 피땀이자 고혈이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도망가면 가족에게 대신 지우는 족징(族徵)으로 대응했고, 한 가족이 모두 도망가면 이웃에게 지우는 인징(隣徵)으로 그 액수를 채웠다. 그 결과 마을 사람이 모두 도망가 텅 빈 마을도 적지 않게 됐고, 조정에서도 그 대책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숯 장사 하며 백성을 이해하다

공납폐의 해결책은 사실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이렇게 바꾸면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는 많이 내고 토지가 없는 전호는 면제되게 된다. 대동법이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것은 남인 정객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영의정 이원익이 경기도에서는 공납 대신 토지 1결당 쌀 12말을 걷는 대동법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는데,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왕의 교지 가운데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어 담당관청의 이름으로 삼았다”( 즉위년 5월7일)라고 전하고 있다. 대동법 주관 관청이 ‘백성들에게 은혜(惠)를 베푸는(宣)’ 선혜청(宣惠廳)인 것은 이 법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경기·강원도에 이어 정작 농토가 많은 하삼도(下三道·경상, 전라, 충청)로 확대 실시하는 것은 어려웠다. 양반 지주들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양반 지주들의 나라에서 양반 지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법을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김육의 대동법 상소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동법을) 양호(兩湖·충청, 전라)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이 일에 급급한 것은 이 일은 즉위하신 초기에 시행하여야지 흉년이 들면 또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세운(歲運)이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편리함을 빌려준 것입니다. 명년의 역사(役事)는 겨울 전에 의논해 정하여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신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즉위년 11월5일)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즉위 초에, 또 약간 풍년이 들었을 때 전격적으로 시행해야지 시간을 끌면 갖가지 명분의 반대론에 밀린다는 내용이었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賜死)당했던 사림파 김식(金湜)의 증손자였던 김육은 성균관 유생이던 광해군 때 북인 정권의 실력자 정인홍을 비판했다가 정거(停擧·과거 응시 금지) 조치를 당하고 경기도 가평에서 10여 년간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숯을 팔아 생계를 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김육은 자신의 정치 인생을 일관되게 대동법에 걸었다. 이 상소 11년 전인 인조 16년(1638)에도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그는 “대동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 충청도)에 시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라면서 “지금 만약 시행하면 백성 한 사람도 괴롭히지 않고 번거롭게 호령도 하지 않으며 면포 1필과 쌀 2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16년, 9월27일)라고 주장했다. 대동법 시행은 양반 지주들뿐만 아니라 아전들도 꺼렸다. 대동법을 시행하면 김육의 상소대로 ‘다시 징수하는 명목이 없을’ 정도로 투명해지기 때문에 부패의 여지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인조는 충청도로 확대 실시하는 데 찬성했으나 다른 관료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대동법 불가하면 나를 벌주라

그 뒤 와병으로 물러났던 김육은 효종 때 우의정에 제수된 것을 대동법을 다시 촉발시키는 계기로 삼기 위해 배수진을 친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 불과하니, 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감히 별폭(別幅)에 써서 올립니다.”( 즉위년 11월5일)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자신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따로 올린 ‘별폭’에서 김육은 대동법이 백성들뿐 아니라 국가에도 이익이라고 논증했다. “양호(兩湖·충청, 호남) 지방의 전결(田結)이 모두 27만 결로서 목면이 5400동(同)이고 쌀이 8만5천 석이니, 능력 있는 관료에게 조처하게 하면 미포(米布)의 수가 남아서 반드시 공적인 저장과 사사로운 저축이 많아져 상하가 모두 충족하여 뜻밖의 역(役)에 역시 응할 수가 있습니다.”( 즉위년 11월5일)

그러면서 김육은 “다만 탐욕스럽고 교활한 아전이 그 색목(色目)이 간단함을 혐의하고 모리배들이 방납(防納)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교란시킬 것이니, 신은 이점이 염려됩니다”라고 반대파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했다. 대동법 시행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된 양반 지주들과 부패한 아전들, 그리고 방납으로 배를 불리던 방납업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 명목을 들어 반대했다.

김육의 상소에 대해 효종이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이 원망한다고 하는데, 원망하는 대소가 어떠한가?”라고 물었고, 여러 신하들은 “소민의 원망이 큽니다”라고 답했다.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 즉 양반 지주들이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 즉 가난한 백성들이 원망한다는 뜻이다. 효종은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라”고 사실상 소민들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비록 숫자는 적어도 반대하는 세력이 양반 지주들이기 때문에 그 확대는 쉽지 않았다. 효종 즉위년 12월 좌의정 조익이 대동법 시행을 주청하고 우의정 김육은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條例)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고 가세했으나 효종은 대답하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한다( 즉위년 12월3일).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라”던 효종이 대답을 않는 것으로 바뀐 것은 그사이 양반 지주들의 반대가 심했다는 뜻이다.

근대화의 씨앗을 뿌리다

대동법 반대세력은 김육이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고 말한 것이 방자하다며 일제히 공격했다. 방자하다는 명목으로 대동법 시행을 무산시키려는 것이었다. 효종 초의 조정은 이 문제로 둘로 갈려 집권 서인이 분당되기도 했다. 대동법 실시에 찬성하는 김육·조익·신면(申冕) 등 소수파는 한당(漢黨)이 되고, 반대하는 이조판서 김집(金集)과 이기조(李基祚)·송시열(宋時烈) 등 다수파는 산당(山黨)이 됐다. 김육 등이 한강 이북에 살고, 송시열 등이 연산(連山), 회덕(懷德) 등 산림에 살기 때문에 붙은 당명이었다.

조정 내에서는 반대론자들이 다수였지만 김육은 대동법에 대한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는 효종 2년(1651) 영의정에 임명되자 드디어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장 실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좌의정으로 물러났다가 효종 5년(1654) 다시 영의정이 되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해 대동법을 호남에 확대하려 했는데, 그 시행을 앞두고 효종 9년(1658) 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 대동법은 전라도 해읍(海邑)에 확대 실시됐다가, 현종 3년(1662)에는 전라도 산군(山郡)에도 실시됐다. 드디어 숙종 34년(1708)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전국적인 세법이 됐다. 꼭 100년 만에 전국적인 세법이 된 것이다.

대동법 시행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됐다. 대동법에 반대하던 산당 영수 송시열도 대동법의 효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이를 말해준다. 효종이 “호서(湖西·충청)의 대동법을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가?”라고 묻자 송시열은 “편리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좋은 법이라고 하겠습니다”( 9년 7월12일)라고 답했던 것이다.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국가경제도 발전시킨 대동법은 조선의 역사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조정은 과거 공납으로 충당하던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새로운 물자공급 체제를 수립해야 했는데, 이런 필요성에 따라 생겨난 직업이 공인(貢人)이었다. 관청 물품을 납품하는 공인들은 선불로 받은 물품값으로 수공업자에게 자본을 대주고 제작게 하는 선대제(先貸制)를 실시했다. 이는 상업자본의 수공업 지배 형태로서 자본주의 발달사 초기에 나타나는 상업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대동법이 촉발한 이런 변화는 조선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 즉 근대화를 지향하는 씨앗이 생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들이 다른 요인들에 의해 굴절되면서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했지만 조선 사회 내부에 세계사의 발전 흐름에 부응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대동법은 보여준 것이다. 대동법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잠곡 김육, 대동법의 경세가라고 불렸던 능력 있는 한 양심적 경제관료의 신념이 역사에 남긴 자취는 이처럼 컸던 것이다. 서민경제가 무너졌다고 아우성치는 오늘 어찌 김육 같은 경제관료가 그립지 않겠는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