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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에게 ‘민주화 훈장’을 달아줄 것인가

등록 2004-08-11 15:00 수정 2020-05-02 19:23

‘보류 및 계속 조사’로 잠정결론 난 민주화 보상심의… ‘10 · 26 재평가’ 사회적 논쟁의 광장으로 나올 채비


유신의 심장을 향해 총을 쐈다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그의 민주화 기여 여부를 놓고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가 심사 중이다. 김재규는 정당하게 재평가받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민주화 유공자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죽은 김재규가 2004년의 대한민국을 다시 시험에 들게 하고 있다.

국무총리 소속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주화심의위·위원장 변정수)는 8월9일 위원회에 딸린 소위원회 성격인 ‘관련자 및 유족 여부 심사분과위원회’(관련자 분과·위원장 정동익)를 열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민주화 보상심의 신청건을 심의했다. 10·26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성격이 불가불 담김에 따라 ‘판도라의 상자’로 여겨져온 김재규에 대한 민주화 관련자 여부 문제가 본격적인 논쟁 테이블에 오른 것이다.

민주화심의위는 2001년 10월26일 김재규씨의 5촌 조카 김진백씨가 김재규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함에 따라 올해 5월 함세웅 신부, 예춘호 한국사회과학 연구회 이사장, 고 장준하씨의 장남 호권씨 등의 증언을 청취했다. 이들은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의 주요 멤버들이다.

그러나 이 심의위의 관련자 분과는 신청자의 적격성, 즉 해당자의 4촌 이내를 벗어난 점을 지적해 신청을 기각했으며, 이에 김재규의 부인 김영희씨가 7월12일 심의를 재신청했다.

‘신속한 심의 결정’은 일단 어려워져

이 사건에서는 변정수 민주화심의위원장이 신속한 심의를 주문했다는 점도 한때 주목을 끌었다. 위원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영희씨가 심의를 재신청한 직후인 7월19일 관련자 분과 회의에 이 안건이 곧바로 상정됐다. 이에 몇몇 관련자 분과 위원들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중대한 사안을 이렇게 서두를 이유가 있느냐. 판단 근거들이 완벽하게 확보된 상태인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자료조사를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해 본안 심의가 보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화심의위는 8월9일 오후 2시 두 사람의 증인을 불러 참고인 진술을 다시 청취했다. 본위원회 위원들과 관련자 분과 위원이 함께 모이도록 함으로써 ‘시간 절약’ 효과도 냈다. 증인으로는 10·26 사건 재판 당시 육본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관을 맡은 전창열 변호사와, 김재규를 변호한 강신옥 변호사가 출석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관련자 분과가 같은 날 오후 4시부터 회의를 열어 3시간여 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보류 및 계속 조사’라는 잠정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민주화심의위는 애초 관련자 분과가 이날 ‘인용’ 결정을 내릴 경우 1주일 뒤인 8월16일 본위원회를 열어 최종 결정을 내릴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관련자 분과는 이날 ‘인용’과 ‘기각’을 모두 피하고 사안을 보류한 가운데, 근거 기록과 증인 등을 더 수집하기로 했다. 따라서 ‘김재규 민주화 심의의 건’은 ‘신속한 심의 결정’은 일단 어려워진 가운데, 좀더 광범위한 사회적 논쟁의 광장으로 나오게 될 전망이다.

핵심 쟁점은 ‘민주화에 기여했는가’

관련자 분과 회의가 열린 날 위원회가 자리잡은 서울 종로구 수송동 연합뉴스 빌딩 앞에는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몰려들어 ‘김재규 민주화 열사 추대 반대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어찌 국가원수를 시해한 살인마가 민주열사가 된단 말이냐”라고 주장했다.

또 한편으로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의 박희영 사무처장은 의 물음에 “민주화심의위가 김재규 건을 8월16일에 (서둘러) 결정하는 데 반대한다”며 “지난 6월 이래 심의위쪽에 이런 의견을 몇 차례 전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박 사무처장은 김재규의 민주화 관련자 인정 여부에 대한 의견 제시는 유보하되, “사회적 공론화를 통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밝혔다.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는 민주화운동의 역사평가 사업 등을 주로 담당하기 위해 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 만든 연대기구이다.

