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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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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흘려도 죽였다

등록 2002-03-07 00:00 수정 2020-05-03 04:22

일제 토벌보다도 희생규모가 컸던 ‘중국공산당의 조선인 마녀사냥’ 민생단 사건-1

일제가 만주를 강점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32년 2월 간도에서 일군의 친일조선인들은 한때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했던 일부 민족주의자들까지 포함하여 하나의 정치조직을 결성했다. 민생단이라는 이름의 이 친일조직은 불과 5개월 만에 활동이 중단되었고, 다시 3개월 후에는 완전히 해산되었다. 민생단이라는 이름은 만일 중국공산당이 조선인 당원들이 이 조직과 비밀리에 연결되어 있다는 잘못된 의심을 품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당시 명멸했던 수많은 단체들처럼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잘못된 의심은 당 내의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을 중국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당에 침투한 민생단원으로 보는 오류로 이어져 대대적인 숙청을 낳았다. 1932년 말에 시작된 민생단 숙청은 1935년 초까지 약 2년반에 걸쳐 집중적으로 진행되다가 1936년 초에 가서야 중단되었다. 현재 중국공산당이 인정하는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만도 근 500여명이고, 어쩌면 2천명에 달하는 우리 독립운동의 정화가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죄명, 죄명들

중국공산당 문서나 일제의 자료는 민생단 숙청으로 인해 희생된 조선인 혁명가들의 숫자가 일제의 잔혹한 토벌에 희생된 조선인 혁명가들의 수를 능가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간도의 혁명근거지에서 말깨나 하고 글깨나 읽던 조선사람은 다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이 돌 정도로 숙청은 광범위했다. 대부분의 경우 간첩행위라는 엄청난 죄명을 뒤집어 쓰게 된 행동이란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사소하며 터무니없지만 끝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럴듯한 정치적 이유로 숙청이 시작되었지만, 일단 숙청이 가속화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밥을 흘려도 민생단(어렵게 구한 식량을 허비하니까), 밥을 설구거나 태워도 민생단, 밥을 물에 말아 먹어도 민생단(화장실에 자주 가는 것은 전투력을 약화시키니까), 배탈이 나거나 두통을 호소해도 민생단, 사람들 앞에서 한숨을 쉬어도 민생단(혁명의 장래에 불안감을 조장하니까), 설사를 해도 민생단, 고향이 그립다고 말해도 민생단(민족주의와 향수를 조장하니까), 일이 어렵다고 불평해도 민생단, 일을 너무 열심히 해도 민생단(정체를 감추려고 일을 열심히 한 것이니까), 일제의 감옥에서 처형되지 않고 살아돌아와도 민생단, 오발을 해도 민생단, 가족 중에 민생단 혐의자가 나와도 민생단, 민생단 혐의자와 사랑에 빠져도 민생단,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민생단으로 몰리는 등 무고한 사람들을 일제의 간첩으로 모는 꼬투리는 끝이 없었다.

더구나 민생단이란 누명을 쓰고 살해당하거나 투옥된 사람들을 보면 대개 항일혁명의 일선에서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운 사람들이었다. 한 예로 훈춘현 공청단 서기로 사업하다가 민생단으로 처형된 정필국(鄭弼局)은 의병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반일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는 간도를 피바다에 잠기게 한 일제의 대토벌로 어머니와 다섯 형제를 잃었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가족을 잃은 사무친 원한이 더하여 정필국은 혁명대오 내에 잠입한 민생단원을 적발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그러나 정필국은 반민생단투쟁이 진행될수록 의문을 품고 점차 투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1935년 초 민생단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정필국은 사형에 처해졌으나, 중상을 당하였을 뿐 죽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채 시체더미를 헤치고 나온 정필국은 보초들에게 기어가 “나는 공산당원이요. 이렇게 값없는 죽음을 당하지 않고 혁명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목숨을 살려 주구려”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보초들은 시끄러운 일이 생길까 두려워 하여 그 자리에서 정필국을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말았다.

