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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식 변하니 가사도 바뀌네

등록 2006-08-17 15:00 수정 2020-05-02 19:24

왜 사랑타령은 식지 않는가② 1980년대~2000년대 대중가요의 시대정신 … 섹스를 스포츠라고까지 역설한 사랑의 춘추전국시대, 시장이 세분화되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대중가요 속 사랑은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는 삶의 문법, 더 나아가 시대정신까지도 말해주는 은유일 수 있다. 남녀관계의 표현으로 사회가 움직이는 기본 메커니즘을 말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강남 유흥가 문화’를 찬양·고무하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강남 유흥가가 거대해지고 전국 유흥가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면서, ‘강남 파워’는 가요계에까지 밀려들었다.

사랑의 슬픔과 한에 관한 한 강남 여인들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으니, 그들의 사연을 담은 사랑 노래는 다소 추상적인 가사 표현을 통해 보편적인 설득력을 확보했다. 그건 적나라한 욕망의 긍정이기도 했다.

1983년 김수희의 (추세호 작사·작곡)는 “사랑의 기로에 서서 슬픔을 갖지 말아요 어차피 헤어져야 할 거면 미련을 두지 말아요”라고 노래함으로써, 이별을 전제로 한 사랑을 하곤 했던 강남 여인들의 제1순위 단골 레퍼토리로 떠올랐고, 이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남성 고객들의 애창곡으로까지 발전했다.

1985년 주현미의 (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는 “잊어야지 하면서도 못잊는 것은 미련 미련 미련 때문인가봐”라고 의 사연에 맞장구를 쳤고, 같은 해에 발표된 주현미의 또 다른 강남 노래인 (안치행 작사·작곡)는 “사랑이 피어나는 영동의 밤거리”라고 선언함으로써 그간 ‘블루스’의 원조로 군림했던 에 정면 도전하고 나섰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수많은 강남 가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왔다. 신흥 강남 가요는 강북에서 강남으로의 권력 이동을 상징하는 동시에 이른바 ‘3저 호황’으로 흥청대는 ‘강남 밤문화’에 낭만의 포장을 씌우는 효과를 낳았다.

1988년 주현미의 (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은 그간 부정적으로만 비쳤던 신사동 카바레 문화에 인간적 체취를 부여했다. 1989년 문희옥의 (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는 아예 노골적으로 “여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라며 “외롭거나 쓸쓸할 때는 누구라도 한 번쯤은 찾아오세요”라고 권유하고 나섰다.

‘강남 유흥가 문화’가 찬양·고무한 솔직성은 1990년대 들어 신세대의 노래에서 ‘사회비평’의 형식으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로 청춘의 비판적 감각은 일상적 삶을 향했고, 이는 사랑을 정밀 분석하는 작업도 포함했다. 정석원의 활약이 돋보였다.

승용차 대중화의 물결 속에서 남녀관계에서도 승용차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졌다. 1992년 015B의 (정석원 작사·작곡)는 “이젠 그 사람의 자동차가 무엇인지도 궁금하고 어느 곳에 사는지도 중요하게 여기네”라고 했고, 1993년 푸른 하늘의 (유영석 작사·작곡)는 아예 노골적으로 “그런 작은 자동차 타고 다니면서 내게 감히 말을 건넬 수가 있니”라고 쏘아붙였다.

서태지는 거대담론형, 박진영은 실사구시형

연인의 자동차를 따지게 된 마당에 사랑을 터무니없이 미화하는 것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었다. 과거엔 기성세대가 도맡아하던 이야기도 이젠 20대의 몫이 되었다. 1993년 이승환의 (정석원 작사·작곡)는 “사람들은 가끔 착각하지 서로의 조건들을 좋아하고선 이게 사랑일 거라고… 우린 어느 정도 현실적인 사람들 서로 그런 걸 이해하면 되는 거야”라고 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한 위장일망정 삶의 동력이었다. 사랑의 환상 없인 살아갈 수 없기에 ‘사랑의 현실화’에 정반대되는 흐름도 동시에 나타났다. 파격으로 일컬어졌던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서태지 작사·작곡)도 가사만큼은 전통 뽕짝의 정신에 충실했다. “제발 이별만은 말하지 말아요 나에겐 오직 그대만이 전부였잖아…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나는 지금 울잖아요.”

1994년 서태지가 사회 문제로 눈을 돌려 통일을 염원하는 , 획일화된 교육 현실을 비판한 등을 내놓자 10대보다는 진보진영 일각이 더 열광했다. 일부 진보매체에서는 서태지 비판을 자체 검열할 정도였다.

