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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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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진실 ‘의도적 은폐’

등록 2000-12-12 15:00 수정 2020-05-02 19:21

미국의 논리에 휘말려 정치적 타협책 모색… 주권국가 자존심 버리고 양민학살에 면죄부 안길 건가

결국 정치적 해결로 가는가?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진실규명 작업이 의혹만 키우면서 막판으로 접어들고 있다. 아직 한국과 미국 진상조사반의 최종 조사결과보고서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현재 전개되고 있는 한미간 이견조정 상황을 보면 ‘역사적 진실’보다는 ‘정치적 타협’으로 매듭짓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워싱턴쪽에서는 상부명령에 의한 학살로 결론짓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상호이해’에 한·미 양국이 도달했다는 말이 이미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국방부 고경석 실무조사반장은 “미국 조사단으로부터 공식 확인된 것은 아니다”며 “아직 결론을 내리기 위한 과정에 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상부명령에 의한 학살로 규정할 증거 부족?

노근리 학살사건을 둘러싼 한미간 쟁점은 △항공폭격과 기총소사 여부 △지휘부의 명령계통에 의한 조직적 학살 여부 △민간인 학살의도의 고의성 △미국 정부의 사과와 보상문제 등이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는 지난 12월6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노근리사건 대책단회의를 열어 그동안의 진상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양쪽의 의견을 최종 조율했다. 국무조정실 김병호 총괄심의관(노근리대책단 수석대표)은 “양쪽의 최종보고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진상조사내용이나 양국간 논의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며 “상당한 의견접근을 보았지만 핵심쟁점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해 최종 공동발표문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 수석대표가 말한 ‘의견접근’은 노근리에서 미군 사격이 있었고 이에 따른 피해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미국도 인정했다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애초 노근리 학살 자체를 부인하던 것에 비교해보면 나름의 진전이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핵심은 명령계통에 의한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학살 여부다.

이에 대해 국방부 김종환 정책보좌관(진상조사반장)은 “어떤 부분은 양쪽이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합의가 어려운 부분은 각국이 조사한 결과만을 그대로 보고서에 쓸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쪽이 공동으로 최종보고서를 내기는 어렵고 결국 각각 따로 보고서를 발표하는 형태로 종결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조직적 학살여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빠진 채 증언과 문건 등 그동안의 조사내용을 나열만 하는 선에서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양국이 노근리 진실에 합의하는 데 진통을 겪고 있는 현실은 우리쪽의 공동조사 요구를 미국이 거부하면서부터 이미 예고됐던 것이다. 지난해 9월 의 노근리 학살보도 직후 시작된 진상조사는 양국이 각각 자체적으로 대책단, 진상조사반, 자문위원단을 꾸려 개별조사하는 형식으로 진행돼왔다.

