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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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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5 - 막걸리 보안법] 감옥으로 간 취중 농담

등록 2005-02-02 15:00 수정 2020-05-02 19:24

거대한 감시체제 구축한 ‘막걸리 보안법’… 출소 뒤 세상 불평했다가 다시 끌려가기도

▣ 김경환/ 자유기고가 plainlife@hanmail.net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였다. 1958년 12월24일 이승만 정권은 무술경관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단 3분 만에 국가보안법 3차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사사오입 개헌, 부정부패 등으로 민심이 이반하고 조봉암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당에 대한 지지가 증가하던 상황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 대선에서 정권을 내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반대 여론을 봉쇄할 목적으로 나온 개정안은 인심혹란죄, 헌법기관에 대한 명예훼손죄가 추가되는 등 독소 조항들로 가득했다. 날치기 뒤 국민 통제가 강화된 것은 당연했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욕설을 퍼붓던 이에게 징역 3년이 확정되기도 했고,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보고 폭언을 했다가 경찰 수배를 받은 이도 있었다. 이때부터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수많은 무지렁이들의 곤욕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면서 정치적 의사표현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의사표현의 자유를 차단, 결국 권력이 요구하는 가치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훈련시켰다. 그 결과 국민 스스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신고하는 거대한 감시 체제를 구축했다.

박정희 정권이 군사 쿠데타 직후인 1961년 7월3일 제정한 반공법은 “국가 재건 과업의 제1목표인 반공 체제를 강화함으로써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공산 계열의 활동을 봉쇄하고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목적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의 국가보안법과 달리 처벌 범위나 대상, 형량이 훨씬 강화된 것이었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은 지속적으로 적용됐고, 1964년 뒤부터는 국가보안법에 견줘 반공법이 평균 2배 이상 더 많이 적용됐다. 이는 반공법 제4조(찬양·고무)의 남용에 따른 것으로 반국가단체에 이로운 언동을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유신시대는 단연 막걸리 반공법과 막걸리 보안법의 전성시대였다. 수많은 농투성이, 무지렁이, 장삼이사들이 ‘주둥아리 한번 잘못 놀린 죄’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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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도발은 소련놈과 미국놈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거나, 술자리에서 북한의 군가를 불렀다거나, 전문 우표수집가가 북한의 선전문구가 있는 우표를 취득했다 해도 반공법 4조1항의 동조행위에 해당한다며 처벌했다. 또 가옥을 철거하려는 철거반원에게 “김일성이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소리지른 사람과 “예비군 훈련이 지긋지긋하다. 내일 판문각 관광 가는데 수틀리면 북한으로 넘어가버리겠다”고 말한 사람도 구속·처벌했다.

영문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붉은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는 도안과 영문자(North Korea, Land of the Free)가 들어 있는 점퍼를 미 군인의 주문에 의해 제조하고 진열했다가 북한을 고무·찬양했다고 잡혀갔으며, 음식점에서 한 노동자가 동석한 노동자 4명에게 “남한은 세금이 많아서 못 산다. 남한은 10년이 걸려도 북한 정권 못 따라간다”고 말했다가 구속됐다. 강원도 산골의 한 농부는 막걸리를 마시고 얼큰해진 김에 “우리나라가 통일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박근혜를 김정일에게 시집보내면 된다”고 농담했다가 그 다음날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은 뒤에 국보법 위반으로 몇년의 징역살이를 했다. 그 농부는 출소 뒤 한이 맺혀 “취중에 농담도 못하냐. 농담 한마디 한 것 가지고 몇년씩 징역 살리는 이놈의 세상이 김일성보다 못하면 못하지 나은 것이 뭐냐”고 말했다가 다시 끌려가 국보법 위반으로 또 몇년의 징역을 살아야 했다.

우리 내면에 새겨진 반공 코드

막걸리 보안법의 대상이 됐던 사건들은 취중이나 흥분한 상태에서 자제력을 잃고 우발적으로 행동하거나 발언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내용도 유치하고 단순해 아무런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은 것으로 사법적으로 처벌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것들이었다. 박원순 변호사는 이에 대해 “처벌할 가치가 없는 사건을 끊임없이 문제 삼아 처벌해온 검찰과 사법부의 관행은 언론의 자유와 그것을 본질적 구성요소로 하는 민주주의의 질식을 가져왔던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낸 슬픈 우화, 막걸리 보안법은 이제 껍데기만 남은 것일까. 보안법이 폐지되거나 개정되면 앞으로 이런 일들을 보거나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반세기 넘도록 지속돼온 거대한 광기의 시스템 속에서 내면화한 반공 코드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반공국가의 투철한 신민으로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각종 반공의 기제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지하철 출근길에, 어느 거리의 모퉁이에, 관광지에, 전쟁기념관과 유적지에 반공의 상징물들은 여전히 널려 있다. ‘수상하면 신고하는’ 이웃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가 그런 이웃인 한, 막걸리 보안법의 망령은 죽지 않고 떠돌면서 잊을 만하면 한번씩 우리의 내면에 새겨진 반공 코드를 자극할 것이다. 박정희 철권통치는 인권만 유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마저 병들게 했다. 막걸리 보안법이 희비극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참고: 국가인권위원회 <국가보안법 적용상에서 나타난 인권실태>(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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