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벗겨지는 ‘제2의 밀라이’

제334호
2000.11.15
등록 : 2000-11-15 00:00

미군 보고서로 다시 입증된 <한겨레21>의 퐁니·퐁넛사건 보도… 남은 건 ‘누가 쏘았는가’

(사진/“당산나무는 보았다.”주민들에 따르면 1번국도에서 가장 가까운 이 당산나무 앞에서부터 학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중앙정보부와 미 국무부 사이에선 어떤 교감이 오갔을까.

<한겨레21>은 지난 306호 표지이야기를 통해 69년 11월 중앙정보부가, 68년 2월12일 퐁니·퐁넛촌에서 작전을 했던 해병 제1대대 1중대 장교와 사병들을 대통령 특명으로 수사한 적이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번에 공개된 미군쪽 보고서에 따르면,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는 그로부터 한달 뒤 주월미국대사관을 경유하여 미 국무부에 퐁니·퐁넛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보낸다. 물론 현재로서는 단정할 수 없지만, 중앙정보부의 수사와 미 국무부의 보고서 접수 사이엔 모종의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관련 소대장들도 인정하는 일


(사진/목격자와 생존차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응웬 수, 레티 탄(파란 옷), 응웬 티 퉁, 응웬싸. 응웬싸는 당시 1번국도 미군 혼합작전 소대 초소에서 학살현장을 지켜본 남베트남 정부군이었다)
사실 1968년 2월12일의 퐁니·퐁넛 사건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장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작전양상을 비교적 솔직히 전해주었던 해병 제2여단 2대대 7중대장 출신 김기태(65)씨는 “이 사건이 장교들 사이에 ‘제2의 밀라이’로 회자됐다”고 기억했다. 물론 시간순으로 따지면 미군의 밀라이학살보다는 앞선 것이었지만, 많은 베트남전 참전 장교들이 이 사건을 ‘한국판 밀라이’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적 통치지역이 아닌 남베트남 정부가 보호하는 전략촌 지역에서 대량 살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해당중대장 김석현씨가 조기귀국을 해야 했던 일은, 상당수의 베트남전 참전 장교들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씨는 웨스트몰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의 편지에 답하는 글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 의혹’을 전면부인하고 있다. 그는 “베트콩들이 한국 해병의 제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며 “(한국군의 양민학살 의혹은) 한국군과 남베트남군, 미군을 분열시키려는 베트콩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사건 직후 해병 제2여단장(당시 김연상)이 유감을 표명했으며 마을 사람들을 위해 30포대의 쌀을 주었다는 미군쪽 조사보고서에 대해서도 “학살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구조물자”라고 해명했다.

(사진/사건 1년뒤 피해자 가족들은 남베트남 의회 의장에게 손도장을 찍은 탄원서를 보내 배상을 촉구했다(맨위). 퐁니·퐁넛촌에서의 전쟁범죄 가능성을 묻는 웨스트몰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의 서한에 대해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은 “베트콩의 음모”라는 답신을 보냈다(아래).)

과 채명신 사령관의 답신 <한겨레21>은 채명신 사령관이 당시 이런 주장을 했으리라는 예상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해당 장교와 사병들을 조사했던 해병 헌병대 조사계장 성아무개(63·당시 중사·진해 거주)씨의 이야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의 증언을 다시 들어보자. “68년 4월 초 어느 날 당시 헌병대장 박영길 소령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양민학살사건이 있다고 진상을 조사하라고 하는데 지침에 따라 조사를 받아와라.’ 헌병대장이 내민 ‘지침’의 내용은 이랬다. ‘청룡부대처럼 위장복을 입었지만 청룡부대로 꾸민 베트콩들의 소행이다. 청룡부대는 절대 양민을 학살한 일이 없다’.”(<한겨레21> 310호 26쪽 ‘청룡여단서 양민학살 조작은폐’) 성씨가 박 소령에게 지침을 받은 시점은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이 채명신 사령관에게 ‘전쟁범죄의 가능성’을 묻는 서신을 보낸 때와 거의 비슷하다. 성 아무개씨는 지금도 이 일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한겨레21>이 305호에서 인터뷰한 해병 제1대대 1중대 1소대장 최영언(58)씨와 2소대장 이상우(57)씨의 증언도 채명신 사령관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당시 작전중 뒤로 후송시킨 민간인 70∼80여명이 모두 중대원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며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명백한 잘못”이라는 태도를 취했다.

중대장은 인터뷰 요청 거부

(사진/퐁니·퐁넛촌에서 ‘괴룡1호작전’을 수행했던 소대장들. 왼쪽부터 1소대장 최영언, 2소대장 이상우, 3소대장 김기동 중위.이들을 조사했던 당시 해병 헌병대 조사계장 성 아무개중사의 68년 모습(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겨레21>은 305호에서 중앙정보부가 당시 이들을 조사한 것은 이 사건으로 인한 한-베트남간의 관계악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전한 바 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이번 미군쪽 보고서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퐁니·퐁넛촌 사건 1년 뒤인 1969년 2월, 피해자 가족과 친척 35명이 남베트남공화국 의회의장에게 탄원서를 올려 배상을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 슬프도다. 시민의 권리를 갖고 있고 4천년의 문명을 지닌 67명(숫자는 주장하는 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필자 주)의 베트남 사람들이 일개 곤충 취급을 받았다. 이들 불행한 희생자들에 대해서 어떤 단체도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앞에서 이 사건이 ‘한국판 밀라이’라고 회자됐다고 언급했지만, 유일하게 사진기록이 남겨졌다는 점에서도 밀라이 학살사건과 닮았다(해병 제1대대 1중대 3소대장 김기동씨는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받을 당시 수사관이 미군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정황을 물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한겨레21> 306호).

68년 2월12일, 당시 미군 혼합작전소대 소속으로 1번국도상에 위치한 미군 초소에 있었던 본(J.Vaughn) 상병은 퐁니·퐁넛 마을이 불에 타는 광경을 지켜보다 오후 3시께 ‘마을로 들어가 부상자들을 도와주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미군동료 4명, 남베트남 민병대원 26명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사진기록을 남기기 위해 카메라를 챙긴다. 불타버린 마을풍경과 주검들을 앵글에 담은 그는 사진설명도 자세히 적었다. “마을을 돌며 사진을 찍을 때 발견한 이상한 점 중 하나는 시체더미 주위에서 총구멍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마을주민 모두가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았거나 총검으로 찔렸다는 것을 입증한다.”

(사진/볏짚으로 가려진채 도랑에서 발견된 아이들의 주검.미군과 남베트남 군인들이 다른 주검을 찾고 있다)
<한겨레21>은 여러 차례에 걸쳐 퐁니·퐁넛 사건의 진실을 한꺼풀씩 벗기고 있다. 이제 남은 미스터리는 1대대 1중대 중 어느 소대에 의해 학살이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일부 장교와 사병들은 3소대를 지목한다. 그러나 3소대장 김기동(59)씨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렇다면 중대장은 진실을 알고 있을까? 중대장 김석현씨는 76년부터 브라질 상파울루에 이민가 살고 있다. 그는 <한겨레21>의 현지 인터뷰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고경태 기자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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