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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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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8 - 베트남] 베트남, 박정희의 로또복권

등록 2005-02-02 15:00 수정 2020-05-02 19:24

젊은이들 핏값 덕에 미국으로부터 ‘권력강화 오케이’ 사인… 후대에 고엽제와 학살의 유산 떠넘겨

▣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야 임마, 박정희가 니 친구야?”

2000년 12월1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 군사평론가협회와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공동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 재조명 대토론회’를 열고 있었다. 베트남전 파병에 관해 비판적 태도를 지닌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쪽 토론자가 파병의 배경을 설명하려 하자 군복을 입고 방청석에 앉아 있던 50대의 참전군인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은 “박정희의 파병”이라는 한마디였다. 그는 토론석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말하란 말이야, 박정희 대통령!”

통치기간 18년중 9년간 전쟁

박정희는 18년의 통치기간 중 무려 절반에 해당되는 9년간 ‘전쟁’을 했다. 64년 9월 태권도 교관단과 의료단 파견을 시작으로, 파리 휴전협정이 맺어진 직후인 73년 봄까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연인원 32만명의 한국군 병력이 베트남에 갔다. 1961년 11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정희 기획, 케네디 후원’으로 꾸며진 ‘파병 작품’이었다. 그 결과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5천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1만6천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통계로 잡히지 않는 수만명이 지금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의 성격을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있지만, 상당수 참전군인들은 ‘반공성전’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낮추는 일은 곧 자기를 부정하고 모독하는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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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군인들은 종종 머리띠를 매고 경부고속도로를 점거한다. 고엽제 피해자에 대한 만족스럽지 못한 대우에 울분을 터뜨리기 위해서다. 경부고속도로는 10억달러 내외의 외환수입을 올렸다는 이른바 ‘베트남 특수’의 상징이다. 베트남의 정글에서 하나뿐인 목숨을 걸었던 참전군인들의 피눈물 대가로,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재원을 마련했고 산업화에 가속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결국 남한은 남베트남이 패망하던 75년을 기점으로 북한의 경제력을 추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 한국의 젊은이들이 싼값으로 미국 젊은이들을 대신해 피를 흘려주는 동안, 박정희는 3선 개헌이나 유신 따위의 권력강화 프로그램을 착착 진행할 수 있었다. 미국의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고….

그러나 베트남전 파병의 부정적 유산은 박정희가 죽고 난 뒤 한참이 지나면서야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고엽제 피해자의 고통이나 라이따이한 문제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뜨거운 이슈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었다. 99년 <한겨레21>의 최초 보도로 알려진 이 사안은 2001년8월 김대중 대통령의 사과로까지 이어졌다.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상대는 한국을 방문했던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이었다.

‘박정희 군대’와 ‘새벽종’의 두 얼굴

베트남 사람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란 말은 어색하다. 78년 하노이에서 태어난 베트남 여학생 하민탄(서울대 석사과정)은 ‘박정희 군대’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학교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다. 그것을 수식하는 말은 ‘용병’이었다. 한국군이 베트콩 토벌작전을 벌였던 베트남 중부지방 곳곳에선 ‘박정희 군대’의 민간인 학살을 원망하는 ‘증오비’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선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일부 벤치마킹했다는 ‘문화마을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 종이 울렸네~”로 시작되는 그 추억의 노래가 베트남어 가사로 바뀌어 울리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인에게도 박정희는 두 얼굴로 기억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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