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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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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수천억, 영수증은 없다

등록 2001-01-16 15:00 수정 2020-05-02 19:21

‘선거자금 유용’ 가능성 충분한 안기부 예산의 비밀구조… 국회 감시는 사실상 봉쇄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옛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부훈(部訓)처럼 국가정보원의 ‘예산’도 철처히 음지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예산이 공개되면 이를 통해 조직 또는 정보수집활동의 내용이나 방향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정원 예산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2급 비밀로 분류돼 있다. 서울 내곡동 국정원 청사 건물유지관리비 역시 기밀사항이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정원쪽은 “건물관리비 등이 공개될 경우, 국정원 예산에서 이것 빼고 저것 빼는 식으로 하다보면 알짜배기 사업 예산이 얼마쯤 되는지 유추할 수 있게 되고 자연히 사업 규모와 내용까지 추정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국정원에서 수년간 몸담았던 한 정치권 관계자는 “안기부에서 20년 근무했던 사람이라도 ‘안기부 예산이 이렇게 돼 있다’고 답한다면 거짓말이다. 안기부는 횡적 구조는 없고 종적으로만 구성돼 있어서 그런 부서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게 정상이다”고 말했다. ‘모른다’는 말이 정답이란 얘기다.

선거자금 유용된 건 바로 ‘예비비’

이렇듯 극비에 부쳐지는 국정원 예산구조는 국정원장조차도 전체 예산규모와 쓰임새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라는 말로 표현된다. 실제로 안기부 예산구조를 낱낱이 알수 있는 자리는 김기섭(지난 5일 구속)씨가 맡았던 안기부 운영차장(지금의 국정원 기획조정실장)뿐인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수사가 한창인 안기부 예산의 선거 불법유용사건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안기부 예산의 이런 비밀구조가 드리워져 있다. 국정원 예산은 △국정원 일반예산으로 편성되는 본예산 △기획예산처가 관리하는 일반 예비비 △정부 10여개 부처에 편성된 이른바 ‘정보예산’ 등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이 3가지를 합친 국정원 예산은 한해 줄잡아 6천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정원 본예산은 한해 2천억원 안팎의 규모로 편성된다. 이 예산은 대부분 국정원 직원 인건비에 쓰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올해 국정원 본예산은 2440억원으로 99년 1963억원 및 지난해 2224억원보다 늘었다.

그러나 국정원 예산 중 정작 덩치가 큰 부분은 본예산이 아니라 기획예산처가 갖고 있는 일반 예비비다. 지난 96년 총선과 95년 지자체 선거 때 선거자금으로 유용됐다고 검찰이 밝힌 옛 안기부 자금이 바로 이 돈이다. 문제의 예산은 당시 재정경제원이 관리하던 예비비였으나 지금은 재경원에서 떨어져나온 기획예산처가 관장하고 있다. 일반 예비비 중 ‘국가안전보장활동비’ 명목 아래 옛 안기부 또는 국정원 예산으로 쓰인 돈은 지난 95년 이후 해마다 평균 4천억원 정도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다. 안기부 본예산의 2배에 달하는 예산이 예비비에 넣어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일반 예비비가 국정원 예산을 은닉하는 금고 노릇을 하고 있다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지적은 해마다 끊이지 않는다.

이렇듯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기형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국정원쪽은 이렇게 설명한다. “국정원의 전체 예산이 드러나면 국가정보역량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보안차원에서 기획예산처 소관의 예비비로 편성해 놓고 있다. 필요에 따라 예비비에서 빼내 쓰는 게 아니고 이미 국정원예산으로 배정된 부분이 있다.”

예비비란 예측할 수 없는 예산 외의 지출 등에 충당하기 위하여 편성하는 것으로, 예비비를 사용하려면 그 이유와 금액, 그리고 내역을 담은 명세서를 기획예산처 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물론 국정원도 예비비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예산이 선거자금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중앙정보부가 창설되기 직전 제정된 예산회계에 관한 특례법 때문이다. 특례법은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활동에 소요되는 예비비의 사용과 결산은 그 추산의 기초나 세부항목을 표시하지 않고 총액으로 배정한다’고 정하고 있다. 게다가 국정원에서 이 예비비를 끌어다 쓸 경우 지출금액만 사용조서에 기재토록 할 뿐 영수증 등 증빙서류 제출은 요구하지 않는다. 국정원이 ‘국가안전보장활동비’ 명목으로 예비비 사용을 신청하면 그대로 내줄 뿐 이 돈이 실제로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는 전혀 통제되지 않는 셈이다. 결국 이번 선거자금 유용은 예비비를 쌈짓돈 쓰듯 할 수 있도록 된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부처에 숨겨져 있는 ‘203예산’

