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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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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를 보면 숨이 막힌다

등록 2005-09-09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font color="darkblue">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그것도 계급별로 차별받으며 묻히는 사람들
모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으로 열어놓으면 안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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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광복 60돌 기념 ‘8·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온 북쪽 대표단이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 묵념을 드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남쪽이 먼저 요구한 것도 아닌데, 북쪽이 스스로 국립현충원을 찾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가슴 벅차기도 한 일이다. 국립현충원. 한국전쟁의 희생자들만이 아니라, 과거 남북간에 상호 비방이 극심하던 시절 북쪽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던 “남조선의 이승만 괴뢰 도당” “박정희 괴뢰 도당”의 ‘괴수’ 이승만과 박정희가 잠들어 있는 곳이 아닌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북쪽 거물들이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머리를 조아리고 간 것이다.

북쪽의 현충원 참배가 생쇼라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일성 주석 주검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 참배 문제를 놓고 남북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 바 있다. 금수산 기념궁전이 아니라, 혁명열사릉이나 애국열사릉과 같이 북쪽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추모시설이었다 하더라도, 남쪽 대통령이 그곳을 참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남북의 정상은 뜨겁게 껴안았다. 모든 게 하늘 아래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휴전 체제하에서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자 김대중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대 의장대를 사열했다. 당장 통일이 될 것 같았던 그날의 감격에 비하면 참으로 더디게 진행됐지만, 북핵 의혹이나 서해에서의 충돌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내고 남북 대화는 이어졌다. 그리고 북쪽 대표단이 남쪽의 국립현충탑 앞에 섰고,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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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수구언론은 북쪽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할 때 국립묘지에 참배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해왔다. 그러던 수구언론이 사설을 통해 “무엇보다 북의 ‘깜짝쇼’가 남쪽을 상대로 이미 진행 중인 ‘이념 해체’ 작업의 촉매제로 이용될 가능성이 걱정이다”고 우려를 표명한 것은 차라리 아주 점잖은 일이었다. 우리의 조갑제 선수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이번 일을 “전범 집단의 철면피한 국립묘지 참배 생-쇼”라고 비난했다. 일부 반북단체들은 북쪽 대표단이 국립묘지를 찾는 시간에 맞추어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편 북의 조선사회민주당 초청으로 방북한 민주노동당 대표단은 북의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참배했는데, 김혜경 민주노동당 대표가 방명록에 “애국의 마음을 새기겠다”고 쓴 글이 남쪽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우리의 김용갑 의원은 김혜경 대표를 수사하라고 목청을 드높여 만경대 방명록 사건(<한겨레21> 375호, 2001년 9월5일, 역사이야기 참조)에 이어 또다시 제2의 방명록 파문이 일어나나 싶었지만, 그동안 세상이 좋아진 탓인지 다행히 큰 탈 없이 넘어가는 분위기다.

이래저래 남북의 국립묘지가 조용하지 않다. 일본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국립묘지는 아니지만,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국립묘지보다 더 극진히 여기는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까지 겹쳐 골치가 아파진다. 왜 슬픔을 곱씹는 고요한 장소여야 할 추모시설들이 시끄러운 소동의 진원지가 되는 것일까?

국립묘지란 전세계적으로 근대 민족국가 성립 이후에 등장한 장소다. 전근대에도 물론 국가가 관리하는 묘지가 있었다. 조선의 경우 왕과 왕비를 모시는 능이 있고, 그보다 격이 낮은 세자나 왕비가 아닌 왕의 생모를 모시는 원이 있었다. (어떤 호사가들은 왜 북의 국립묘지는 열사‘릉’이고 남의 국립묘지는 현충‘원’이냐고 시비를 건다.) 그러나 이런 전근대 국가의 국립묘지는 어디까지나 왕이나 왕비 급의 특수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반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널리 퍼진 국립묘지는 하급병사 등 전몰자들이 중심을 이루게 마련이다.

국립묘지는 근대 민족국가가 출범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보편화되었다. 전몰자를 국가가 한데 모아 추도하고 숭배하는 일은 민족국가 수립과 더불어 곧장 시작된 것은 아니다. 죽음과 장례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진행한 필리프 아리에스에 따르면 민족주의의 시대였던 19세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묘지는 여전히 사적인 측면이 지배적인 공간이었으며, 장교들의 유해나 겨우 전장에 가까운 교회에 묻히거나 가족들에게 송환되었을 뿐, 일반 병사들은 대부분 자기가 죽은 장소에 묻혔다는 것이다.

