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찬란한 ‘병영국가’의 탄생

등록 2002-02-20 15:00 수정 2020-05-02 19:22

국민들의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하는 ‘신성한 국방의무’는 어떻게 시작되고 유지되었나

우리 사회는 60만명이 넘는 방대한 규모의 군대를 지난 50년간 유지해왔으며, 이를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쓰고 있다. 이와 같은 과중한 군사비 부담은 당연히 사회복지와 교육분야의 희생을 강요했다. 한국에서는 1961년 박정희의 군사반란 이래 30여년간 군사독재정권이 유지돼왔다. 1990년대 들어와 민간정치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 군사독재는 종식되었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군사독재의 여독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군사독재의 여독을 제거하고,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를 청산하는 작업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개항 이후 징병제 처음 소개

세계사에서 징병제가 수립되는 과정은 곧 근대국가의 발전과정이기도 했다. 중세의 군주는 봉건계급의 군사적 독점을 파괴하고자 독자적인 재원을 마련하여 자신의 군대를 사게 되었다. 군주가 봉건적 기사들이 이끄는 군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마련한 재원으로 용병을 사게 되는 과정은 사실상 중세를 유지해온 정치질서를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병행하여 국가재원이 확대되고, 군주권이 강화되면서 군주는 상비용병군을 거쳐서 상비왕군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사회적 변화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국민군대가 등장하게 된다. 프랑스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국민군대를 형성한 성과는 나폴레옹의 유럽 석권으로 나타났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시민계급과 농민계급에 많은 정치적 양보를 하면서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징병제도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에서 징병제도 발전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참정권 등 시민적 권리의 확대과정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징병제도가 처음 소개된 것은 개항 이후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에 의해서였다. 홍영식, 박정양, 어윤중 등 뒷날 개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사들은 국민개병제에 기반한 일본의 징병제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를 고종에게 보고했다. 특히 어윤중은 양반을 포함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개병제를 시행하여 상비군을 확보함으로써 강병을 도모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1894년 12월에 반포된 ‘홍범14조’ 중 제12조에서는 “징병법을 적용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정한다”라고 징병제의 시행을 예고하였다. 이렇게 징병제의 실시가 예고된 것은 당시 갑오경장을 주도한 유길준 등 개화파 관료들이 군제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개화파 관료들과는 달리 고종은 징병제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군사력의 존재이유를 국토방위보다는 왕권유지를 위한 것으로 보았던 고종은 용병제로 모병한 병사들이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더 강하다고 보았다. 더구나 동학농민전쟁 등을 거치면서 민(民)을 극도로 불신하게 된 고종으로서는 농민층이 주요 구성원이 되는 징병제를 검토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과 함께 도입

고종은 민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 수립시 청나라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으로 정세가 복잡해진 상황에서 한때 징병제를 검토하게 된다. 고종은 1903년 3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조칙을 반포하였다. 고종이 추진하려 한 징병제는 국민개병적 성격을 지닌 징병제가 아니라 전통적인 병농일치제의 부활이었다. 군주나 국가에 의한 막대한 인적·물적인 자원 동원을 요하는 징병제도의 경우 최소한 묵시적으로라도 자원제공자들의 동의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생각한 병농일치의 징병제는 근대민족국가의 수립을 위한 정치체제의 개혁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았다. 대한제국 시기에 징병제는 끝내 실시되지 못하였다. 징병제가 실시되었다고 해서 국권을 수호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당시에는 군주와 지배층의 민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이외에도 열악한 국가재정, 호적제도의 미비,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의 한계, 국민교육의 부재 등 징병제의 실시를 가로막는 제약요인들이 많이 있었다.

국권을 상실한 일제강점기의 대부분의 민족해방운동 세력들은 그 강령과 정책을 통해 징병제의 실시를 예고했다.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막론하고 국권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던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대부분은 당연히 전 민족적 총동원에 기초한 독립전쟁을 추구했다. 또 이들은 독립을 쟁취한 뒤에 세울 국가가 부국강병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9월19일자로 채택한 ‘대한민국임시헌법’에서 대한민국 인민은 “병역에 복하는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였다. 임시정부는 같은 해 12월18일 제정한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통해 “만 20살 이상 만 40살 이하의 장건한 남자로 징병령에 의하야 징모된 자”를 중심으로 상비병을 편성한다고 규정하여 징병제도의 실시를 분명히 했다. 임시정부가 추진한 징병제는 중국과 러시아 동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그나마 제대로 시행될 수는 없었다.

