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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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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거래 장단에 춤추는 법안

등록 2001-11-29 00:00 수정 2020-05-03 04:22

정치권 주무르는 이익집단의 무차별 로비… 사회적 합의 깨고 공정한 경쟁 방해

“우리끼리는 그 방을 ‘직장노조 분소’라고 부른다.”

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의 보좌관이 같은 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의 사무실을 가리켜 한 얘기다. 직장노조 사람들이 상주하다시피 하며 한식구처럼 지낸다는 얘기다. 직장노조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노조 가운데 하나로, 지역의료보험과 직장의료보험이 건강보험으로 통합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해왔던 전 직장의료보험조합 직원들의 조직이다. 또 지난 4월 심 의원은 2002년부터 통합되는 지역·직장 재정을 현행대로 분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법 개정법률안’을 제출하고, 6개월여 만인 지난 10월부터 다시 이 법안 통과에 앞장서고 있는 인물이다.

의원 사무실이 ‘직장노조 분소’ 노릇

비록 양쪽 입장이 일치한다지만, 아무려면 국회의원 방이 노동조합의 분소일까. 그러나 이 보좌관뿐 아니라, 드물게는 한나라당 다른 의원실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국감 때 대정부 질의서까지 만들어준다더라.” 심 의원실뿐만이 아니라고도 한다. “한나라당 다른 의원들 방에도 늘 와 있다. 어느날 직장노조에서 새로운 주장을 담은 문건을 돌리고나면 곧 한나라당 당론으로 발표된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직장노조가 얼마 전 “지역쪽 재정에만 50% 국고지원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자 최근 한나라당도 “국고지원금을 직장과 지역이 공동으로 노인의료비에 쓰게 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심 의원은 “그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기는 하지만 재정통합을 주장하는 쪽에서도 내 방을 찾아와 주장을 늘어놓고 가기는 마찬가지”라며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기는 해도 재정분리가 효율적이라는 주장은 내 오랜 소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직장노조 관계자도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것은 우리 뜻을 관철하기 위한 정상적인 활동일 뿐”이라며 “하지만 질의서를 대신 써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주장했다. 양쪽 모두 합법적인 의정 활동과 대정치권 활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익집단’과 ‘로비’. 미국처럼 의회정치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지극히 정상적인 정치과정의 하나를 나타내는 낱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올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시민단체와 정치인을 중심으로 “등록된 로비스트가 공식적인 로비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또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대한의사협회가 최근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치세력화를 선언하고 나서는 등, 이익집단의 ‘정치행위’도 더는 금기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권에 대한 로비는 오래 전부터 엄연한 현실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앞의 사례는 한국사회에서 ‘이익집단’과 ‘로비’라는 두 낱말이 어둡고 눅눅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까닭을 보여주고 있다. 합법의 울타리 안에서 이뤄진 로비인지는 모르겠으나, 정해진 룰없이 상식의 울타리를 넘나드는 건 분명하다. 더욱이 겉으로 드러나는 로비활동보다 음성적인 주고받기가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감안하면, 로비를 벌레보듯이 하는 감정적인 태도가 로비 합법화를 주장하는 이성적 태도보다 오히려 합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한겨레21>이 입수한 직장노조 인트라넷 내부자료를 보면, 노동자 집단이 정치권을 상대로 활동을 벌일 때 들어가는 비용은 어느 정도일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지난 5월9일 직장노조 총무국장이 작성한 중앙대의원대회 보고용 ‘성금 세부지출 계획’에는 ‘대외활동 비용’(조직·재정분리 입법활동 등)이라는 항목이 나온다. 그리고 세부내역에는 ‘국회의원 후원의 밤 행사’(보건복지, 환경노동 상임위원회)에 1인당 50만원씩 32명에게 연중 8600만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돼 있다.

노조원 특별성금이 ‘후원금’으로 쓰여

직장노조는 지난해 상반기 의료보험의 지역조합과 직장조합 조직통합을 앞두고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하면서부터 다달이 떼는 조합비 외에 세 차례 ‘특별성금’을 갹출했다. 특별성금 갹출 규모는 전체 3200여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한달 월급 전부, 정근수당 전부, 기본급의 10% 등 수십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7월31일 직장노조가 인트라넷에 ‘본조’라는 이름으로 조합원들에게 띄운 ‘특별성금에 대하여’라는 해명글을 보면 조합원들 사이에 특별성금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음을 알 수 있다.

