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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등록 2001-10-24 15:00 수정 2020-05-02 19:22

학문적으로 황당한 그 논리가 어떻게 그토록 오랜 기간 이남사회를 지배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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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박정희만 하더라도 한쪽에서는 기념관을 짓겠다고 법석을 떠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독재자에게 무슨 기념관이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극악무도한 테러범이지만, 미국의 이슬람 압박에 치를 떠는 무슬림 청년들에게는 영웅이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김일성의 경우는 그의 삶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정도가 아니다. 마치 프랑스영화 <마르땡 기어의 귀환>에서와 같이 젊은 날의 김일성이 진짜냐 가짜냐라는 역사적으로 보면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가짜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이다. ‘가짜 김일성 설’, 학설이라 부르기도 창피한 이 주장은 이미 학문적으로는 파탄이 난 지 오래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백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주름잡으며 일본군을 무찌르던 김일성이라는 전설적 명장이 있었는데 이북의 김일성은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의 업적과 이름을 가로채 마치 진짜 김일성 장군인 양 행세하였다는 가짜 김일성 설이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친일파나 고등계 형사 출신의 ‘가짜설’ 유포

‘가짜 김일성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책에 <만주국군>이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1937년 11월 김일성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책을 조금 더 넘겨보면 죽은 줄 알았던 김일성이 다시 나타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전에 목을 벤 사람은 김씨 성을 가진 유격대 지도자일 뿐, 김일성은 건재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너무나 허점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반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짜설이 어떻게 그토록 오랜 기간 이남사회를 지배해왔는가에 있다.

해방 뒤 이북에 돌아온 김일성이 유명한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19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이 34살로 너무나 젊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당시 평양공설운동장에 모인 군중이 김일성이 백발을 휘날리는 노장군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

문헌상으로 가장 먼저 이북의 김일성이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빌려 쓴 가짜라는 주장을 편 사람은 1945년에 간행된 <해방전후의 조선진상>이란 책의 공저자인 김종범과 김동운이다. 김종범은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풍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나, 해방 뒤에는 한민당의 간부가 된 인물이고 김동운은 만주의 봉천(奉天)일본영사관 소속의 고등계 형사였다. 1950년 <김일성 위조사>란 책을 펴낸 이북(李北)은 일제 시기 도쿄에서 아세아민족연구소라는 친일단체를 운영했으며, 해방 뒤에는 공산주의타도동지회 회장, 반공교육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한편 김일성이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평양공설운동장의 환영대회 분위기를 극작가다운 솜씨로 그려낸 오영진은 일제 말기에 이른바 ‘국민문학상’ 수상작인 <맹진사댁 경사>를 비롯한 친일작품을 쓴 사람으로, 해방 뒤에는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다가 월남한 인물이다.