왕청유격대 창시자의 한 사람이었던 양성룡(梁成龍)은 1920년 간도참변 당시 독립군이었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일제에 잃었고, 1933년의 혁명근거지에 대한 ‘토벌’에서 어머니와 애인 등 여덟 식구를 잃는 등 도합 열 식구가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었지만 민생단 간첩이라는 터무니없는 감투는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양성룡은 사형장에서 모여든 군중들의 항의로 목숨을 건졌지만, 1935년 초 전사할 때까지 1년 반 동안 그에 대한 민생단 혐의는 취소되지 않았다.

왜 그토록 조선인들을 죽였는가

사진/ 민생단 사건의 희생자들. 사형에 처해졌다가 살아남았지만 다시 보초들에게 맞아 죽은 정필국과 사형장에 모여든 군중들의 항의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양성룡, 투항변절하면 혁명에 더 큰 손실을 줄 수 있다면서 죽음을 맞이했던 김일환. 만주성위원회 순시원으로 간도에 왔다 변절자 박두남에게 살해당한 반경유(왼쪽부터). 반경유의 죽음은 민생단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과연 무엇이 민족의 해방과 사회적 평등의 실현이라는 고상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신의 안일을 버리고 혁명에 투신한 사람들을 이런 터무니없는 이유로 자신의 동료들, 그것도 온 가족을 일제에 잃어 일본이란 말만 들어도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까지 일제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해버리는 편집광적 마녀사냥꾼으로 만들었을까? 1932년 말 민생단 간첩에 대한 숙청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당은 아직 이성을 잃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33년 5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순시원으로 간도에 온 반경유(潘慶由: 조선인으로 본명은 李起東)가 훈춘유격대 정치위원 박두남(朴斗南)에게 살해당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반경유를 살해한 박두남은 혁명근거지를 탈출하여 일제에 투항하고는 일본군의 길잡이가 되어 혁명근거지의 파괴에 앞장섰다.

그러나 민생단으로 몰린 사람들 중에는 박두남 처럼 진짜 일제의 특무로 전락한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의 혁명적 지조를 죽음으로 지킨 사람들도 많았다. 독립군 출신의 유격대 지휘관 윤창범은 민생단원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힘이 장사인 그는 자신을 호송 중이던 두 대원의 총을 한 손에 하나 씩 낚아 챈 다음 이 총을 돌려 주면 자신을 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갖고 가다가 두 대원이 잘 아는 장소에 놓아 두겠다고 말한 뒤 사라져 버렸다. 윤창범은 자신이 과거에 사업한 적이 있는 왕청현의 한 산림대(흔히 마적이라 부른다)로 피신해 있다가 “내 아무 죄도 없이 왜 도망와 있겠는가? 죽더라도 대오에 돌아 가서 동무들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죽자”라고 스스로 대오를 찾아 왔다. 그를 민생단으로 몬 사람들은 윤창범이 제발로 돌아오자 즉각 체포하여 학살하였다. 화룡현위 서기였던 김일환 역시 민생단원으로 몰리자 자신이 투항변절하면 혁명에 더 큰 손실을 줄 수 있다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민생단 숙청은 그 희생자 전부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내에서 중국민족주의와 한국민족주의의 충돌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민생단 숙청의 무대인 간도는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였지만, 조선인이 전체 인구에서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간도지역을 관할하는 동만특위(東滿特委)는 중국공산당의 지부라는 지위에도 조선인 당원이 90% 이상을 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반 중국인들은 이를 ‘라오꼬리(老高麗)’공산당이라 부르고 있었으며, 당내에서는 당의 ‘중국당화(中國黨化)’가 시급한 과제로 제기될 정도였다. 간도는 인구도 조선인이 많을 뿐 아니라 지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중국보다는 조선과 가까웠으며, 역사적으로 중국과 조선 간에 영토분쟁의 대상이 되어온 지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생단이 조선인에 의한 간도의 자치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을 때 중국공산주의자들은 이를 간도를 중국에서 떼어 내어 조선에 합병시키려는 과분(瓜分), 즉 제국주의에 의한 중국분할의 위기로 받아들였다. 특히 일제의 잔인한 ‘토벌’을 피해 산간오지로 몰려 온 피난민을 토대로 건설된 혁명근거지의 인구 절대다수가 조선인인 까닭에 이들 근거지는 종종 한인(韓人)소비에트로 불렸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이런 현상을 민생단의 간도자치 구호에 호응한 증거라고 보았다.

