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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수출은 누구의 살길이었나

등록 2005-02-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의 명암… 내수 부진·인플레이션·소득 격차 등 부작용은 지금도 계속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1968년 2월 착공해 2년5개월 만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추풍령에 세워진 고속도로 준공기념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길’. 경부고속도로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의 유례없는 압축 성장을 이끈 축은 수출이었다. 한국 경제는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수출 1위 기업은 반드시 도산”

‘수출만이 살길’이란 구호가 지배하던 그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매달 수출진흥확대회의에 각부 장관, 재계 대표, 은행장 등을 모아놓고 품목별·지역별 수출실적을 하나하나 챙기고 질문했다. 연말이 되면 상공부는 그해 수출 목표를 달성하려고 온통 난리였다. 날마다 수출업체를 다그쳐 선적을 독려하고 출혈 수출도 강요했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온 나라가 ‘수출 전쟁’을 벌인 때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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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흥미롭게도 당시 “수출 1위 기업은 반드시 도산한다”는 속설이 생겨나기도 했다. 1960년대는 정부의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수출을 많이 한 기업이 재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수출을 잘하는 기업한테 박정희가 특혜를 주고 기업 덩치를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자 기업마다 무작정 수출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적자든 덤핑이든 수출만 많이 하면 되었기 때문에 업계간 실적경쟁이 치열했고, 해마다 수출랭킹 1위 업체가 뒤바뀌었다. 초창기 수출 개척자였던 삼호무역은 재계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1971년 수출 1위였던 동명목재도 도산했다. 1973년 사상 최초로 1억달러를 수출해 신기원을 열었던 한일합섬도 무리한 수출실적을 올리느라 큰 타격을 받아 그 뒤 사세가 크게 둔화되었다. 대한상공회의소 강승일(66) 상의역은 “당시에 수출을 많이 했어도 금리도 비싸고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폭리를 낼 수도 없는 처지였고, 지금에 비하면 이익이래봐야 코 묻은 돈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사실 가발·양말·신발 등을 팔아서 벌어들인 외화이다 보니 이윤이 많이 날 수 없었다.

물론 내수시장이 좁은 한국으로서는 산업화 초기부터 수출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모델은 “수출만 키워서 잘살아보자”는 ‘차별화’ 성장전략이었다. 당시 회사채 수익률과 수출금융 금리간의 차이를 보면 1965년 7.5%이던 것이 1970년에는 18.6%로 더 벌어졌다. 이런 수출기업에 대한 금리 혜택에 이어 중화학공업에서도 대폭적인 세금지원이 이뤄졌는데, 1970년 초부터 80년 초까지 중화학공업의 유효세율은 20% 미만에 불과했던 반면, ‘내수’의 기반인 경공업 세율은 50%에 가까웠다. 소비의 성장기여율(1998∼2002년의 경우 66%)은 1971∼80년까지 53.5%로 매우 낮았다. 대외 수출에만 매달리다 보니 경제지표의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나타내는 소비는 크게 지체된 것이다. “작은 빵을 지금 당장 갈라 먹기보다는 키워서 갈라 먹자”는 것이 당시 구호였지만, 빵이 수백배나 커진 지금도 이 구호는 여전히 우리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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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비는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분에 따라 임금과 중소기업 납품단가를 ‘줄여야 할 비용’으로 봤다. 임금과 납품단가는 내수의 기반이 되는 것인데, 내수를 ‘성장 동력’이 아니라 ‘비용’으로 인식해 저임금과 납품단가 인하를 강압적으로 유도했다. 물론 여기에는 노동자의 의욕보다는 기업의 의욕이 앞서야 성장 속도가 빠르고 경제의 효율이 높아진다는 맹신이 깔려 있었다. 박정희는 또 소비대출을 금지하고 내자를 동원하기 위해 1965년 정기예금 금리를 일거에 15%에서 30%로 인상해 사실상 강제 저축을 유도했다. 소비를 억제하는 대신 그 돈을 산업자금으로 동원해 수출기업을 도운 셈이다. 1960년대 중반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도 수출기업에 제공할 차관을 빌리기 위해 보내졌다. 정부는 당시 간호사와 광부의 봉급을 담보로 잡고 차관을 얻어왔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수출경쟁력 확보의 원천이었지만, 수출 증대의 명분 아래 국민들이 희생을 강요당한 건 ‘물가 폭등’에서도 한눈에 나타난다. 물건을 나라 밖으로 보내고 그 대신 돈을 들여오는 수출 중심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됐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통화량 증대로 이어져 물가가 계속 오른 것이다. ‘수출입국’이 노동자들의 저임금으로 가능했는데, 오히려 수출 증대가 노동자들에게는 또다시 ‘높은 물가’로 보복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1974년 24%, 1975년 25%를 기록하는 등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했다. ‘독재’뿐 아니라 ‘성장’의 뒤편에서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것이다.

