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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 공무원 김혁규의 자수성가

등록 2004-05-19 15:00 수정 2020-05-02 19:23

[표지이야기 | 노무현 집권 2기]

무작정 미국 건너가 히트상품으로 무섭게 돈 벌어… YS와 인연 닿아 정치권 입문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김혁규 전 지사는 간혹 영문 이니셜을 따서 ‘HK’라고 불린다. 여기서도 일단 HK로 적어보자.

HK는 1939년(64살) 경남 합천군 초계면 아막리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5형제 중 맏이였는데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기에 고생스러운 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조금 형편이 나은 고모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동생들을 손수 거둬야 할 처지였던 탓이다.

김해시 진영에 있던 한얼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재단비리에 항거해 학생데모를 주동하다 퇴학당한 적도 있다. 고교는 부산 동성고등학교로 옮겨 졸업했으며 부산대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9급(요즘 기준으로) 공무원 시험을 치러 창녕군청 말단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경남도청을 거쳐 내무부 근무까지 6년간 공무원 생활을 통해 7급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가난한 조국의 현실에서 벗어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33살 때인 1972년 단돈 1천달러를 쥐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을 밟게 된다. HK 진영에서는 이를 “세계 일류가 되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일류는 저절로 되는 게 아니었다. 미국 생활은 켄터키프라이드 치킨 집에서의 접시닦이, 기념품을 떼어다가 좌판을 차려놓고 관광객들에게 파는 일 따위로 시작했다. 부인 이정숙씨는 간호사로 병원에 취업했는데 미국 병원의 간호사 일은 우리나라의 그것보다 훨씬 중노동이다.

그러던 HK가 사업가로 일어서게 된 것은 ‘벨트 파우치’라는 기발한 상품을 개발하면서부터였다. 옛날 보부상들이 허리춤에 차던 전대에서 힌트를 얻어 ‘허리용 쌕’을 고안해낸 것이다. 당시 미국 텔레비전은 “아주 이상한 상품이 올해의 히트상품이 됐다”고 소개했다. 이 아이디어 하나로 그는 ‘혁 트레이딩’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무서운 기세로 돈을 벌어나갔다.
사업 기반을 잡은 그는 정치적 활동에 눈을 돌리게 된다. 뉴욕 동포들을 모아 뉴욕한인경제인협회를 결성해 2대 회장에 취임(1978년)했으며, 나중에는 뉴욕한인회 이사장(1980년)도 지냈다.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씨도 그 무렵 뉴욕에서 가발 장사로 돈을 벌어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꽤 친분이 있다고 한다. 뉴욕한인회 이사장도 박씨가 먼저 지냈으며 HK가 다음 임기를 맡는 등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사이였다.
HK는 5공화국 시절 민주화추진협의회 뉴욕연구소를 설립해 YS의 상도동계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호남 출신인 박지원씨가 성공한 해외 기업인으로서 동교동계와 내왕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런 인연 끝에 HK는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귀국해 김영삼 후보의 사조직인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의 총괄기획실장을 맡게 된다. YS의 차남인 현철씨와도 이 무렵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대선 승리 뒤 그는 청와대 민정·사정비서관을 거쳐 1993년 경상남도 지사로 임명된다. 이어 1995년 지방선거 이래 한나라당 공천으로 내리 경남지사 3선을 기록한다. 그는 지방행정에 기업경영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나는 주식회사 경남의 세일즈맨”이라는 게 그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는 2002년에도 대선 도전을 심각하게 고려하면서 ‘간이 캠프’도 한때 가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도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굳이 대권의 꿈을 숨기지 않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HK가 진작부터 긴밀한 스킨십을 쌓아온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1999년 노 대통령이 국민회의 동남특위(부산·경남 지역 민원처리 전담조직) 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HK와 업무 협의차 만날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삼성자동차 살리기 문제를 놓고 HK와 격렬한 논쟁도 벌였는데, 노 대통령은 이런 과정을 겪으며 “김혁규 지사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됐다고 한다.
HK는 지난해 말 한나라당을 탈당하기 전에 노 대통령과 독대함으로써 국무총리직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약속받았다는 관측이 나돌았다. 본인은 각종 약속설을 부인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순위 4번 당선자인 그는 총선 때 103억6324만3천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국내 재산과 미국의 재산이 반반가량인데 미국에는 동생이 운영 중인 기업체에 투자 지분이 있다고 한다. 국내 재산은 아파트와 오피스텔 1채씩에, 나머지는 현금·주식 등 금융재산이라고 HK쪽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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