‘당의 무오류성’이라는 신화와 신념

민생단 사건의 원인으로는 종래 중국인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 1930년대 전반 중국공산당의 좌경노선, 그리고 일제의 모략책동 등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중국인공산주의자들의 대한족주의나 조선인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차별은 민생단 사건이 벌어진 간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만주에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이런 요인만으로는 민생단의 적발과 숙청에 수많은 조선인공산주의자들과 대중들이 참여한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또 좌경노선의 경우도 민생단 사건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북만이나 남만지방 역시 좌경노선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고 있었음에도 민생단 사건과 같은 한인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은 벌어지지 않았다. 혁명세력에 간첩을 침투시키고 내분을 일으키기 위한 공작을 하는 모략책동은 비단 1930년대 초반의 간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각국의 혁명운동사에서 공통적인 일이다.

민생단 사건의 원인으로 기존의 연구에서 간과한 것은 간도의 조중공산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었으며 당의 무오류성을 깊이 신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데올로기를 중시하고 당의 무오류성을 믿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공산주의운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일제의 잔인한 ‘토벌’ 속에서 유격대를 조직한 간도의 경우는 좀 더 각별하게 작용했다. 간도의 한인공산주의자들과 농민들에게 당의 무오류성에 대한 신념이란 혁명의 승리를 얻기 위해 자기자신에게 던지는 다짐과도 같은 것이었다. 총도 제대로 없이 불과 수십명의 청년들로 시작한 유격대가 어떻게 강대한 일본제국주의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것인가? 간도의 한인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영향 하의 농민들은 그 해답을, 아니 위안을 당의 영도에서 찾았다. 그들은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 당”과 당의 영도를 받는 유격대가 그들을 승리와 해방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을 바랐고, 이런 바람은 다시 당의 무오류성이라는 신화를 하나의 내면화된 신념으로 그들의 가슴 속에 자리잡게 했다. 그러나 당의 노선에 따라 건설한 소비에트가 현실에 맞지 않아 너무나 많은 문제를 낳고 있으며, 변변한 무장을 갖추지 못한 유격근거지의 주민들은 일제 ‘토벌대’가 쳐들어 오면 산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 사실은 당과 당원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만주성위 순시원 자격으로 동만특위에 내려 온 반경유는 여기서 손쉬운 해답을 제시했다. 소비에트 좌경노선을 채택하고 집행한 것은 바로 정체를 숨긴 채 당에 잠입한 민생단원들의 작간이었다는 것이다. 반경유의 진단과 처방은 몇몇 불행한 희생양을 민생단으로 만들어 당의 무오류성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생단으로 지목된 박두남이 반경유를 살해하고 도주하여 일제에 투항한 사건은 민생단이 당과 유격대에 다수 잠입하여 있으며, 이들 때문에 당의 올바른 노선이 혼란에 빠져 있다는 반경유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한 격이 되었다. 이로써 동만특위와 유격근거지의 대중들은 당의 무오류성의 신화와 당이 끊임없이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 사이에서 느끼던 갈등에 대해 잘못된 해답을 갖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가 쇠붙이 이름?

반경유의 죽음과 박두남의 도주가 준 충격은 조선인과 중국인을 가릴 것 없이 간도 유격근거지의 당과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당의 무오류성에 대한 믿음, 당의 권위에 대한 맹신, 당과 혁명정권과 유격대를 갖게 되었으니 당연히 혁명에 승리해야 할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데 대한 의구심, 이 모든 것은 “일제가 한국민족주의자, 종파분자들로 구성된 민생단을 혁명대오에 잠입시키고 있다”는 당의 주장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당은 과거의 정책을 재검토하고 그 문제점에 대한 반성을 통해 당이 범한 잘못을 시정하는 대신, 모든 과오의 책임을 당내에 잠입한 민생단에 돌리며 민생단 마녀사냥을 대대적으로 벌려 나갔다. 이는 당이 자기반성의 기회를 빼앗긴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간도의 당조직이 극도의 정신적 공황에 빠진 원인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간도 유격근거지의 조선인 대중들이 지난 몇 년간 실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는 점이다. 지난 수백년 간 촌락이라는 좁은 세계 밖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던 농민들이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다는 것은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간도란 씨앗만 뿌리면 곡식이 절로 되는 땅이 널려 있고, 바가지만 있으면 굶지 않고 얻어 먹을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의 땅이었다. 이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식민지 조선의 인구 압박을 완화해 보려는 일제가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더구나 조선인 이민을 받아들이던 중국당국이 1920년대 중반 이후 태도를 바꿔 조선인에 대한 압박과 탄압을 실시한데다가 1929년의 대공황이 닥침에 따라 간도의 조선인들의 생활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또 간도에서 조선인 이민들은 급속히 폭력과 정치적 격랑 속에 빨려 들어갔다. 5.30 폭동과 그에 뒤따른 일제와 중국당국의 탄압 및 중국당국과 결탁한 일부 조선인민족주의자들의 공산주의자 색출 및 학살 등 백색테러로 간도의 조선농민들은 거센 정치적 폭력의 세례를 받았다.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이에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주구청산투쟁으로 응답했다.

