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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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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정신

등록 2008-06-05 00:00 수정 2020-05-03 04:25

▣ 윤용인 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삼십 년 전 기억 하나.
하굣길 버스 안이었다. 또래 여중생들이 탔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도 까르르 웃는다는 소녀들이었다. 버스 안은 시장통이 되었다. 그 소란을 끝낸 것은 내 옆자리의 아저씨였다. “야, 이 ×들아. 조용히 못 가!” 순진한 시대보다 더 순진했던 소녀들은 입을 삐쭉 내밀 뿐 이내 조용해졌다. 고요를 찾은 버스 안은 좋았지만, 다시 잠에 빠진 아저씨의 막말은 미웠다. 그때 다짐했다. “나는 늙더라도 이런 꼰대는 되지 않을 거야.”
몇 주 전 기억 하나.

출근길 버스 안이었다. 맨 뒷좌석 구석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어느 정거장에서 남녀 고교생이 탔다. 내 옆에 앉은 그들은 쉴 새 없이 ‘씨바’거리고 ‘졸라’거렸다. ‘하하호호’ 하며 서로 얼굴과 손을 어루만졌다.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고민했다. 한마디 할 것인가, 그러다가 모욕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지. 흘끔 째려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나도 모르게 고함이 튀어나왔다. “너희들, 조용히 안 해?” 당돌한 시대보다 더 당돌한 아이들은 다행히도(?) 속삭임 모드로 전환해줬다. 그런데도 여전히 책이 눈에 안 들어왔다. 이런 생각만 맴맴. “반말은 왜 하는데? 욕만 안 했을 뿐 30년 전 꼰대와 너는 뭐가 다른 거야?”

그 사건 이후로 내 ‘깜빡’ 생각의 주제는 꼰대였다. 아니 정확히는 꼰대 정신이었다. 부쩍 늘어난 잔소리에 14살 딸아이가 “아빠가 꼭 할아버지 같아”라고 핀잔을 줄 때도, 점점 길어지는 월례회의 훈계에 직원들이 지루해할 때도 꼰대 정신이 깜빡하고 떠올랐다. 생각이 굳어지면 안 되는데, 나이가 많다고 후배를 가르치려 들면 안 되는데, 내가 처한 위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려 하면 안 되는데, 라고 자조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광우병 촛불이 켜지면서 내 꼰대 정신은 아직 젖도 안 뗀 것임을 알게 됐다. 병 걸린 소는 안 된다고 외치는 여중생들에게 나이 어린 것들이 뭘 아냐고 호통치는 꼰대들. 잘못된 것 고치자고 광장에 왔다는데 ‘배후’와 ‘괴담’ 운운하는 꼰대들. 우리 꼰대 형아들이 바퀴벌레처럼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윌리엄 새들러가 쓴 의 핵심 키워드는 중년의 정체성이다. 부모에 의해 길러진 십대를 지나고, 공부와 연애와 사회 진출의 이십대를 거쳐, 밥벌이의 삼십대를 지나면 사십대부터는 자신을 중심에 두고 고민을 하라는 것이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방법을 통찰하라는 것이다. 나이와 돈과 지위가 많거나 높다고 곡학아세와 혹세무민하는 것은 정체성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꼰대 정신이며, 전문적 심리용어로는 페스팅거가 말한 ‘인지부조화’라 하는 것이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고, 제 편한 대로만 생각한다는 그 불치병.

소는 광우병 안 걸리게 잘 키워야 하고 인간은 꼰대 정신 안 생기게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그리하여 부탁하나니, 세상의 소녀들아. 촛불로 광우병만 태우지 말고 나와 내 주변의 꼰대 정신도 불태워다오. 활활, 아주 깡그리 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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