박사모가 김재규의 민주화 관련 인정 가능성에 극력 반발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들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함께 지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그동안 노무현 대통령과 여권을 상대로 국가 정체성 논쟁을 제기해왔는데, 이 와중에 여러 차례 “김재규를 민주화 인사로 만들려 하다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사건이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파동,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 개정 움직임 따위보다는 김재규 문제가 박 대표의 최근 대여 강성 기조의 진짜 이유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청와대의 일부 관계자들도 민주화심의위의 움직임에 당혹감을 비쳐왔다. 이들은 사석에서 “의문사진상위원회 파동이 해프닝이었다면, 김재규가 민주화 관련자로 판정받는 것은 핵폭탄”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김재규 심의를 계기로 일대 과거사 논쟁이 촉발되어, 다른 미래지향적 어젠다가 흔들리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화심의위에 자신들의 입장을 무게를 실어 전달할 수도 없고 전달해봐야 “그쪽 사람들이 듣는 것도 아니다”라며 난감해하고 있다. 민주화심의위는 형식상 국무총리 소속의 위원회이지만, 정부는 그 독립성을 존중해 심의에 개입하지 않아왔다.

이런 흐름을 보면 ‘김재규 민주화 심의 문제’에 민주 대 반민주, 또는 유신 대 반유신 따위의 단순 도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코드가 담긴 것은 분명하다. 8월9일 열린 관련자 분과가 3시간여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보류 및 조사 계속’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도, 사안의 무게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총탄은 역사의 오발탄?

이런 가운데 기자는 △김재규 심의의 쟁점은 무엇인지 △현재의 자료 수집 단계에서 어떤 판정을 내리는 게 적절한지 △어떤 기구와 절차를 통해 이 문제를 재평가하는 게 바람직한지를 하나씩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우선 사건 심의의 핵심 쟁점은 김재규의 행동이 민주화에 기여했느냐 여부로 모아진 상태다.

이에 김재규 유족쪽은 “유신헌법으로 성립된 권위주의 정권인 박정희 정권에서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함으로써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고 유신독재에 의해 파괴된 민주헌정 질서의 회복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강신옥 변호사 등도 “10·26이 없었다면 유신독재를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겠느냐.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을 당시에 열심히 했지만 유신독재를 쓰러뜨릴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민주화 관련자로 판정하는 데 핵심 기준인 ‘민주화 기여도’에서 김재규의 공적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김재규는 1980년 1월28일 작성해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 “본인이 결행한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은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10·26 이후 유신 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었다”고 주장했는데, 그 주장을 이들이 대체로 지지하는 것이다.

반면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같은 현대사 연구자의 견해는 다르다. 한 교수는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김재규의 행동이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그 뒤 실제로 5·17 쿠데타를 통해 더욱 폭압적 군사정권인 전두환 체제가 들어선 점에서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재야 원로인 백기완씨도 평소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며 10·26의 민주화 기여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그룹은 대체로 유신 체제의 종언에 무게를 둔다. 또 이들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진영 가운데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계, 또는 장준하·윤보선씨를 비롯한 제도 정치권과 인맥이 닿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들 가운데는 종교인으로서의 양심에 기반해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반면에 후자쪽은 ‘유신 체제의 끝=민주화’라는 등식은 잘못이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국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1987년 6월항쟁은 한국 사회를 나름대로 발전시켰지만, 10·26은 ‘권력 내부의 암투’이며 결과도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주요 논거로 제시한다. 이들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진영에선 상대적으로 전투적이었던 민중운동과 학생운동의 전통을 대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들 사이에는 박정희 정권 말기에 ‘민중 또는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높아가던 터에, 김재규의 행동이 ‘역사의 오발탄’처럼 돌출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김재규의 의도를 둘러싸고도 양론이 맞선 상태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구 선생이 ‘살 때는 민족정기를 위해서, 죽을 때는 대의명분을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는데, 김재규만큼 대의명분을 찾아 죽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유신의 심장부를 쏜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분명히 영웅이다”라고 주장했다.