한-미관계 고려해 외교적 협상으로 여겨

쟁점별로 살펴보면, 먼저 항공폭격과 기총소사 여부는 미국쪽도 인정하는 대목으로 알려졌다. 이는 애초 미국 정부가 민간인 사격 자체를 부인하던 것에 비교하면 진전된 것이다. 양국 자체 진상조사반의 현장확인과 참전미군 및 피해자들의 증언 청취 과정에서 노근리 학살이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실로 명백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진상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 미군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난민들에게 발포하라’는 등의 당시 한국전쟁관련 비밀문서도 미국이 학살 책임을 비켜갈수 만들었다.
하지만 학살의 고의성 부분에서는 양국이 막바지까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미 국방부 조사단의 노근리 최종보고서는, 학살은 인정하되 상부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으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군 지휘부에 의한 조직적인 발포명령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쪽은 이런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의 항공폭격 등을 담은 문건들이 발견되고 있긴 하지만 ‘노근리’라는 특정된 지명이 나오는 문건은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지난 7일 한미대책단회의 결과를 브리핑하면서 노근리대책단 김병호 수석대표는 노근리 문제로 한-미 관계에 금이 가는 상황을 우려한 듯 줄곧 우호관계를 강조했다. 그는 “노근리 피해주민의 고통과 미 참전군인의 희생, 나아가 노근리 문제가 한-미 우호관계에 끼칠 영향을 감안해야 한다”며 “미국도 이런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실규명에 최선을 다한다는 정부의 의지선언에도 불구하고 노근리의 진실이 자칫 한-미관계를 고려한 외교적 협상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한국쪽 노근리 자문위원단의 한 관계자는 “한미간 특수한 관계가 진실을 놓고 흥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날까 우려된다”며 “받은 것도 없이 진실의 주권까지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우려는 이미 곳곳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노근리라는 지역을 특정할 만한 문건이 없는 만큼 상부지시에 의한 고의적 학살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미국쪽 주장을 우리 정부도 인정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노근리 대책단 관계자는 “미국이 몇월 며칠 어디에서 항공폭격과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노근리라는 특정 지역에서 1950년 7월26일 정오께 폭격이 있었다고 인정할 만한 공식 문건이 양쪽 모두 없다”고 털어놨다.
노근리 대책단의 또다른 관계자도 “증언들도 엇갈리는데다 객관적 증거도 없어 결국 이런저런 ‘말’이 전부인 게 현실”이라며 “이런 것들이 전체 상황을 구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하드 에비던스(명백한 증거)라는 점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우리 정부가 제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군의 의도적인 학살 ‘가능성’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쪽 주장을 뒤집을 문건을 우리쪽이 갖고 있지 않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곤혹스러움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우리 정부가 피해주민들의 명백한 증언은 소홀히 한 채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당시 문서들에 지나치게 압도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실규명 의지를 의심케 한다다. 서울대 정진성 교수(노근리사건 자문위원)는 “정부가 조사과정에서 피해주민과 미국 정부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는 정부가 미국과의 공조관계에 좀더 중요성을 두고 있는데다 피해자를 협력자보다는 단지 조사대상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양성철 주미 대사의 최근 발언은 노근리 문제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 인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양 대사는 지난 9월25일 워싱턴 기자간담회에서 노근리사건을 “isolated incident”(국지적 사건)라고 표현한 뒤 “한국을 돕기 위해 온 미군이 의도적으로 양민을 학살한 것은 아니며 이 일이 한미간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진실을 파헤치기보다는 지금의 한-미관계를 해치지 않는 쪽으로 마무리되는 게 낫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일섭 국방차관은 최근 국제안보 학술대회에서 “노근리사건이나 매향리 문제 등은 한국 내 몇만명에 불과한 소수의 목소리일 뿐 우리 국민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근리의 진실이 미국에 끌려가는 현실은 정부의 이런 미온적인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는 셈이다.

당사자 증언이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없나

최종보고서가 앞으로 각각 따로 나올지 아니면 공동합의보고서 형태로 나올지는 아직 확언하기 힘들다. 하지만 대책단 관계자들의 말은 우리 정부가 ‘혼란스런 전쟁상황에서 빚어진 우발적 사건’이라는 미국쪽 주장을 수용하거나 일정한 수준에서 ‘이해해주는’ 쪽으로 가고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이는 ‘노근리’라고 지역을 특정한 문건이 없는 등 현실적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라고 정부쪽은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과연 정당한가. 이를 위해 그동안 나온 몇 가지 증언과 증거들을 살펴보자.
지난달 보도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학살을 자행한 미 제7기갑연대 무전병과 통신병으로 참전했던 로런스 레빈과 제임스 크럼이란 병사 두명은 “상급지휘본부로부터 지휘계통을 따라 발포명령이 전달됐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또 “피난민 대열에 위장한 북한군이 끼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미군이 고의로 발포했을 개연성이 높다”며 “미국 진상조사반 조사에서도 같은 증언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학살의 고의성을 간접적으로 밝혀주는 중요한 증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국 대책반 관계자는 “미국 진상조사반은 이들 병사의 기억도 ‘들은 것’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며 “우리쪽이 봐도 이를 명확한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진실을 캐자는 것인지, 한-미 우호관계 속에서 미국과 진실 왜곡을 공조하자는 것인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또 한 가지. 노근리사건이 나기 하루 전인 1950년 7월25일치 터너 로저스 미 공군 대령이 팀버레이크 장군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한 메모는 “피난민들 사이에 북한군이 명백히 포함됐거나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한 미 제5공군 항공기들이 피난민을 공격하지 않도록 정책을 수립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사과와 보상문제는 제대로 언급도 못해