기획예산처는 “올해 편성된 예비비 2조7천억원 중 1조9천억원은 재해대책비나 환차(換差)보전 등의 목적에만 쓰도록 된 목적 예비비이고 나머지 8천억원은 국정원 등에 배정되는 예산”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편성된 일반 예비비 중 국정원이 쓰는 규모 역시 비밀에 부쳐져 있다. 다만 권오을 의원(한나라당)이 예산결산내역을 토대로 분석한 것을 보면, 95년에는 일반 예비비의 99%인 3256억원, 96년에는 98%인 3623억원, 97년과 98년에는 4070여억원, 99년에는 81%인 4200여억원을 국정원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국정원 예산의 나머지 한 부분을 차지하는 각 부처의 정보예산은 ‘203예산’(203은 특수활동비를 일컫는 예산항목 코드)으로 불린다. 물론 이 예산은 각 부처의 예비비 등으로 편성된 만큼, 엄밀히 말하자면, 국정원 예산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보예산’, ‘특수활동비’, ‘정보비’등으로 불리는 이 예산의 근거는 국정원법이다. 국가정보원법 제3조는 국정원의 직무로 ‘정보 및 보안업무의 기획·조정’을 둔 뒤 12조에서 ‘국정원의 예산 중 미리 기획하거나 예견할 수 없는 비밀활동비는 총액으로 다른 기관의 예산에 계상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대통령령에서 기획·조정의 대상기관은 통일부, 외교통상부, 행정자치부, 법무부, 국방부, 문화관광부, 정보통신부, 해양수산부, 과학기술부, 국정홍보처 등 10개 부처로 정하고 있다. 각 부처에 ‘나뉘어 숨겨져’ 있는 국정원 예산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예산은 해당부처 소속 상임위가 아닌 국회 정보위에서 따로 심의한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각 부처 정보예산 기획·조정은 국가정보기관으로서 보안유지를 위해, 기획예산처가 하는 역할을 대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보예산 역시 국회와 감사원의 통제 및 심의에서 벗어나 있기는 마찬가지다. 국회법 제84조는 ‘국정원예산 및 국정원의 기획·조정 대상의 관련예산은 예산 산출의 근거를 밝히지 않고 총액으로만 계상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한구 의원(한나라당)에 따르면 2001년 각 부처별 ‘203예산’의 경우 경찰청은 정보사업비 이름으로 959억원, 국방부는 군사정보비 이름으로 953억원, 법무부 222억원, 대통령실 232억원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정보예산을 편성할 때는 그 액수나 사업내용 등을 국정원과 사전 협의한다”며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왔는지 모르지만 관행으로 그래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에는 정보예산을 통해 안기부가 각 부처를 장악하고 통제해온 것이 사실”이라며 “국정원은 각 시도에 지부만 있기 때문에 전국 곳곳에 걸쳐 있는 경찰조직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보예산을 고리로 다른 기관들을 쥐고 흔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옛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외교부는 ‘203예산’ 편성 거부

기획예산처의 각 부처 특수활동비 편성 기준은 예산산출의 근거를 따지지 않도록 규정한 국회법 때문에 ‘해마다 크게 증액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라는 게 고작이다. 전윤철 기획예산처 장관은 지난해 국회 예결위에서 “일반 예비비 중 국정원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며 “신청이 들어오면 과거실적을 감안해서 지출한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통일부와 정보통신부의 올해 특수활동비는 수억원으로 부 전체예산의 1%가량인 것으로 알려진다. 통일부 관계자는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대북접촉 활동비 등으로 몇해 전부터 정보예산이 편성되고 있다”며 “이 예산으로 수집된 정보내용은 국정원과 협의하고 공유한다”고 말했다. ‘국민의 정부’ 들어 대북·통일 문제에 대한 접근이 늘면서 통일부도 국정원의 주요 기획·조정 부처에 포함된 것이다.