이와 같이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유포한 사람들은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 또는 한민당과 같은 우익단체의 간부들이다. 이들은 분단상황에서 이북의 김일성이 식민지 시기의 말기에 민족적 항일영웅으로 존경을 받은 김일성이라면 지극히 곤란한 위치에 처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가짜 김일성 설의 고전적 문헌인 이북의 <김일성 위조사>나 오영진의 <하나의 증언>이 한국전쟁 시기에 제작, 배포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상반된 본보기, 김일성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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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군에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전쟁 발발 이후에는 미군 고문관과의 관계를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원만히 풀어나간 만주군 출신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白善燁)을 비롯한 만주군 출신의 국군 고위장교 다수는 만주군에서도 1938년 9월에 지린(吉林) 제2군관구 사령부 아래 건립된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출신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 청년들로 구성된 대게릴라전 특수부대로서 조선인부대로 하여금 김일성 등이 이끄는 조선인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는 것을 목표로 설치된 부대였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된 것은 1942년으로 이미 김일성이 소련으로 이동한 뒤였기 때문에 김일성과 백선엽이 직접 싸운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김일성 부대를 치기 위해 일제가 조선청년으로 만든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이 이남 군대의 육군 참모총장이 되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일성과 싸운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좋은 그림일 수는 없었다. 간도특설대나 만주군, 일본군 출신의 지휘관들이 아무리 민족의식이 없다 한들 자신들이 일본 천황의 부하로서 맞서 싸웠던 항일투사 김일성과 다시 맞붙게 된 사실을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이북의 김일성을 전설적 항일영웅이 아니라 그의 이름과 공적을 훔친 가짜로 모는 선전이 집중적으로 행해졌다. <김일성 위조사>의 저자인 이북에 의하면 당시 “공보처의 발표라든가 <미국의 소리> 방송, 혹은 유엔의 기상(機上) 삐라 등이 김일성이 위조인 것을 알리려고 무한 애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가짜 김일성 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에 이미 널리 퍼졌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전파되었다. 이승만의 경우 반민특위를 물리적으로 와해시키고 수많은 친일파를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승만 본인을 친일파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5·16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고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이름을 갖고 관동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은 박정희로서는 분단상황에서 이북과의 정통성 경쟁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김일성이 박정희보다 다섯살 위이지만 두 사람은 식민지 조선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만주에서 두 사람의 입장은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사이였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항일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은 일제의 관헌자료에 따르면 국경지의 주민들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김일성 같은 위인이 돼라고 빌었다고 할 만큼 추앙을 받고 있었다. 반면 박정희는 일본육사를 졸업할 당시 육사교장으로부터 “모든 조선의 젊은이는 오카모도 소위를 본받으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서구에선 거의 힘을 못 쓰는 이야기

해방된 조국에서 박정희가 식민지 시기의 말기에 보낸 젊은 시절은 결코 자랑스러운 것일 수 없었다. 1960년대에 나온 박정희의 전기도 이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의 전기는 박정희가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되어 ‘반공일선’에서 활동하면서 공비들과 110여회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고 그의 일본군 복무경력을 반공투쟁으로 미화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단상황 속에서 친일이나 부일(附日)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논리를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친일파나 부일경력자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반공이었다. 박정희가 관동군 장교 시절 ‘공비’들과 싸운 것은 분명하지만, 이 당시 그는 천황폐하의 부하로서 항일의 길에 나선 중국인과 조선인 공산유격대원을 상대로 싸운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나 그의 전기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천황폐하’의 부하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박정희 자신도 남북간의 민족적 정통성 경쟁에서 이같은 논리가 얼마나 궁색한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공산주의 대 반공의 논리를 따른다 하더라도 공산유격대의 대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일성과 관동군의 이름없는 하급장교인 박정희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남의 최고지도자의 개인적 경력과도 결부되어 ‘가짜 김일성 설’은 이남에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가짜 김일성 설’의 결정판으로 평가되는 이명영의 저작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무렵이었다. 이명영은 5·16 군사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 기획관을 지냈는데 이 당시 공보실장은 뒷날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이었다.

그런데 분단된 이남에서 일반인들의 김일성에 대한 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가짜 김일성 설’은 서구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1947년 미국의 한반도문제 전문가인 조지 매큔은 김일성을 “전 게릴라 지도자로서 민족해방운동의 영웅이라 불리는 인물” 또는 “만주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온 유명한 한국공산주의자이자 혁명가”라고 기술했다. 서대숙은 이북의 김일성은 “전설적인 애국자로부터 혹은 김일성이라는 혁명가들로부터 모든 것을 가로챈 엉터리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은 가짜 김일성 설에 대해 언급한 뒤 자신들은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하여 두각을 나타낸 다른 인물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했으며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일성은 1932∼41년 만주에서 소수의 유격대를 이끌었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결론지었다.