이 땅에서 징병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민족 지배하였던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시기였다. 일제는 1938년 2월22일 ‘육군특별지원병령’을 발표하여 조선인이 일본군에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전반적인 징병제가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가 지원병제도를 도입한 것은 병력자원의 부족을 메우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조선청년들을 ‘황군’에 복무케 함으로써 황국의식을 주입하려는 것이 주된 의도였다. 일제는 당시 지원병제를 실시하면서 징병제의 실시는 의무교육, 즉 ‘황민화교육’이 전반적으로 실시되고 나서 한 세대 이상이 지나야 가능한 먼 장래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의도와 달리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병력자원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자 일제는 1942년 5월8일 각의의 결정을 통해 1944년부터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된다고 발표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에 대한 징병제의 실시가 내선일체의 궁극적인 도달점이자 상징적 표현이라고 주장했지만, 징병제가 예상보다 빨리 돌연히 실시된 것은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한국전쟁, 무자비한 병력 동원

일제는 조선인을 징집하면서 조선인들이 ‘천황폐하’의 ‘황군’에 복무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무한한 영광이자 특권이며, 대동아공영권 내에서 ‘반도 동포’들이 ‘내지(內地=일본) 동포’들과 나란히 지도자적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런 허황된 논리 이외에 실질적인 징병 실시의 대가는 주어지지 않았다. 일부 친일적인 조선인들은 이 제도를 징병제의 실시를 통해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완성된다면서 조선인들의 참정권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그런 기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컨대 일제가 강제한 징병제에는 조선인들에 대한 아무런 반대급부가 없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시기에 잠시 실시되었던 징병제는 이남 단독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8월6일, 전문 8장81조 부칙으로 구성된 병역법(법률 제41호)의 공포를 통해 부활했다. 이 법에 따른 첫 징병검사는 1950년 1월6일에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징병검사를 마지막으로 징병제는 폐지되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군의 정원을 10만명으로 동결해두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만일 이승만에게 국경경비와 국내 치안유지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병력 이외에 더 많은 병력을 쥐어줄 경우 이북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원조가 없이는 군대를 유지할 길이 없었던 이승만은 미국의 군 정원동결정책 때문에 1950년 3월 징병제를 폐지하고 지원병제를 채택했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국군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다.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하여 부대를 수습했을 때 병력손실은 무려 45%에 달했기 때문에 막대한 병력 소요가 발생했다. 군이 본격적인 전시동원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였다. 당시 정부는 병역법과 임시 법령조치에 따라 제2국민병을 소집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소집이 이루어지지 않자 가두모집, 가택수색 등 강제징집과 소집을 통해 병력을 보충했다. 가두모집이란 실제로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의 입대지원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길 가는 젊은이들을 군대로 잡아가는 것이고, 가택수색이란 말 그대로 집에 있는 사람들을 수색하여 잡아가는 것이다.

한편 정부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21일 법률 제172호로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여 청년층을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국민방위군의 동원은 본격적인 징병제가 부활하기 이전의 일이었지만, 50만∼60만여명의 장정이 동원되어 불과 100여일 만에 5만명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는, 있을 수 없는 참사를 낳았다.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서는 본 난(362호)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기 때문에 다시 서술하지는 않겠지만, 이 사건은 아무리 전시라지만 국가가 시민들을 함부로 동원하고 또 그런 국가에 대해 시민들의 견제가 시행되지 않을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참담하게 보여준다.