반면 외교통상부는 94년까지 국정원 정보예산이 편성됐지만 그뒤로 없어졌다. 외교부쪽은 “예전에는 안기부가 정보비라는 이름으로 편성한 뒤 허가없이는 못 쓰게 하거나 옛 외무부와 안기부가 조금씩 나눠 썼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외교활동비라는 이름으로 외교부가 독자적으로 편성·집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우리 부처의 위상 문제도 있지 않느냐”고 말해 안보를 앞세운 국정원의 정보예산 편성요구가 기관의 힘에 따라 거부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정보예산이 가장 많이 짜여져 있는 곳은 경찰이다. 수백억원의 국정원 관련 예산이 편성된 것으로 알려진 경찰청은 이 돈의 절반은 정보과 직원의 외근활동비 등 인건비 명목으로 나머지 절반은 ‘사업’에 쓰인다고 밝혔다. 경찰청 관계자는 “외근 활동비는 경찰 본예산에 책정되지 않고 국정원과 사전협의를 거쳐 짠다”며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업이 부처들끼리 들쭉날쭉하게 되면 국가 전체적으로 낭비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각 부처 정보예산은 국가기밀에 해당돼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심지어 정부부처 예산결산 심사를 맡고 있는 감사원의 감사대상에서도 빠진다. 감사원 관계자는 “국가기밀을 다루는 기관에서 기밀이라고 할 경우 그 내용이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국가기밀이 아니니 감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각 부처 정보예산은 국정원에서 관리하는 비목(秘目)으로 알고 있다”며 “국정원이 아닌 각 부처에 편성된 것이므로 내역을 보겠다고 하면 해당 기관이 곧바로 국정원에 연락하고 그러면 그쪽(국정원)에서 국정원 자체예산으로 취급해서 보여주지 말라고 지시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결국 이런 ‘접근의 한계’가 국정원 예산이 허투루 쓰일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감사원은 특히 국정원 예산이 각 부처 예산에 어떻게 편성돼 있는지 또는 그것이 해당부처 예산인지 국정원 예산인지도 구분하기도 애매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예산내역 낱낱이 기록, 10년 뒤 공개를”

한때 국정원에 몸담았던 국회 관계자는 “옛 안기부 시절 청와대 예산이 적다보니 대통령 해외 순방 등 돈이 필요할 때 안기부가 예산을 빼서 대준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태우 정권 때는 청와대가 기업으로부터 돈을 끌어모아 통치자금을 조성해 썼지만 김영삼 정권 때는 주로 안기부를 통해 돈을 받아썼다는 게 정설이라고 덧붙였다.

국정원의 어둡고 음습한 예산에 대한 감사는 국회에서도 사실상 봉쇄돼 있다. 지난 94년 국가정보기관의 예산을 감시하는 장치로 국회 정보위원회가 신설됐지만 그뒤 옛 안기부나 국정원의 예산전용을 문제삼은 적은 거의 없을 정도로 허술한 심사에 그치고 있다. 게다가 국정원법은 국정원 예산이 국회의 통제로부터 비켜나도록 보장하고 있기도 하다. 국정원법 제13조가 ‘국가정보원장은 국회예산결산심사 및 안건심사에서 국가의 안전보장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국가기밀사항에 한하여 자료의 제출 또는 답변을 거부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회법은 국정원 예산은 다른 부처와 달리 예결위특위를 거치지 않고 정보위 심의만 거친뒤 곧바로 본회의로 넘기도록 규정하고 있다.

물론 국가정보기관의 예산이 낱낱이 공개되는 게 국익에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국회나 감사원의 통제 ‘바깥’에 있고 예산 규모나 사용처가 철저히 ‘비밀’에만 부쳐지는 한 국정원 예산은 언제든 이번 선거자금 불법유용처럼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국정원 내부 감사제도를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승수 변호사는 “국정원 자체 감사실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그 내부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조차도 ‘비밀’인 상태에서는 외부에 의한 감사와 견제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반부패국민연대 안태원 홍보국장은 ‘간접적’인 통제방식으로 사후 예산결산공개 방안을 내놓았다. “국익을 위해 공개가 불가능하다면 원칙이라도 확고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의 예산사용처를 낱낱이 기록하되, 예컨대 10년 뒤에 공개할 수 있도록 한다면 역사의 평가 때문이라도 현직에 있으면서 선거자금으로 예산을 쓰는 등의 일은 저지르지 못할 것이다.”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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