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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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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는 학원도 춤추게 한다

등록 2006-05-03 15:00 수정 2020-05-02 19:24

심층면접 등 중요해지면서 ‘스피치학원’간판 달고 연일 문전성시… 가족의 생활 속에서 정서적으로 교류하며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은 길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나는 말문이 일찍 트인 편이었다. 그런 나를 일약 동네 스타로 만든 사건이 있었다. 3살 때 교회에서 목사님과 이웃들이 신방을 왔는데 나는 목사님을 향해 “목사님, 개XX”라는 말을 내뱉고는 유유히 사라졌더랬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몇몇은 “어머, 어디서 저런 말을?” 하며 가정교육을 의심했고, 몇몇은 “말솜씨를 보니 애가 보통내기가 아니네”라며 부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말 잘하면 똑똑하다’는 현실 혹은 신화에 힘입어 졸지에 일부 사람들에게 똑똑한 아이 대접을 받았다. 물론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말 잘하는 아이가 똑똑한 아이일까

‘말 잘하는 아이가 똑똑하다’는 등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말하기’와 ‘리더십’의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면서 말 잘하는 아이는 ‘자신감이 있다’ ‘논리적 사고를 한다’ ‘공부도 잘한다’ 등으로 확대해석되고 있다. 진짜 말 잘하는 아이가 똑똑하고 공부도 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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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국어교육과 서혁 교수는 “말은 사고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리 있게 말을 하면 논리적인 사고를 한다는 등식은 어느 정도 성립한다”고 했다. 그러나 취학 이전의 아이들의 경우에는 개별성이 강해서 섣부른 범주화가 위험하다는 의견도 있다. 중앙대 유아교육과 이원영 교수는 “말을 일찍 배우는 아이들 중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아이도 있지만 어른들을 따라하는 흉내내기식의 말하기를 하는 아이도 있다”며 “거꾸로 사물에 대한 생각이 많아 말이 늦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말을 기준으로 적극적이라든지 소극적이라든지, 똑똑하다든지 어눌하다든지 아이를 규정짓거나 속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말 잘하는 아이가 공부도 잘한다’는 등식에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말을 하면서 공부한 것을 정리하면 기억의 효과를 높일 수는 있다. 머릿속에 담아두기보다 꺼내놓고 나면 문제점을 쉽게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말하기를 효과적인 공부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많은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은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 특히 공부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학원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다. 요즘 그들의 레이더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과목’은 말하기다. 공부는 기본이고 활발한 성격에 세련된 화법까지 갖췄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더 이상 일부 욕심 많은 학부모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 열기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먼저 웅변학원은 스피치학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 연사가 힘차게 외치면 그만이던 일방적인 말하기는 시대에 뒤떨어졌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좋고 듣기 좋고 보기 좋은 말하기가 말하기 교육의 핵이다. 백화점 문화센터의 말하기 교실은 몇 년 전부터 인기 상종가를 치고 있다. 동화구연에 아나운싱을 가르치는 학원도 속속 등장했고, 연기를 배우듯 말하기를 배우는 학원도 있다. 말하기 교실을 찾는 이들은 주로 초등학생이다.

4월25일 서울 강남 서초동에 위치한 한 말하기 교실. 아나운서 출신인 윤채현(38)씨가 운영하는 이 교실에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인형극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자기가 맡은 인물에 맞는 이야기를 하면 중간중간에 윤씨가 나서 아이들의 말을 교정해준다. 9살 된 딸을 말하기 교실에 보내고 있는 김진아(가명·34)씨는 매주 경기 분당에서 서울 서초동까지 아이를 데리고 오간다. “책과 언론을 통해 말하기의 중요성에 대해 알게 됐다. 맘 같아서는 직접 아이에게 말하기 교육을 해주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말하기 교실을 선택했다.”

가족회의를 말하기 수업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중·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말하기 교육은 학교 성적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말하기 교육이 ‘구술면접 대비’와 ‘반장·회장 만들기’로 변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심층면접은 외국어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 입시의 중요한 과정이다. 덩달아 심층면접 비율을 높이는 대학도 매년 늘고 있다. 전교 회장 등의 이력은 면접에서 유리할 뿐 아니라 수시 리더십 전형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까지 준다. 말하기가 대입의 중요한 열쇠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강남의 한 유명 말하기 학원의 경우, 초등학생 주말반에 들어가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학원 관계자는 “말하기 교육은 공부와 실력 등 모든 것을 갖춘 아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요즘 학생회장 선거는 굉장히 치열하다. 13 대 1의 경쟁률을 보이는 곳도 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는 소도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맞먹을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회장을 바라보는 학생들은 일찌감치 개인 교습을 통해 말하기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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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학원 바람에는 말하기 교육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공교육도 한몫한다. 서 교수는 “말하기 교육을 점차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라며 “한 반에 40명 정도인 지금의 교육 환경에서 발표 기회도 많지 않고 선생님이 직접 말하기 교정을 해주기는 더욱 힘들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역시 학원뿐일까? 전문가들은 “말하기 문제는 두려움에서 기인하기도 하기 때문에 학원에서 말하기 경험을 확대시켜줄 수는 있다”며 “그러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기술 위주의 말하기 교육은 아이들의 말하기를 획일적으로 만들 우려도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가족과 친구,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생활 속에서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사고하며 말하기를 배우는 것이 가장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방법으로 가족회의가 있다. 주제는 뭐든 좋다. ‘여름휴가는 어디로 갈까’ ‘언니와 어떻게 화해할까’ 등 사소한 것부터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면 된다. 또 하나의 일상적인 방법은 오가는 동안 대화하기다. 부모가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집들이 많다. 등교 시간에 쫓겨 헉헉대며 달리기보다는 조금만 일찍 집에서 나서면 풍부한 대화가 가능하다. 전날 방송 뉴스나 아침 신문에 나온 기사를 주제로 등굣길에 대화하면 논리적인 사고를 키워줄 수 있다. 꼭 등굣길이 아니라 밥상머리에서도 가능한 대화이다.

‘부모 생각 강요’를 조심하라

전문가들은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을 ‘부모 생각 강요’라고 꼽았다. 아이가 제대로 말을 못한다고 혼을 내는 어른들은 어디에나 꼭 있다. 또 공부할 시간 없다며 친구와의 전화 통화마저 막는다. 결과는 두 가지다. 아이를 더 위축시키거나 반항하게 만든다. 부모나 친지, 이웃 등 1차집단에서 말하기의 본을 보여줘야 한다. ‘나도 못하는데 어떻게?’라고 묻는 어른들에게 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의 말하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족이다. 아이들은 경험과 말이 맞아떨어져야 교육 효과를 거둔다. 아이들의 경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도 가족이다.” 방송인이자 한글문화연대 부대표인 정재환(45)씨는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아이를 학원에 내맡기기보다 어른들의 언어 습관을 먼저 교정하고 아이들의 말하기를 유심히 살펴주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말하기의 목적을 성적에 둔다면 아이들은 여러 학원들을 돌고 책 수백 권을 탐독해야 한다. 그러나 말하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의사소통이고 관계 만들기다. 아이가 자신의 개성에 맞는 말하기를 찾고 스스로 논리적인 말하기의 구조를 찾아가는 길은 꼭 학원에 있는 게 아니다. 지름길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숨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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