국가의 토대가 군대라는 근대적 믿음

근대에 들어와 출범한 민족국가가 국립묘지라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은 민족국가끼리 여러 차례의 전쟁을 치르고 난 뒤, 아니 앞으로도 이런 전쟁을 여러 차례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의 일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 민족주의의 문화적 상징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무명용사 기념비나 무덤을 꼽았다. 근대국가에서 병역의 의무란 시민적 권리와 표리의 관계를 이루게 되는데, 민족국가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이 저절로 일어나는 법은 절대(!) 없다. 민족국가가 일으킨다.) 그 구성원들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또 적을 죽일 것을- 이 행위를 굳이 ‘살인’이라고 표현하거나 총을 들기를 거부하는 자는 민족국가에서 ‘비국민’이 된다-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자국 병사들의 죽음에 대해 민족국가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한국의 국립묘지 문제를 처음 비판적인 입장에서 학술논문으로 다룬 김종엽에 따르면 “전몰자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그들을 기념하는 전몰자 숭배를 조직함으로써 국가는 국가의 토대가 바로 군대이며 희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을 전파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계속해서 요구될 동원과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 상징적 지배를 이룩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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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일병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수십명의 인명을 희생하는 것도 국가가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신화를 만드는 작업이다. 전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이 수십년 전 멀리 한국이나 베트남의 전장에서 희생된 자국 병사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데 열심인 것은, 미국이 앞으로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심란한 모습이기도 하다.

국립묘지가 만들어지면서 하급병사들 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국립묘지의 상징 공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립묘지는 군인묘지로 출발했는데, 군인묘지가 국립묘지로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은 국가의 토대가 곧 군대라는 믿음이 퍼져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국립묘지가 왕이나 왕비만을 위한 공간인 반면, 현대의 국립묘지는 자국의 하층민 병사들을 받아들인다. 이는 분명 민주주의의 발전을 반영한 진일보한 측면이다. 그러나 똑같은 전쟁에서 희생되었다 해도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국립묘지에 관한 한 군복이 아니라 사복을 입은 민간인은 불행하게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란 뜻인 ‘전몰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자국의 민간인도 포함되지 않는데 하물며 적국 병사들이야…. 도조 히데키 같은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다 하더라도 야스쿠니신사가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희생된 조선이나 중국의 민간인까지 포함하는 위령시설이라면, 고이즈미가 매일 참배를 간다 해도 아무도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국립묘지가 자국의 병사를 중심으로 국가가 기억하고 싶은 죽음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공통이지만, 국립묘지 안에서 그 죽음들을 어떻게 대우하는가는 국립묘지를 만든 권력의 성격에 따라 매우 다르다. 한국의 국립묘지는 이승만 때 군인묘지로 출발했는데, 이승만은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를 모델로 국군묘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알링턴 묘지에는 케네디 대통령도 묻혀 있는데, 그 묘지는 크기나 모양에서 일반 병사들의 묘지와 다를 바 없다. 대통령이 일반 병사와 나란히 같은 크기로 묻혀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일반 병사들을 높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그런 대통령의 모습이 존경을 자아낸다.

“절대로 국립묘지에 묻지 말라”

이승만은 근대 민족국가의 산물인 국립묘지제도를 도입했지만, 여기에 한국식 전근대적 유산을 남겨놓았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철학박사지만 “지관으로서도 식견이 높았던”(이승만이 국립묘지에 안장될 때 이를 보도한 <조선일보>의 기사에 나오는 표현이다) 까닭에 국립묘지를 풍수지리상의 명당에 자리잡았고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명당 중의 명당에 잡아놓았다. 그리고 박정희는 육영수 여사가 피격, 서거하자 명당을 찾았다. 박정희는 자신도 묻힐 자리를 정할 때 자신이 이승만보다 후임자임에도 이승만의 묘소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자신의 묏자리를 잡았다. 박정희가 어떤 지관을 택해서 자리를 잡느냐는 그 동네에서는 누가 최고의 지관이냐를 결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지 지관들 사이에 온갖 음해와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주산(主山)인 공작봉의 산세가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장국대좌형(將軍對坐形)으로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이라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반 사병들에게는 겨우 한평을 주고, 장군들에게는 8평을 주고, 자신은 왕릉이 부럽지 않은 80평에 누워 천군만마를 호령하고 있는 것이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생존시의 계급과 신분에 따른 묘역의 구분이 없는 반면, 국립현충원은 대통령, 장군, 영관급 이하를 기준으로 묘역의 크기를 정하고, 영관급 이하에서도 장교냐 사병이냐에 따라 상석과 묘비의 크기와 모양이 다르게 되어 있다.

