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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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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힘이 세다

등록 2011-12-14 04:45 수정 2020-05-02 19:26

‘그 일’을 아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 일’은 오래도록 부재하는 존재였다. 김학순. 그 할머니가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1991년 8월14일 서울 중구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 “지금도 일장기만 보면 억울하고 가슴이 울렁울렁해요.”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밝혔다. 국내 첫 피해자 공개 증언이었다.
망각을 조장해온 침묵의 얼음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경기도 퇴계원 비닐하우스에서 홀로 지내던 강덕경, 부산 다대포에서 외로이 횟집을 하던 김복동, 가족의 반대를 뿌리치고 방송사를 찾아온 김순덕…, 평생을 숨죽여 지내던 할머니들이 세상을 향해 외쳤다. 할머니들은 빼앗긴 명예와 인권을 되찾아야 했다.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은폐해온 일본 정부와 이를 방관하던 한국 정부는 곤혹스러워했다.
할머니들은 망각에 맞서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찍었다. 벚꽃이 흐드러진 나무 아래 조선 처녀가 벌거벗은 채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다. 옆엔 일본군이, 발밑엔 해골이 있다. 강덕경 할머니는 달거리도 시작하지 않은 16살 어린 나이에 처음 능욕당했던 그 언덕의 기억을 그림으로 남겼다(). 김순덕 할머니는 한복에 댕기머리를 한 조선 처녀가 놀란 눈으로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그림 으로 ‘그 일’을 증언했다. 강덕경 할머니는 1995년 12월 폐암 진단을 받고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담은 다큐 의 변영주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다른 건 상관없는데, 나 죽고 나면 모두들 나를 잊을까봐 겁이 나. 나 죽기 전에 실컷 찍어. 이 영화 나중에 다 볼 수 있게….” 변 감독은 할머니가 1997년 2월2일 고단한 삶을 접을 때까지 마지막 모습을 에 담아야 했다. “죽기 전에 역사적 사실을 꼭 밝히고 말겠다”던 김학순 할머니는 1997년 12월16일 폐질환으로 한 많은 세상과 작별했다. 전 재산 2천만원을 “어려운 사람을 도와달라”며 다니던 교회에 맡기고선. “다시 태어나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다”던 김순덕 할머니도 2004년 6월30일 세상을 떴다.
할머니들은 생전에 ‘수요시위’에 늘 참석하셨다. 그 수요시위가 12월14일로 1천 회를 맞는다. 1992년 1월8일 시작했으니, 20년째다. 그사이 일본 총리가 13번, 한국 대통령이 4번 바뀌었다. 한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4명 가운데 지금 살아 계신 할머니는 65명뿐이다.
일본 정부는 ‘때’가 임박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할머니들이 모두 죽어 일본의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증언할 당사자가 사라진, 망각의 세상 말이다. 해방 뒤 반세기를 숨죽여 지내던 할머니들이 세상에 자신의 아픔을 드러낸 뒤 가장 두려워한 게 다시 잊혀질지 모른다는 ‘망각의 공포’였다. 강덕경 할머니가 생의 마지막 불꽃을 영화 출연으로 사른 것도 망각을 물리칠 ‘기억의 힘’을 믿은 때문일 터. 자신의 사연을 담담히 기록해 1998년 전태일문학상(·일하는사람들의작은책 펴냄)을 받은 김윤심 할머니는 지금 치매를 앓고 계신다. 할머니들이 증언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할머니들이 12월14일 수요시위 장소에 ‘평화비’를 세우는 까닭이다. 잊지 말자. 일본 정부를 향한 할머니들의 요구 사항은 7가지(전쟁범죄 인정,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전범자 처벌, 역사 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다. ‘기억’은 산 자의 몫이다. 당신에겐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제훈 편집장
*유엔 공식 용어는 ‘전시 군 성노예’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이 용어를 힘겨워해 한국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라고 한다. 학계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이 8만~20만 명, 그 가운데 80%가 조선인이라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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