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민규/ 소설가
최근 생긴 새로운 즐거움 하나는 가수 이상훈(그렇다, 전직 야구선수였던)씨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다. 공연장에서, 또 거리 무대에서 이제는 로커가 된 그의 변신을 나는 즐기고 사랑한다. 또 하나 보고 싶은 무대가 있다면 가스펠 가수 팻 분(그렇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른)의 헤비메탈 공연이 그것이다. 그는 45년간 가스펠의 총아이자 미국인의 표본으로 살아왔고, 그러다 문득 징이 박힌 가죽옷을 입고 나타나 헤비메탈을 하기 시작했다(97년의 일이었고, 환갑을 넘긴 나이였으며, 발표한 앨범의 타이틀은 <더 이상의 미스터 멋쟁이는 없다>였다). 아아, 더 이상의 미스터 멋쟁이는 없다라니, 환갑을 넘어 변신한 이 미스터 멋쟁이에게 전미수녀협회는 악마의 포교를 받은 이단자란 낙인을 찍어주었다. 왜 그랬을까? 나 실은 이게 하고 싶었어요. 감미로운 목소리로 팻 분은 스스로를 대변했다. 할렐, 루야!
신념을 가진 자들이 세상을 망친다
아니면 말고. 이를테면 지금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물은 바로 팻 분과 같은 이가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45년 극우(極右) 외길 인생을 걸어왔어요. 아아, 아무래도 이건 아니라고 봐요(그럴 리는 없겠지만). 노조운동 25년, 우리 노조가 이럴 줄은 미처 몰랐어요(이럴 리도 없겠지만) - 요는 우리가, 아니어도 끝끝내 자신의 신념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그렇게 커왔다는 것, 그렇게 이 사회가 세팅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니어도, 아닌 줄 알면서도, 아니, 아닌 줄 정말 모르고서 오늘도 목에 힘을 준다, 입장을 견지한다, 완고하게 신념을 관철, 시킨다. 저러다 똥, 나오겠는걸.
세상을 망치는 건 신념을 가진 인간들이다. 점점 그런 생각이 든다. 45년간 가스펠을 해왔으면 죽을 때까지 가스펠을 해야 한다 믿는 - 정의를 내세우고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반드시 이래야 하고 반드시 저래야 하는, 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고집불통의 인간들이다. 바로 이런 인간들이 정쟁(政爭)을 벌이고, 테러를 자행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위안부를 동원하고, 학생들의 머리를 바짝 쳐올리고(一字로), 어디 여자가 길에서 담배를, 지나가던 여성을 폭행하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자식을 닦달하고, 이데올로기 같은 걸 만들어내고, 완장을 차고, 배지를 달고, 불가능은 없다 밀어붙이고, 내가 누군데 큰소리를 치고, 당신은 가만히 있어 상대를 윽박지르고, 또 그러면서 자신은 다 이해한다고, 열려 있다고(주로 오픈 마인드란 단어를 쓰지) 얘기하고, 우리 제발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그 문제를 논하자며 일갈하고(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래방에선 <마이 웨이>를 부르고(태연하게), 단일민족 순수혈통 내 고향 내 지역 우리 가문 우리 동문, 어쨌거나 팔은 안으로 굽고, 늘 옳았으므로 잘못한 게 없고, 거리낌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고, 무엇보다 굽히지 않고, 태연히 일어나 분재에 물을 주고, 아무튼 이것 참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이 나라가 큰일이야 진심으로, 진심으로 이 나라를 걱정하고(사이코 같으니라고).
늦지 않았다, 친구여
유연하게 말해서, 이제 우리도 변신할 때가 되었다. 언제라도 아니면 말 수 있는 사회, 아니면 마는 개인들이 속속들이 출현한다면, 우리의 미래도 생각처럼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난 세월 불러온 가스펠이 아깝다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수천년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대한민국의 과거는 고작 60년에 불과하다(제발 반만년이라고 자위하지 마). 이제라도 아니면 말자. 아니, 드디어 환갑을 넘긴 이 미스터 멋쟁이를 위해서, 우리에겐 확실히 아니면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늦지 않았다 친구여, 아니면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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