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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무청을 국방부에서 분리하라

등록 2004-06-09 15:00 수정 2020-05-02 19:23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선구자’ 메노나이트 교회 목사가 말하는 서구 모델의 대안

지난 5월21일 법원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사법 사상 최초로 무죄를 선고해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편에서는 안보 위협을 근거로 병역거부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전시’ 상황에서도 대체복무제가 인정됐다.

서구에선 전시에도 대체복무제 인정

1, 2차 세계대전 중에 북미와 유럽의 많은 선진국가들은 적극적인 연구와 폭넓은 대화를 통해 대체복무제도를 마련하고 시행해왔다. 그 나라 국민의 ‘군기’가 빠져서가 아니다. 전쟁 중에도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의 자유가 인정돼야 한다는 기본원칙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옛 소련의 혁명가 레닌은 1919년 1월4일, 1차대전 상황에서도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병역 면제’를 선포하고 10년 가까이 이 제도를 시행했다. 2차대전을 치른 독일 역시 1949년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기본법을 제정했다. 평화운동가이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선구적 역사를 가진 메노나이트 교회 목사로서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병무청 또는 군인을 징집하는 부서를 국방부에서 분리하는 방법이다. 즉, 병무청을 국회의 산하기구로 예속하고 모든 예산과 주요 행정결정권도 국회가 갖게 하는 제도다. 1차대전 기간인 1917년 5월18일 미국 대통령은 첫 징집 법안에 서명했고, 4600개 도시의 2400만명의 징집 대상자 중 280만명을 군인으로 징집했다. 2차대전 시기인 1940년에는 6400여개 병무청 지부를 전국에 설치하고 5천만명을 군에 투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하자 트루먼은 법안을 부활해서 1951년 60만명의 군인을 징집했다. 미국 정부는 1960년대 초 베트남 전쟁을 기해 징집 법안을 계속 유지했다. 하지만 1967년 4월 대통령과 국방부로부터 독립된 징집특별부처(Task Force on the Structure of the Selective Service System)인 병무청이 탄생했다.

현재 미국 병무청은 국회의 통제를 받고 있다. 병무청은 민간인, 군인, 관료 등으로 구성된 150명 이상의 직원들이 연간 25억달러의 예산으로 직접 운영하고 있다. 병무청은 해마다 국회에 활동을 보고해야 한다. 이러한 분리의 장점을 통해 병무청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대학에 가서 병역 문제를 홍보하기도 하고, 자녀를 둔 부모와 여성단체에까지 상담의 폭을 넓혀 병역의 문턱을 낮추고 징집의 민주화를 일구었다.

둘째,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를 담당할 민간기구를 설치하는 방법이다. 우선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범종단적인 민간 대체복무기구를 설치해야 한다. 종교단체와 정부가 협력해 기금을 마련하고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심사는 징집부처 요원과 각 교단의 성직자들에게 맡기면 된다.

2차대전 중에 미국의 종교적 병역거부의 선구자인 역사적인 평화교회, 즉 메노나이트, 퀘이커, 형제회가 힘을 모아 대체복무를 위한 민간 공익 봉사기구(Civilian Public Society)를 제안해 국회와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1940년부터 시행됐다.

대체복무자들, 한국전쟁 때도 활동

가장 체계화된 대체복무의 모델은 세 가지가 있다. 역사적인 연대로 고찰하면 첫 기원은 1881년 러시아에서 탄생했다. 18세기 메노나이트 신도 중의 일부가 독일과 영국 등지의 종교 박해를 피해 러시아로 이민을 갔다. 이들은 러시아에서 병역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러시아 정부가 1870년대의 국가주의가 동유럽을 휩쓸자 군인 징집 법안을 발표한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메노나이트 신도들은 러시아 정부와 10년간의 협상 끝에 1881년 메노나이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로 산림을 정리하는 프로그램(Mennonite Forestry Service)을 허락받았다.

러시아 정부는 1881년 첫해에 123명의 병역거부자들에게 군인과 똑같은 복무기간에 신앙교육까지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다. 메노나이트 교단은 이들이 머무르는 막사와 음식, 의복을 지원해주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을 관리하는 특별위원회를 설립했다. 메노나이트 신도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는 대체복무자들을 위해 해마다 50만달러의 후원금을 조성했다. 1차대전 중에는 병역거부자들이 주로 병원 응급실 근무, 응급환자 운송 같은 의료보조 일을 했다.

두 번째 대체복무 모델은 1917년 가을 프랑스 형제회에서 탄생했다. 형제회 소속 수백명의 병역 거부자들이 영국 형제회 거부자들과 미국 적십자의 원조로 프랑스에서 대체복무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건물 보수, 농업 개발, 구호활동 등에 참여했다. 세 번째 모델은 퀘이커 교도이자 평화주의자인 피에르 세레솔(Pierre Ceresole)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스위스의 교도소에서 봉사하는 동안 형제회 소속 병역 거부자들의 대체복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국제화해교류(International Fellowship of Reconciliation)의 후원으로 국제시민봉사회(Service Civil International)를 만들었다. 이 단체의 활동은 유럽에 급속히 확대됐고 1920년대에는 30만명의 독일 젊은이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대체복무를 수행했다.

한국에서도 서구의 대체복무자들이 활동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부터 1971년까지 메노나이트 교단의 병역거부자 21명이 대구와 경산 등지에서 전쟁고아를 위한 직업교육, 농민개혁사업, 영어교육, 의료사업 등에 참여했다. 평화교회들이 세계 곳곳에서 비종교적인 병역거부자들과 함께 힘을 모아 비평화적인 정부의 징집 정책이나 사법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것처럼 한국 여호와의 증인들도 교리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른 사회운동과 함께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여호와의 증인도 함께 해결책 모색해야

셋째, 비종교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자비 부담 형식의 대체복무를 담당할 민간기구를 설치하는 방법이다. 재정은 개인, 정부, 사회단체가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와 민간 전문가가 확고한 양심을 가진 병역거부자를 선별하면 된다. 대체복무 기간 등은 국민적 의사 수렴을 거친다. 두 번째 대안에서 언급한 평화교회의 자비 부담에 기초한 국내 또는 해외 봉사활동도 좋은 예다.

넷째, 국민의식 전환이다. 북한을 지나치게 적으로 인식하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평화의 동반자로 보는 자세를 키워가야 한다. 아울러 병역거부자들을 평화봉사단으로 해외에 파견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한국의 평화적 이미지를 심는 것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 모두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 인정이 남북 통일의 밑거름이요, 전쟁이 없는 한반도 시대를 여는 주춧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병역제도와 사법제도의 민주화를 위해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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