베트남 파병으로 징병제 지키다

징병제는 1951년 5월25일 병역법 개정을 통해 다시 부활했다. 한편 전쟁으로 인해 국군의 정원을 10만명으로 동원하는 미국의 정책도 폐지되어 국군의 수는 1952년 10월 말 현재 25만명으로 늘어났고, 이때 한국과 미국은 국군의 정원을 46만3천명으로 증가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한번 가속도가 붙은 국군의 팽창은 급격히 이루어져 휴전 당시에는 55만명으로, 1954년에는 65만명으로 늘어났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정부는 경제적으로 65만명의 대군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고, 군의 유지를 위한 물적 자원은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미국은 과연 한국에 저렇게 방대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가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재정균형을 이루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한국군의 감군을 원했다. 미국이 한국군의 감축을 시도한다는 사실 자체는 이승만 정권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베트남, 라오스 등에 한국군을 ‘반공십자군’으로 파병하겠다고 제의하며 한국군의 감군을 모면하려 했다.

1960년대 들어와 미국의 케네디 정권은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 부담을 줄이고 재정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국군의 감군을 추진한 아이젠하워 정권과는 달리 제3세계 국가의 개발을 위해 자원이 군사부문보다는 경제부흥에 투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한국군의 감군계획을 구체화했다. 한국군의 감군은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의 기반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박정희가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미국이 계획하는 한국군 감축을 피해보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박정희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베트남 파병을 통해 많은 것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 분야에 관한 한 그의 목적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이후 한국군 자체의 감군이 심각하게 논의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1968년 1월21일 이북 특수부대의 청와대기습사건과 1월23일의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자 한국군의 감군은 완전히 물건너간 일이 되었고, 박정희는 오히려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여 비대해진 군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땅에 병영국가를 건설했다.

한국에서 징병제가 실시되는 과정에서 특기해야 할 일은 국가와 시민간의 계약에 기초하여 수립되어야 할 징병제도가 시민의 권리에 대한 별다른 고민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국가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서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민족 지배하의 일제강점기에도 시행되었던 징병제이기 때문에 국가나 시민들이나 징병제가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실시되는 데 아무도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또 징병제는 대부분의 민족해방운동세력이 꿈꾸었던 제도이기도 했다. 더구나 시민들은 일제가 퍼뜨린 국가주의의 세뇌에서, 그리고 이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해온 독재국가의 ‘국민교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국민개병제는 빈민개병제?

현행 징병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부가 무제한으로 군대에 사람을 공급할 수 있는 체제하에서 사람의 가치를 찾을 길이 없다는 점이다. 불과 100여일 만에 5만명을 굶겨 죽인 국민방위군 사건은 과거의 일이라 하더라도, 1980년부터 1995년 5월까지 15년5개월간 군복무중 사망한 사람은 자살 3263명, 폭행치사 387명 등 모두 8951명에 달한다. 이는 연평균 577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우리 군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3년마다 1개 연대 병력을 잃고 있는 셈이다. 걸프전 당시 미군쪽 사망자가 269명에 불과한 것에 비한다면 이같은 손실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수 있다.

현역으로 근무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꼬박 2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제복을 입고 보내야 한다. ‘신성한 병역의무’라는 말과 달리 우리 사병들의 복무여건은 참담하다. 아무리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하지만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에 26개월이라는 긴 기간을 아무런 보상없이 보내야 하는 현역복무자들은 엄청난 박탈감을 안고 있다. 현역병에 지급되는 급여가 월 1만원선인데, 우리와 안보환경과 경제규모에서 유사한 대만의 사병들이 1개월간 받는 급여가 우리나라 사병들이 26개월 근무하고 받는 급여와 거의 비슷하다. 국가는 징집된 병사들에 대해 경제적으로 보상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한국은 거의 완벽하게 이 의무를 방기해온 것이다. 병역의 의무가 신성한 것이라면 그들을 일당 400원, 시간당 17원짜리로 둘 것이 아니라 신성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악의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을 정도로 대우해줘야 한다.

징병제도는 국가와 시민간의 계약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면 국민병제도의 장점을 살릴 길이 없다. 더구나 바람의 아들,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등 특권층을 중심으로 병역비리와 기피가 판을 치고, 사람의 아들들과 어둠의 자식들은 현행 징병제가 국민개병제가 아니라 ‘빈민개병제’라고 비아냥거리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 시민사회의 성숙, 경제발전, 남북관계의 개선에 걸맞은 병역의무를 시행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현행 징병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