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당신의 직업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등록 2011-05-05 09:25 수정 2020-05-02 19:26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아빠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엄마는? 뭐라고 쓰면 좋을지 고민 중이다. 엄마는 집에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음식도 만들고, 무엇보다 가족 모두를 돌봤고 살림을 관장했다. 그러나 거기에 붙일 만한 직업 이름은 없다. 주인의 부인이라는 ‘주부’도 마땅치 않다. 대학 입시원서를 쓸 때, 아빠는 학자, 엄마는 교사가 되라고 했다. 엄마는 안정적 소득을 걱정했고, 아빠는 학문적 성취를 기대했다. 아빠는 교사라는 직업을 권하지 않았고, 엄마는 청소일이나 요리나 사람을 돌보는 직업을 권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신규채용에서 장기근속 노동자의 자녀에게 가산점을 주자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단체협상 요구안이 알려졌을 때 내가 떠올린 사람은 청소노동자였다. 그녀도 자식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싶을까.

최저임금으로 살라는 강요

지난해 한 대학생이 청소노동자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인터넷에 알려져 ‘패륜녀’ 소리를 들었다. 인격 모욕과 부당한 대우를 힘든 점으로 꼽는 청소노동자의 현실이 그렇게라도 드러난 것은 반가웠지만 너무 쉬운 비판이 조금 불편했다. 함부로 말하지 않고 낮춰보지 않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올해 거리 곳곳에 ‘표창장’ 광고를 내걸었다. “당신들은 서울을 빛낸 진정한 영웅”이라며 호출된 6개 직업 중에는 청소노동자도 있었다. 물론 서울시는 ‘환경미화원’이라고 불렀다. 얼마 뒤 정부는 동탑산업훈장을 인천공항의 청소노동자에게 수여했다. 이제 그녀들의 숨은 공로가 사회적으로 치하되는 것인가. 그러나 표창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누구에게 표창을 내릴지 선정할 권한을 가진 자가 위에 있고, 표창을 받는 사람들은 아래에 있다. 앞서 막말 사건을 당한 청소노동자는 차분하게 그 학생의 부당함을 지적했고, 얼마 뒤 학생이 찾아와 사과했을 때 넉넉하게 용서했다. 그녀는 아래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패륜녀’에 대한 사람들의 흥분된 비판이 그녀를 아래에 둔 것은 아닐까.

몇 년 전 한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을 만났을 때 최저임금이 얼마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임금이 너무 낮다고 하소연하던 분들이 순간 머뭇거렸다. 질문을 바꿔 ‘최저임금이 10만원쯤 오르면 무얼 먼저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한 분이 친구들과 찜질방에 가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 사이 최저임금이 10만원은 올랐는데 그분은 가끔 친구들과 찜질방에 가고 있을까. 장담컨대, 최저임금이 오르는 족족 생활비로 지출됐을 것이다. 밥상에 맛난 반찬 하나라도 더 올리기에는 물가상승률이 너무 가파르다. 그러나 한 달에 얼마를 주든 그걸로 한 달을 살아온 그녀들은 한 번쯤 친구들에게 한턱 쐈을 수도 있고, 오래된 냉장고를 큰맘 먹고 바꿨을지 모르겠다. 임금이 얼마든, 살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살아온 그녀들은 오늘 하루를 또 살아낼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최저임금으로 먹고살 만한지만 묻지 말고, 왜 누군가 최저임금 아래에서 살 것을 강요받는지 물어야 한다.

그것은 노조만의 탓일까

정부의 훈장을 받은 청소노동자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야 하는 세상에서, 과연 노동자가 행복할 수 있을까.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신분 세습’ 욕구를 비난할 때, 많은 사람들은 ‘노동자’보다는 ‘정규직’을, ‘현대자동차’를 떠올렸을 것이다. 누구도 그걸 손쉽게 얻을 수 없는 현실에서 가산점이라니, 분노할 만하다. 그러나 엄마가 나의 안정적 삶을 걱정했듯, 누구나 안정적 삶을 기대할 만하다. 물론 내가 교사도 학자도 아닌 활동가인 것처럼, 그녀들의 자녀는 또 다른 일을 꿈꿀 수 있다. 그게 중요하다. 누구든 다른 삶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안정적 삶에 대한 꿈을 채용 가산점으로밖에 제시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의 모습은 초라하고 씁쓸하다. 청소노동자가 자식에게 직업을 물려주고 싶은 세상이 못 되는 걸 노동조합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