10 · 26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성격

강 변호사를 비롯한 변호인단은 1980년 1월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 △김재규는 3군단장으로 재직 중인 1972년 12월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되자 유신헌법은 박 대통령이 영구 집권하기 위한 헌법으로 민주헌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 뒤로 1978년에 긴급조치 해제 건의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등의 ‘민주화 행적’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적 사회평론가 진중권씨 등은 “유신 체제를 유지했던 가장 강력한 억압기구가 바로 중앙정보부였다. 민주화 인사를 탄압하고 고문했던 기관의 장이 바로 김재규였다. 그런 기관의 장이 단지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가 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반박했다. 진씨 등은 “김재규를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규정하는 것은 이미 다른 민주화 유공자로 되신 분들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8월9일의 민주화심의위 관련자 분과 회의에서도 이런 복잡한 상황이 두루 검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판정을 일단 보류한 가운데 ‘필요한 자료와 증인을 더 확보하자’, 그러면서도 ‘시한을 정하지는 않은’ 이날 논의 내용도 그런 고민의 산물로 해석된다. 이날 관련자 분과 회의에선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가 ‘8월16일의 (신속한) 결정 반대’ 입장을 밝혀온 점도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8월9일의 분과의 논의로 ‘김재규 심의’에 대한 공론화 길이 한결 넓어진 가운데, 공론화의 절차와 방법을 놓고도 이런저런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심의위의 일부 위원들은 이와 관련해 “김재규에 대한 심의 결과는 불가피하게 10·26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성격을 갖게 마련”이라며 “국무총리 소속의 행정위원회 성격인 민주화심의위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꾀하는 것, 그것도 민주화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학계 안에서조차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사안을 서둘러 결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밝혔다. 민주화심의위가 지금까지 대체로 이미 판가름난 역사적 인식을 토대로 해당자를 가려 보상책을 강구하는 행정 행위를 주로 해온 반면에, ‘김재규 심의’는 여러모로 성격이 다른 점에 이들이 주목하는 셈이다.

민주노동당의 천영세 의원은 국회 차원의 유신 문제 평가기구 가동 방식도 제안하고 있다. 천 의원은 “당면한 현안 처리를 위해 올가을 정기국회는 넘긴 뒤에 고려할 문제”라며 “그 뒤에 정치권이 나서 현대사 재평가를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나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재규 죽고 전두환 살판나다

대대적 반유신시위 직후 벌어진 10 · 26… 민주화운동 진영은 운동노선 바꿔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자리잡은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한다. 김재규는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20일 육군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어 항소·상고심에서도 형이 확정되어 1980년 5월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김재규는 1980년 1월28일 제출한 항소이유 보충서를 통해 “유신 체제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국시에 맞는 일이고 건국 이념을 되살리는 일로서 전국민은 물론 우방이 모두 열망하고 있었고 만일 이를 하지 않고는 북괴와 싸워 이길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적화될 수밖에 없었음이 명백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거사’로 혼란이 조성된 틈을 타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는 12·12 쿠데타를 감행한다. 이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처를 통해 정권을 굳히며, 이에 저항하고 나선 광주 시민들에 군병력을 투입해 일대 살육극을 저지른다.
10·26 사건의 역사적 배경으로는 같은 해 10월16일 발생한 부산·마산 민주항쟁이 꼽힌다. 유신 독재가 장기화한 가운데 물가고에 대한 반발과 조세저항 등이 겹치면서 부산·마산 일대에서 대대적인 반유신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민주화운동 진영에선 10·26과 5·17 이후 운동노선의 전환이 이뤄진다. 과거의 ‘반독재 민주화’ 기치에 일정 부분 ‘낭만성’이 깃들어 있다고 반성하면서 민족 자주와 민중 주체 노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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