최근 국립묘지 안장 기준이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어떤 죽음을 놓고 국립묘지에 안장돼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논쟁은 계속된다. 남극기지에서 희생된 젊은 넋이 국립묘지에 모셔져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여러모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기를 쓰고 안 된다고 주장하는 편도, 반대로 국립묘지에 가야만 의미 있는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쪽도 모두 안타깝긴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입대했다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살한 병사도 국립묘지에 갈 수 없다. 친일파가 애국지사로 둔갑해 애국지사 묘역에 누워 있는 것은 차라리 문제가 간단하다. 장군 묘역에 가면 화려한 일본군 경력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다. 오죽하면 임시정부의 마지막 국무위원인 조경한 선생은 친일파들이 즐비한 국립묘지가 싫다며, 당신이 돌아가신 뒤 절대로 국립묘지에 묻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건만,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령에 의해 국립묘지에 ‘안장’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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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일제 잔재가 나타난다지만, 국립묘지 역시 예외는 아니다. 정호기 박사의 지적에 따르면 상석 위에 입석 묘비를 세운 국립묘지 방식은 1938년 5월 육군묘지규칙이 발표되기 이전에 적용된 육군매장규칙에 의해 건립된 일본 군인묘지의 묘비와 유사하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일제 총동원 체제하의 전쟁 상황이 해방 이후 평화체제로 재편되지 않고, 한국전쟁까지 약 8년간 계속되었고, 일제가 조선에서 실시했던 전쟁 관련 희생자의 추모 방식이 해방 이후 연속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잔재가 청산되지 못하고,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 국립묘지를 만들고 관리한 셈이니 국립묘지에 일제 잔재가 짙게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립묘지의 온갖 휘호나 헌시, 조각물 상당수가 박정희를 포함해 뚜렷한 친일 경력을 남긴 사람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하긴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같은 시를 ‘황군은 죽어서 말한다’로 고쳐 읽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고, 대동아전쟁 당시 일본군 병사의 돌격 앞으로 모습을 그린 것과 똑같은 이미지의 그림이 같은 화가에 의해 그려져 오랫동안 국방부에 걸려 있었으니 어디 국립묘지에서 뿐이리오.

지금 한국에는 모두 5개의 국립묘지가 있다. 국립묘지의 대명사인 서울 동작동의 국립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은 국방부에서 관할하고 있고, 4·19국립묘지, 5·18국립묘지, 3·15국립묘지는 보훈처에서 관할하는데, 이들 두 계열의 묘지는 관할기관만 다른 것이 아니라 내용도 많이 다르다. 사회에서도 기성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대립을 반영하듯, 보훈 체계에서도 호국유공자와 민주유공자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 국립현충원에는 “1980년 5월 XX일 광주에서 전사”라고 적혀 있는 반면, 광주 망월동 묘지 역시 국립묘지로 ‘승격’된 것이다. 동의대 사태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자, 그 사건 당시 희생된 전경들의 가족들은 우리 자식을 국립묘지에서 파가란 말이냐며 거세게 반발했던 적도 있다.

북쪽 대표단의 국립현충원 참배와 남쪽 민주노동당 대표단의 애국열사릉 참배가 일으킨 소동을 보면서 나는 통일조국의 국립묘지를 떠올려보았다. 적화통일도 아니고, 흡수통일도 아닌 상호 존중의 통일을 이룬 ‘우리나라’는 어떤 국립묘지를 가져야 할까? 각각이 가꾸어온 국립묘지는 있는 그대로, 아니 남북 대립 과정에서 희생된 희생자들, 민간인뿐 아니라 미군과 중국군까지도 포함하도록 확대해 모든 죽음을 추도하는 국립묘지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프랑코조차 “뼈에 무슨 이념이 있는가”

마드리드에서 1시간쯤 떨어진 곳에 로스카이도스 계곡이 있다. 흔히 망자의 계곡이라 불리는 곳이다. 독재자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뒤 공화파 포로들을 강제동원해 지은 우파들을 위한 묘지였다. 그러나 프랑코는 뒤에 뼈에 무슨 이념이 있냐며 이곳을 스페인 내전에서 죽어간 모든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공간으로 바꾸었고, 그 자신도 여기에 묻혔다. 사실 망자의 계곡도 많은 문제를 가진 공간이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묻혀 있는 너무 많은 국립묘지를 그것도 남북에 갖고 있는 나라에서 온 나는 솔직히 스페인이 부러웠다. 어쩌다 내가 프랑코의 스페인을 다 부러워해야 하나? 반백년 이전의 전쟁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은 북녘 대표단의 참배를 보며 ‘생쇼’를 한다고 욕을 했을까, 너희들 왜 이제 왔냐고 반가워했을까?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는 지금도 몇천구의 유골이 방치돼 있다.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는 군인만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국가라는 공동체는 기억할 수 없는가? 기억해서는 안 되는가? 국가가 기념하는 죽음만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살해당한 죽음은 국립묘지에 갈 수 없는 것인가? 죽음 앞에서 자연스러운 감정은 슬픔이어야지, 찬미는 아니다. 왜 국가는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들을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지 못할까? 죽어서도 군복을 벗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나는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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