‘만주사변’ 직후 일제는 1932년 4월 간도에 조선주둔군을 출병시켜 공산당의 활동이 활발한 조선인 마을을 중심으로 토벌을 전개했다. “조선 사람 100명을 죽이면 그 속에 공산당이 1명은 있을 것이다”라는 잔인한 토벌로 간도의 조선인 마을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은 일제의 토벌이 미치지 않는 산간오지로 몰려 들었다. 이렇게 간도의 깊은 산골로 모여든 조선농민들은 중국공산당의 영도에 따라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농민들의 대다수는 반일의식은 투철하였지만, 대부분 문맹이었고, 별다른 정치적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했다. 대다수의 농민들은 소비에트를 일제를 잡는 새로운 무기 속사포와 혼동하거나 어떤 신비한 쇠붙이, 또는 어떤 유명한 혁명가의 이름으로 잘못알고 있을 정도로 자신들이 만든 소비에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농민들은 촌 단위까지 구성된 각급 소비에트의 주석이며 위원이며 그 밖에 수많은 대중단체와 준군사조직의 감투를 쓰게 되었고, 소비에트가 인민혁명정부로 개편된 뒤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토지까지 분배받았다. 아마도 근거지 주민들 중 상당수가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때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갖고, 관직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근거지에서는 자주 군중대회를 열어 민생단에 대한 재판 등 중요사항을 결정했다. 간도의 한인농민들은 일제에 떠밀려 산간오지에 모여 들었고, 이 곳에서 폭발적인 정치참여를 강제당한 것이었다. 근거지에서 농민들이 정치에 휩싸이게 된 것을 강제적 동원이냐 주체적 참여냐, 또는 진보냐 혼돈이냐의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동원인 동시에 참여였으며, 진보인 동시에 혼돈이었다.

3년에 겪은 300년의 변화

소련에서 대숙청이 있기 얼마 전, 스탈린은 농업집단화의 성과를 놓고 너무 빠른 “성공에 현기증이 난다”(Dizzy with Success)라는 연설을 하였다. 소련의 당과 대중들은 전쟁과 혁명, 그리고 농업집단화를 약 20년의 세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겪었지만, 간도의 당간부들과 대중들은 혁명과 전쟁, 그리고 소비에트의 건설을 단기간에 동시집약적으로 겪었다. 중세 말에서 근대 초기 유럽을 휩쓴 마녀사냥의 원인에 대한 유력한 설명의 하나는 14세기 이후 유럽이 겪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적 변화와 혼란이 중첩된 총체적 위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세 유럽의 총체적 위기와 그 산물로서의 마녀사냥은 약 300여년에 걸친 변화의 결과였다. 간도의 대중들은 소련의 대숙청에 선행한 20여년의 변화나 유럽의 마녀사냥을 낳은 300여년에 걸친 변화에 버금가는 급속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와 가치관의 변화를 불과 3,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간도라는 지극히 좁은 공간 속에서 대단히 집약적으로 겪어야 했다. 이런 엄청난 변화가 준 속도감과 충격과 혼란은 이 모든 것을 짧은 시간에 직접 경험한 간도 유격근거지의 조선인 주민들이 정신적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그 충격과 혼란은 단순한 현기증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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