서태지가 거대담론형 진보파였다면, 박진영은 실사구시형 진보파였다. 1995년 박진영의 (박진영 작사·작곡)는 “그대가 나와 결혼을 해준다면 나는 그대의 노예가 되어도 좋아”라고 했다. 페미니스트들은 박진영이 여자의 즐거움을 위해 노력하며 사랑의 남존여비를 깼다는 걸 높이 평가했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은 엄청난 은퇴 파동을 일으키며 사라졌지만, 그 공백은 H.O.T 등 하이틴 댄스그룹이 채웠다. 1996·97년은 고등학생 가수들의 전성시대였다. 이수만이 이끄는 SM기획의 H.O.T 성공에 자극받은 대성기획은 1997년 초 H.O.T와 동일한 콘셉트의 젝스키스를 기획해 성공시킴으로써 이후 대형 기획사의 전성시대를 열게 되었다. SM기획이 1997년 여성그룹 S.E.S를 성공시키자 대성기획은 1998년 핑클을 데뷔시켰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10대 시장’의 대공략이었다.

1997년 S.E.S의 (유영진 작사·작곡)은 “나 오직 너를 위해 살고 싶어”라고 했고, 1998년 핑클의 (김영아 작사, 김석찬 작곡)는 “솔직히 너를 반하게 할 생각에 난생처음 치마도 입었어… 난 니 거야”라고 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전후로 ‘박정희 신드롬’과 더불어 복고주의 물결이 전 사회를 강타하기도 했다.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불황 때문이었을까? 댄스음악이 주춤하고 발라드가 살아나면서 사랑도 복고로 돌아갔다. 진실과 신뢰에 대한 갈증을 호소하는 노래들이 쏟아져나왔다.
명실상부한 사랑의 다원주의, 아니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시장 세분화가 확실해졌다. 핑클은 계속 ‘난 니 거야’ 코드로 밀어붙였지만, 1999년 이정현의 (최준영 작사·작곡)는 “설마했던 니가 나를 떠나버렸어… 늦었어 이미 난 네 여자야 독한 여자라 하지 마 사랑했으니 책임져”라고 앙칼지게 물고 늘어졌다.

섹스의 스포츠화, 싸이 vs 이효리

이른바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겪는 과도기적 처방이었을까? 모든 걸 주면서도 겁까지 주는 모드의 사랑 노래가 새 천년을 장식했다. 2000년 이정현의 (유유진 작사, 윤일상 작곡)는 “나 오늘은 순결한 백합처럼 나 때로는 붉은 장미처럼 모든 걸 다 줄래”라고 했고, 2000년 박지윤의 (박진영 작사·작곡)은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 그대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요… 나 이제 허락할래요”라고 했다.



이후 ‘주느니’ ‘갖느니’ 하는 것에 방점이 찍힌 노래들이 많이 등장했다. 소유에의 집착과 더불어 소유 변동도 주요 화두가 되었다. 2001년 이수영의 (MGR 작사, 원상우 작곡)는 “당신의 사랑은 떠났어 그 남잔 지금 여기 내 품에 편안히 잠들어 있어요”라고 했고, 2001년 god의 (박진영 작사·작곡)는 “그대의 남자가 안 온 게 꼭 나쁜 건 아냐 오늘 밤 이 자리에 앉은 남자가 당신 남자야”라고 했다.
아예 노골적으로 ‘섹스는 스포츠’임을 역설하는 흐름도 나타났으니, 그 선두주자는 싸이였다. 2002년 싸이의 은 처녀성을 지켜야 한다는 여자에게 남자 ‘선수’가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노래였다. “처녀는 몸이 아니라 정신. 못생기고 처녀라 자랑하는 건 병신. 돈을 위한 섹스, 맘이 담긴 섹스, 땀 빼려는 섹스, 모두 숭고한 스포츠.” 그러나 싸이가 늘 그렇게 사나운 건 아니었다. 같은 해에 나온 싸이의 은 “너도 원한 걸 해야 그래야 성인이야 오빨 믿고 따라와”라고 꼬드겼다.
싸이의 반대편엔 이효리가 있었다. 이효리는 5년 만에 “난 니 거야”에서 “넌 내 거야”로 돌아섰다. 2003년 이효리의 (Maybee 작사, 김도현 작곡)는 “Just one 10 minutes 내 것이 되는 시간”이라고 장담했다. 이효리는 2006년 2집 앨범 에선 10분도 길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대중문화평론가 이승재는 “2집에서 이효리는 ‘적극적인 여자’의 모습을 뛰어넘어 거의 ‘굶주린 암사자’에 가깝”다고 평했는데, 그건 미국의 마돈나를 능가하는 ‘섹슈얼 페미니즘’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었다. 왜 섹스의 쾌락을 남자만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섹스의 스포츠화’는 대중가요의 ‘조작’일까? 그런 것 같진 않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홍두승이 경북대, 서울대, 서울시립대, 연세대, 전북대, 한림대 등 6개 대학 교수팀과 함께 2006년 6월 이들 대학의 학생 554명을 상대로 실시한 ‘2006년 한국 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성관계 경험이 있는 학생은 31.2%로 지난 1994년에 실시한 같은 조사의 14.1%, 1999년 조사의 19.6%에 비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1994년과 비교해 남학생은 18.2%에서 39.4%, 여학생도 10%에서 22.7%로 늘어나, 남녀별로 증가 추세는 비슷했다. 최초의 성관계 대상자는 남학생의 경우 지난 1994년 조사에선 애인이 44.4%였지만 최근 70.4%로 증가한 반면, 성매매 종사자는 31.6%에서 5.2%로 크게 줄었다. 여학생도 대상자가 애인이 77.8%에서 86.2%로 높아졌다.
여성의 전투성은 이른바 ‘누나 신드롬’으로도 나타났는데, 이 또한 실체적 근거를 갖고 있다. 2005년 결혼한 연상녀-연하남 커플은 전체 신혼부부의 12.2%를 차지했다. 10년 전 8.7%와 비교하면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이다. 2006년 7월 한 결혼정보 업체가 미혼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성 응답자 70.5%가 연하남에 대해서, 남성 응답자의 53.8%가 연상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여성의 사회 진출과 그에 따른 경제력 향상이다.