“요즈음 특별성금 내역에 대하여 (의혹이) 분분한 바 중앙운영위원회 의결을 거쳐 서울·경기·인천본부장에게 낱낱이 공개했음을 알려드리며, 문제가 전혀 없다는 본부장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전 노조원 동지들께 공개적으로 알려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리며 빠른 시일 내 전국지부장회의를 통하여 노조원 동지들께서 궁금해하시는 내용을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조합원들에게 특별성금 내역을 즉각 공개하지 못하는 사정을 “지역노조쪽의 음해공작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국회의원 후원회 8600만원 지출계획에 대해 직장노조 관계자는 지난 26일 “노조가 국회의원에게 후원비를 제공한 사실은 물론 그런 문건을 만든 사실조차 없다”며 “출처가 불분명한 문건이 도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음해하기 위해 거짓 자료를 만들어 돌린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특별성금은 전액 법인카드로 결제한데다 신문광고 등 적합한 통합반대투쟁에 쓰였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날까지도 직장노조 인트라넷 자료실에는 이 문건이 떠 있는 것으로 확인됐으며, 심 의원도 “정확한 금액은 기억나지 않지만 직장노조에서도 위원장 이름으로 후원금이 들어왔다”고 밝혔다.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지난 11월21일 ‘거야’의 힘을 과시하며 교원정년 63살 연장안을 처리하는 데도 마찬가지로 이익집단의 로비 흔적이 포착됐다. 교육전문 인터넷 사이트 ‘즐거운 학교’(www.njoyschool.net)가 입수해 보도한 한국교총 명의의 회장단 연석회의 자료가 그것이다. ‘교원정년문제에 대한 동향분석 및 본회 활동계획’이라는 제목의 이 자료에는 이규택 국회 교육위 위원장(한나라당) 등 16명의 교육위 의원 개개인에 대한 담당직원을 별도로 두고 맨투맨식 활동을 벌일 계획을 세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는 “지역구의원은 담당직원이 시·군·구 회장님을 조장으로 하여 공청회, 표결처리시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하였고, 공청회 표결처리시 맨투맨식으로 활동하도록 하며 회장단, 시·도교련 회장님 중 지역구의원이 있는 경우는 해당의원을 대상으로 활동하고, 없는 경우는 전국구의원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등 구체적인 활동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사무국 전 직원은 부서별 1인을 제외하고는 전원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표결처리 때까지 화장단, 시·도교련 회장님들은 국회방문 활동을 전개해 주시기 요망”하는 등 조직의 총력을 동원해 전방위적 로비를 벌였음이 드러났다.

건강보험 재정분리와 교원정년 연장은 둘다 여야가 합의해 통과시킨 법안을 시행 직전 또는 시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전으로 되돌려놓으려 하는 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건강보험 재정통합은 오랜 의견수렴기간을 거쳐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해왔고, 지난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는 물론 이회창 후보도 공약으로 내세웠던 내용이다. 선거철을 앞두고 특정정당과 특정이익집단 등 조직화된 소수에 의해 비조직화된 다수가 소외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집단 이기주의에 게임의 룰 적용하라

같은 교원이면서도 정년 연장에 반대하며 한나라당사에서 농성까지 벌인 전교조의 입장은 집단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을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전교조 이경희 대변인은 “우리 조합원들 가운데도 정년 연장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고, 99년 정년을 단축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도 전교조는 분명히 반대를 표시했다”면서도 “정년 단축을 주장하는 학부모단체의 입장과 정년문제가 교육문제의 핵심이 아닌데도 이 문제로 핵심문제들이 물타기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정년 연장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로비 자체는 다원화된 집단적 이익이 존재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이익집단이나 정치권 모두 뒷거래라는 음성적인 방법으로 로비를 이용하거나 받아들이고 있는 게 문제”라며 “사회적 합의를 거쳐 로비의 룰을 정하고 투명한 감시를 통해 활성화해야만 교육계가 ‘돗자리 로비’를 벌이는 희대의 사건이 재연되지 않고 이익집단간에 공정한 경쟁도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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