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재위 1776~1800)의 18세기는 애틋한 그리움이다. 유럽에서 문화국가의 전범으로 르네상스기의 베네치아·피렌체를 그리워하듯, 21세기 한국인들은 ‘문화로 싱그러웠던’ 정조 시대를 못내 아쉬워한다. 군주·관료·지식인들이 당파를 넘어 예술과 사상을 논하고, 문예정신이 국정의 화두였던 시절. 정조의 문화정치를 우리는 지금도 재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지난 2월 정조가 신하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어찰)가 공개되었다. 지난 2~3년간 잇따른 텔레비전 극화로 개혁군주 정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비등하던 시점에서 어찰 299통의 내용들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독살설 논란이 다시 불거졌을 뿐 아니라, ‘성군’ ‘학자’로 추앙했던 정조의 본색에 특정 신하들과 정국을 사전 조율하는 막후 정치가, 공작도 마다하지 않는 마키아벨리스트의 모습이 뒤섞여 있음을 알게 됐다. ‘호래자식’ ‘젖비린내 나는 놈’ 등의 욕설과 속어를 신하와 유생들에게 내뱉고 ‘뒤쥭박쥭’ 등의 한글 단어를 섞어쓰는가 하면, ‘볼기 까고 주먹 맞기’ 등의 속어도 쏟아낸 입말 문장들은 그가 본디 성미 급한 다혈질이라는 사실도 드러냈다.
인간 정조의 생생한 욕망과 불만을 내보인 어찰을 취재하며 유난히 눈길이 갔던 건 바로 독특한 글씨체였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감으로 휘몰아치듯 흘려쓴 초서체 글씨들. 놀랍게도, 정조는 전혀 다른 서너 개 필체의 초서를 섞어 썼다. 맥락을 모르면 다른 이가 쓴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는, 정조 글씨에 대한 기존 전범과 전혀 다른 서간체가 등장한 것이다.
생전 4천 권 넘는 책과 개인 문집 100권을 펴낸 이 불세출의 학자 군주는 역대 조선 임금 중 가장 많은 글씨를 남겼다.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의 굳건하고 씩씩한 글씨체에 심취했던 그는 ‘마음이 곧 글씨’라는 ‘심획론’(心劃論)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가 글씨의 법도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1791년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선비의 답안지 글자체가 비뚤고 괴이하다 해서 낙방시켜버린 일화나, 옛 법식에 따른 바른 글씨 쓰기를 국가 정책(서체반정)으로 추진한 데서도 알 수 있다. 21세기에도 그의 글씨는 그늘을 드리웠으니, 2005년 문화재청이 광화문 새 현판에 정조 글씨를 집자해 쓰려다 논란을 일으켰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예계에서는 정조 글씨를 등의 문집이나 비문에 새긴 엄정한 해서류 정자체를 기준 삼아 연구해왔다. 그래서 기존에 없던 형식의 초서 글씨체가 이렇게 많이 발견된 것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실무적 용도라서 다급한 속필을 썼을 것이다. 기존 해서체 글씨의 남성적 힘과 칼처럼 죽죽 벋어내리는 기운 또한 편지 글씨체 곳곳에 배어 있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건 편지의 초서 글씨체가 묻혔던 정조 내면의 다중적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 글씨인 양 여러 초서체를 능란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고도의 의식적 훈련과 복잡한 인생 경험 없이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어찰 글씨체들은 어지러울 정도로 난무하며 뒤틀리는 느낌까지 준다. 처음 두세 줄 글자를 크게 썼다가 다음줄부터 작아지는 습관이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고서연구가 박철상씨는 “낭만적인 예술인의 감성과 사리를 따지는 학자의 이성, 냉혹한 무인의 협객적 기질을 함께 갖췄다는 분석이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로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정치적·학문적으로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았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탓에 정조는 숱한 정적들의 모략을 뚫고서 왕위에 올랐다. 강철 같은 권력 의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학문 역량은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난해한 초서 글씨체를 뒤섞어 구사한 것은 이런 절박한 정치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다면적 정체성을 다듬고 기질을 통제하려는 부단한 노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항상 시벽파의 정쟁을 정치력으로 풀어야 했던 그는 불끈거리는 다혈질 기질을 추스르느라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말이 통했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야 이리저리 꼬였다가 줄달음치는 필치의 초서체로 막말에 가까운 입말을 쏟아내며 스트레스를 풀어냈던 셈이다. 우리는 그의 글씨체를 통해 낭만적 기질을 옭아매야 했던 철인 군주의 고달픈 강박감을 읽게 된다.
정조의 편지는 내면만 말하고 있지 않다. 어찰은 현 소장자가 입수한 이래 40여 년간 여러 전문가와 고서상 등을 전전하며 내보였으나 지금껏 가치를 알아본 이가 없었다. 정조 편지류 등은 고서점계에서 시세가 형성돼 있지 않다. 복잡한 암시적 내용에 난해한 초서체여서 해석한 발문이 있으면 값이 오르고, 없으면 보통 고서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한 고서수집가는 “공개된 어찰의 가치가 수십억원대라는 소문이 돌지만, 얼마 전까지 단돈 5만원에 정조 어찰 한 통을 사들인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전문적인 초서 해독과 분석 능력을 지닌 연구자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인 전통 국학계의 현주소를 어찰의 연대기는 일러준다. 100권을 밤낮 점 찍으며 읽다가 결국 눈에 꽃이 피고 심혈이 메말랐다고 털어놓은 정조 편지의 독백이 기억난다.
노형석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노형석의 아트파일은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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