통화 가치 떨어지자 투기 바람 불어

성공회대 유철규 교수(경제학)는 “당시의 경제 성장은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는 인플레이션 자본 축적이었다”며 “대출받은 기업의 경우 물가 상승에 따라 채무 상환 부담은 낮아지고, 대출받은 돈으로 부동산을 사두면 자산 가격이 올라 경영에 실패하더라도 투자 비용을 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가가 인플레이션을 통해 기업의 비용을 낮춰준 것이다. 인플레이션 아래서 기업은 부담을 상품 가격에 반영해 이윤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지만, 거꾸로 인플레이션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떨어졌다. 유 교수는 이를 저임금·저곡가에 기초한 ‘내수 억압적 불균형 산업전략’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내부 소비구조가 형성되지 못함에 따라, 한국 경제는 그 뒤 대외여건이 어려워져 수출 증가율이 둔화됐을 때 내수를 확대해 불황을 넘어가기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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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기업 지급보증 등 각종 지원·특혜로 자금을 풀면서 총통화 관리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물가 폭등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그때부터 ‘투기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기업들도 대출받은 돈으로 비업무용 부동산을 사들여 앉아서 떼돈을 버는 등 투기를 부추겼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머리카락 자른 것을 수집해 가발을 해외에 팔았던 초창기 수출 품목은 그 뒤 자동차·전자·반도체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강의 기적’ 뒤편에서 부의 불균등 분배는 박정희 시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심화)는 1965년 0.344, 1970년 0.332, 1976년 0.391, 1980년 0.389, 1993년 0.310으로 나타났다. 대개 1960∼70년대를 ‘절대 빈곤의 평등’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도성장, 대외환경 덕분도 크다


박정희 시절 고도성장의 핵심 원천을 들라면 대부분 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꼽지만, ‘대외여건’(대일청구권·월남전·오일달러 등)이 성장에 미친 영향도 크다. 첫째, 외자 동원이 산업화의 성패를 결정지은 1960년대에 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다. 대일청구권을 받아 산업화 자금으로 쓰려는 게 목적이었다. 대일청구권 자금(무상 3억달러, 공공차관 2억달러, 상업차관 3억달러)은 포항제철 건설, 소양강댐 건설 등에 쓰였다.
둘째,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늘어난 미국 원조는 국방비 지출 확대를 줄이고 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투자할 여유를 주었다. 한국군 월남 파병의 대가로 미국은 군사원조 외에도 수출 진흥을 위한 경제·기술 지원을 했는데, 1965∼70년간 미국의 직·간접 경제 지원은 10억달러 이상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대건설이 최초로 수주한 해외건설 사업인 타이의 고속도로 건설도 미국 정부 예산에 의해 수주된 것이었다. 월남전은 또 당시 국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국내 중화학 기업들에게 주요 수출 시판 장으로 활용됐다.
셋째, 제1차 석유파동 이후 중동 산유국에 오일달러가 넘쳐들어오자 산유국들은 유럽 은행들에 돈을 예치했고, 유로 뱅크는 별다른 조건을 붙이지 않고 한국에 오일달러를 빌려줬다. 한국이 도입한 유로 뱅크론의 주간사 은행들은 주로 미국계였는데, 한국의 안보 전략적 위치를 고려해 오일달러를 도입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서강대 조윤제 교수는 “우리나라가 60∼70년대 부진한 국내 저축률 하에서도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적절한 경제정책과 국민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우리를 둘러싼 이런 대외환경이 큰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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