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수명 시인 특집.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이번 계절에 멋진 시를 발표했군요. 1994년에 등단했고 지금까지 네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아마 잘 모르시리라 짐작합니다. 비평가들이 자주 왈가왈부하는 시인도 아니고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편도 아니니까. 그러나 저는 이 시인이 없었더라면 한국 시단이 많이 따분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박한 구분법을 양해해주신다면, 감동에 취약한 다수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헤픈 시’가 있고 감동을 경계하는 소수 독자들에게 말을 거는 ‘도도한 시’가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후자에 해당하는 시를 쓰는 시인들이 최근 많아졌는데, 이수명 시인이야말로 그들의 ‘은밀한 선배’라는 생각. 우선 그녀의 시 중 비교적 다가서기 편한 시 몇 편.
“커다란 케익을 놓고/ 우리 모두 빙 둘러앉았다./ 누군가 폭탄으로 된 초를 꽂았다./ 케익이 폭발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뿌연 먼지 기둥으로 피어오르는 폭발물을/ 잘라서 먹었다.”(‘케익’ 전문) 세 번째 시집 <붉은 담장의 커브>(민음사·2001)에서 골랐습니다. 기발하기는 한데, 그냥 재미있기만 하다? 그럼 한 편 더. “자신을 찍으려는 도끼가 왔을 때/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도끼로부터 도망가다가 도끼를 삼켰다.// 폭풍우 몰아치던 밤/ 나무는 번개를 삼켰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더 깊이 찔리는 번개를 삼켰다.”(‘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전문) 슬픈 시. 상처받고 받다가 마침내 그 상처를 삼키기로 마음먹는 생도 있겠지 생각하면 쓸쓸해집니다.
네 번째 시집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문학과지성사·2004)에서 두 편. “집에 도착했습니다./ 계단을 오르지 못했습니다./ 계단 위에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얼음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습니다./ 톱질했습니다./ 부서진 얼음을 밟고 올라갔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갇혔습니다.”(‘어느 날의 귀가’ 부분) 내게도 때로 어떤 날의 귀가는 집에 갇히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했었지 하면서 끄덕끄덕. “비 오는 날,/ 나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우리는 낙하산을 편 채 걸어갔다.”(‘낙하산을 편 채’ 전문) 우산을 쓰고 걷다가 문득 해버린 생각.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쓸쓸히 불시착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이 아름다운 시.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육체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 돌아다니는 단추들/ 단추의 숱한 구멍들// 속으로//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전문, <세계의 문학> 2009년 가을호)
어쩌면, 비는 내리는데 우산은 하나? ‘나’는 ‘너’의 왼편에서 함께 우산을 들고 걷습니다. 그래서 왼쪽 어깨만 젖네요. 나쁘지 않습니다. 그 순간 내 몸을 스쳐가는 어색하고 애틋한 느낌들 때문.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노는 것만 같고, 어색해서 아래만 보고 걷자니 발자국조차 따라 어색해지고, 이런 식으로 어느덧 내 육체 전체가 한없이 낯설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로부터 떨어져나와서 나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시간이 흐르고, 단추가 떨어져나가듯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 뒹구는 느낌들, 느낌들. 그렇군요. 소년과 소녀가 손을 잡으면 세상에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벌어지는군요. 결론. 시인의 상상력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상을 바꿀 사람들을 아주 조금씩 바꾸기는 할 것입니다. 이상하고 아름답게, 이수명의 시처럼.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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