전위-중간-보수, 불멸의 3각 구도

그 이전에 1990년대의 인구학적 변화가 있었다. 1992년 전체 인구의 26.7%인 1135만3천여 명이 학생이었으며 이 중 중고생이 절반을 차지했다. 이들 ‘1가구 2자녀’ 시대의 10대들은 구매력도 막강했기 때문에 사실상 가요문화의 지존으로 군림했다. 당연히 가요는 이들의 취향을 우선시했다. 이후 등장한 인터넷은 4천억원대 음반시장을 1천억원대로 쪼그라들게 만들면서 ‘음원시장’으로 이동하게끔 몰아붙였는데, 이에 따라 대중의 주목을 쟁취하기 위한 가요의 자극성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변화가 전통적인 사랑 노래가 설 땅을 완전히 없애는 건 아니다. 가요 속 사랑은 ‘전위-중간-보수’의 3각 구도가 서로 밀고 당기면서 시장을 분점하는 형태로 표현됐으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불멸의 법칙이다. 물론 그런 가운데 전반적으론 전위 쪽으로 이동하는 흐름은 계속되겠지만 말이다.
가요의 소비 환경도 가사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변수다. 한국의 가요문화는 혼자 즐기기보다는 남들 앞에서 보여주는 문화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사랑 표현은 늘 과시적 과장을 범하게 돼 있다. 특히 1995년부터 급속히 늘어난 노래방과 단란주점은 그런 효과를 극대화했다. 한류의 1등 공신을 멀리서 찾지 말라. 바로 노래방이다. 노래방은 의외로 심오한 장소다. 1999년 6월 한국을 방문한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는 ‘20년 만의 귀국일지’에서 ‘노래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로만 듣던 곳에 들어갔다. 나도 노래를 몇 곡 불렀다. 한국 사회를 알려면 꼭 가봐야 하는 곳. 스트레스를 풀고 신경질을 풀고 불안심리도 풀고 억압감정도 처리해주는 아주 중요한 정신병원. 이 노래방이 없어지면 정신병자가 급증할 것이며, 폭력죄·소요죄·노상방뇨죄·고성방가죄 등의 범죄가 지금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가요 속 사랑과 관련해 더욱 중요한 사실은 노래와 술은 늘 따라다닌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술 한잔 걸치고 마이크를 잡았다. 과장된 사랑 감정이 일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겠다는 의지로 충만하다. 어차피 현실세계가 그러지 못하므로 절규라도 해야 한다.
한국인에게 노래는 발산의 축제다. 안으로 담는 게 아니라 밖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선언의 성격이 강해야 한다. 백화점 쇼핑 행위와 비슷해진 사랑이기에, 구매력 고통을 겪는 사람일수록 목숨 거는 사랑을 절규하는 것으로라도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이 심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가요 속 사랑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탐욕의 화신’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이 노래방에서 사랑 노래를 진지하게 부르는 걸 본 적이 있는가? 그 순간만큼은 그를 인간적으로 보고 싶어진다.

전율을 잃은 당신을 위하여

땅 좁고 인구밀도 높고 동질성이 강한 탓에 한국인은 체질적으로 타인지향적 보여주기에 강하다. 그렇게 축적된 저력이 한류를 만들어냈다. 의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제 첫사랑이 저를 다시 부르면 어떡하죠?” 낯간지럽고, 당하는 입장에선 온몸을 부르르 떨어야 할 배신의 멘트지만, 삶의 피곤에 찌들어 전율을 잃어버린 대중에게 뜨겁고 격렬한 사랑은 반드시 창조되어야만 할 영원한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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