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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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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의 눈과 코

등록 2011-08-12 08:47 수정 2020-05-02 19:26

지하철 문이 열리고 한 아저씨가 들어왔다. 빈 좌석으로 성큼 걸어가 털썩 앉았다. 시간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났다. 멀찌감치 걸어가더니 출입문 앞에 섰다. 아저씨가 계속 흘깃거리며 쳐다본다. 모자를 푹 눌러쓴 어두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고 술 냄새가 섞인 막연한 어떤 냄새가 주위로 번져나왔을 뿐이다. 손에 든 종이가방에는 읽기 위한 건지 팔기 위한 건지 알 수 없는 신문들이 차곡차곡 접혀서 들어 있었고, 흰 운동화 안으로는 맨발이 비쳤다. 다시 출입문이 열렸는데 아주머니가 내리지 않고 근처 빈자리에 다시 앉았다. 아저씨는 확연히 째려보는 눈길로 씩씩거렸다.

기대를 비워내는 슬픔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내가 노숙인인 줄 알아?” 중얼거리는 말 속에 어렴풋이 새어나왔던 말이다. 지하철에 타서 빈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누군가가 자신을 피해 황급히 자리를 뜨니, 화가 났을 게다. 노숙인도 아닌데 ‘노숙인 취급’ 당한 것 같아 불쾌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정말 잘 곳이 없어 노숙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냄새가 난다, 보기가 싫다, 무섭다는 이유로 멀찍이 피하거나 흘깃흘깃 쳐다보는 눈길이 제 몸에서 나는 냄새만큼 익숙해진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굳이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 것 같다. 기대가 있어야 화도 나는 법이니 말이다.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다. “하루이틀 못 씻는 게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벌레가 먼저 친구가 되더라.” 노숙을 하는 어느 누구도, 노숙 생활을 상상해본 적 없다. 거리 노숙이 길어지면서, 다들 피하고 싶어 하는 몸의 냄새를 가장 먼저 맡고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이다. 냄새뿐인가. 저마다의 사연으로, 거리에서 자는 일이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는 동안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기대를 비워냈겠는가. 이제 생명과 생존에 대한 본능적 욕구 하나를 붙들고 위태롭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서울역이 그것조차 내려놓으라고 한다.

지난 7월, 서울역은 8월부터 밤 11시 이후 노숙인을 퇴거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용객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으며 민원이 급증하기 때문이란다. 여러 사회단체와 시민들의 항의가 있자 서울역은 폭염과 호우를 고려해 퇴거 조처를 8월22일로 늦추고, 금지 시간도 새벽 1시30분부터 4시30분 사이로 변경했다. 폭염과 호우는 걱정하는 척했지만 폭설과 혹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이용객의 안전과 민원이 걱정이라면서, 이용객이 가장 적은 새벽 시간에, 굳이 노숙인들을 내쫓겠다고 한다. 서울역이 노숙인들의 마지막 장소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얼어 죽는 것도 아무나 못한다고, 사람은 본능적으로 지붕을 찾아들게 마련이다. 그 시간은 이용객이 아니라 노숙인들에게 결정적인 시간이다. 서울역은 그 시간대의 노숙을 금지함으로써, 서울역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노숙인들의 동네를 싸그리 없앨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

서울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장소다. 새벽 2~3시에 역에 닿아 지하철 첫차를 기다리며 잠 좀 청하는 것도 막을 작정이 아니라면, 갈 집이 있는 사람은 자도 되는데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자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차라리 집 없는 게 죄라고 말하지 그랬나. 노숙은 범죄가 아니다. 금지해야 할 행위도 아닐뿐더러, 서울역이 그것을 금지한다 만다 할 권한을 가진 것도 아니다. 방 한 칸이라도 자기만의 공간에 몸을 누일 수 있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들이 노숙인이고, 그들이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가장 애쓰는 사람들이 사회복지사다. 그들은 냄새 때문에 벌레와 친구가 돼야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냄새를 없앨 방법을 찾는다. 서울역은 사람을 없앨 방법을 찾는다.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사람은 보지도 냄새 맡지도 못하는, 서울역의 눈과 코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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