김일성의 명성, 과장된 측면도 있다

그렇다고 서방의 전문가들이 김일성을 민족해방의 영웅으로 묘사하는 이북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서대숙은 김일성이 전설적 영웅으로부터 모든 것을 가로챈 엉터리는 아닐지라도 해방 당시의 김일성은 “그의 혁명활동 경력이 서울에 모여 있는 많은 저명하고도 탁월한 정치지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전설적 영웅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도용한 사실”이 있는 “33살의 무명청년”이었다고 주장했다. 서대숙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공산주의자의 일인으로서 중국인으로부터 교육과 훈련을 받고 만주에 있어서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지도체계 속에서 승진하였던 이방인”으로 자신의 경력의 비(非)한국적 측면이 폭로되는 것을 꺼리는 인물이었다. 서대숙은 “김일성의 과거의 경력에서는 그의 성공을 보장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스칼라피노와 이정식도 “김일성의 권력장악과정에서 소련의 지원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며 “김일성은 이 무렵의 다른 어떤 정치지도자들보다도 외세에 밀착”되어 있는 소련의 ‘괴뢰’일 뿐이었다. 즉 서구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김일성은 만주에서 소규모의 유격대를 이끈 것은 사실이나 한국공산주의운동과는 무관하게 중국공산당의 지도체계 속에서 성장한 인물로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해방 뒤 이북에서 권좌에 오른 것은 자신의 항일투쟁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소련의 지원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구의 연구자들은 유격대 지도자로서의 김일성의 활동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중국공산당의 틀 안에서 성장했다거나 그가 집권하게 된 것은 소련의 선택의 결과였다고 비판함으로써 한국민족해방운동 지도자로서의 김일성의 경력을 폄하하고 있다. 반면 이남의 관변학자들은 이북의 김일성은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으로부터 그의 이름과 경력을 사취한 가짜라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다음 기회에 따로이 설명하겠지만 항일영웅으로서의 김일성의 명성은 식민지 조선의 특수상황 속에서 다분히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이 과장된 명성은 조선의 대중에게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널리 알려졌지만, 서구 연구자들이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존재는 아니었다. 따라서 서구의 연구자들이 김일성의 과장된 명성에서 거품을 제거하고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작업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분명 김일성은 식민지 조선의 대중에게는 다시 없는 영웅이었다. 대중의 김일성에 대한 존경과 기대는 너무나도 컸다. 해방된 조선에서 만주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일제를 무찌르던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의 업적을 의심하거나 그를 비난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명영의 주장이 드러내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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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사회의 실권을 장악한 친일파나 부일협력자들로서는 김일성이 이북의 지도자로 등장한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김일성을 직접 비판하기는 어려웠다. 그들로서는 대중이 존경하는 위대한 김일성 장군과 이북의 김일성을 분리해내어 이북의 김일성만을 비난하는 수단이 필요했다. 바로 그 수단으로 친일파나 우익인사에 의해 고안된 것이 ‘가짜 김일성 설’이다.

이명영의 ‘가짜 김일성 설’에 따르면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은 대단히 위대한 인물인 반면, 그의 이름을 가로챈 이북의 가짜 김일성은 살인과 방화, 약탈을 일삼은 공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영은 이북의 김일성을 가짜라고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북항일련군을 “항일과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직업적인 비적떼에 불과”하며 “약탈, 방화, 살인, 납치를 일삼는 공비부대”라고 매도하고 있다. 이같은 이명영의 주장은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했다가 옥고까지 치른 이재화가 명쾌하게 지적한 것처럼 항일유격대를 “약탈, 방화, 살인, 납치를 일삼는 공비부대라고 매도하던 일제침략자들의 제국주의 역사관과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이명영은 진짜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쟁취하고다 했던 우리 겨레의 염원에 대해서 무한한 용기와 기대, 그리고 신념을 솟구쳐주는 원천이며 그 상징이었다”라고 인정함으로써, 만일 이북의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이라면 그는 무한히 위대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역으로 말하고 있다. 이북에 돌아온 김일성이 조선의 독립을 가져다줄 영웅으로 전국적으로 숭앙받고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김일성이 단순히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면 가짜 김일성 설이 나올 이유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바로 현재의 이북 정권의 뿌리가 된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의 한 영역으로서뿐 아니라 이북의 전사(前史)로서 반드시 연구돼야 할 분야이다. 이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호가 “생활도 생산도 학습도 모두 항일유격대식으로!”이다. 유격대 국가라 불리는 이북처럼 역사가 과거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의 정치와 사회문화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경우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 이제는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떤 조건 속에서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그의 활동이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자리매김해야 할 때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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