특히 1972년 미군 역사기록관 제임스 슈내블이 작성한 ‘정책과 방향:전쟁 첫해’란 제목의 한국전쟁 기록은 “미 해군과 공군의 항공기를 이용한 사격명령이 맥아더 사령관 아래 수준에서는 내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미 진상조사반은 정확한 지명이 명시되지 않은 만큼 여러 문건들이 직접적으로 노근리와 관련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항공폭격과 노근리사건을 분리시키는 동시에 이런 ‘증거부족’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밝혀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강변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한 우리 대책단의 말은 이렇다. “노근리에서 양민학살이 있었지만, 미 참전군인들의 증언은 그곳이 노근리인지 어딘지 구체적으로 기억이 없다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문건에도 노근리라고 나오는 건 없다.” 미국의 ‘명백한 증거 부족’ 주장을 쉽게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 정부가 양민학살에 면죄부를 주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쪽 노근리 자문위원은 미 국방부의 조사결과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해병대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피트 매클로스키 국방부 자문위원은 “피난민에게 사격을 가하라는 명령의 존재여부에 대해 (미국 조사단이) 모호한 결론을 내린 데 동의할 수 없다”며 “발포명령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참전군인들의 증언을 미 진상조사반이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매클로스키의 이런 비판과 관련해, 미국에서 참전군인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던 마이클 최 변호사(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 변호인)는 미 조사단 증언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미국은 핵심증인 49명을 조사하면서 증언에 따른 형사처벌 운운하면서 입을 막기도 했고 이러이러 해서 결국 사격을 하게 된 게 아니냐고 유도하는 식으로 물어봤다”며 “미국이 미리 판을 짜놓고 스토리를 맞춰가는 식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노근리사건에 대한 사과와 보상문제는 우리 정부가 미국쪽에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근리대책단 김병호 수석대표는 “지난 6일 한미간 의견조정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입장으로 공식 제기한 것은 아니지만, 피해주민들의 보상 요구를 미국쪽에 전달했다”며 “미국쪽의 사과는 클린턴 대통령을 반드시 지칭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또다른 노근리대책단 관계자는 “클린턴 대통령이 임기 내에 노근리 문제를 마치겠다고 한 만큼 데드라인은 그쪽에 설정돼 있으며 우리는 이를 최대한 활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는 진실규명뿐만 아니라 사과와 보상문제에서도 우리 정부가 과연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심케 한다.
이런 가운데 미국 대책단은 노근리 피해주민의 숫자를 신고된 248명보다 훨씬 적은 178명으로 한사코 국한하면서 우리쪽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와 달리 미국쪽은 이미 보상문제를 감안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 정부가 노근리의 분노를 키우고 있다

노근리 피해자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50년 전 여름의 기억과 싸우고 있지만, 침묵으로 일관하다 떼밀리다시피 진상조사에 나선 우리 정부는 엇갈린 증언과 기억을 내세워 적절한 수준에서의 봉합쪽으로 사건을 매듭지으려 한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 정구도 대변인은 “한국 정부가 역사적 진실을 모양새를 갖춰 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흥정과 타협으로 왜곡될 수 있는 공동발표에 연연하지 말고 주권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진실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보이라”고 촉구했다. 노근리 조사가 사실상 끝난 지금, 남은 것은 진실이 아니라 더욱 커져가고 있는 피해자들의 분노다.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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