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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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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를 위한 복화술?

등록 2011-11-16 04:25 수정 2020-05-02 19:26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먹고살게 된 건 알고 보면 다 일본 덕분이야. 일본이 미국한테 깨지지 않았다면 분단도 안 됐을 테고, 우리는 지금 만주까지 활보하고 있을 거야. 아쉬운 일이지. 친일파 청산? 우라질, 세상 물정 모르는 몽상가들의 헛소리야. 친일하신 우리 어른들은 청산 대상이기는커녕 세상 이치를 일찌감치 깨달은 선각자들이라고. 일본이 물러나자 미국이 공산도배들을 막아주고, 우리가 지금도 미국 덕을 보는 것도 다 친일 어른들이 시대 흐름을 재빨리 읽고 친미로 변신한 덕분이야. 그분들 덕에 우리가 지금 공산화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걸 알아야지. 우리 솔직해지자고. 북한 생각만 하면 등골이 오싹하지 않나? 3대 세습에 굶주림에 고립에…. 미국이 천하의 패자가 될 걸 일찌감치 간파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이 4·19 폭거로 하야하시고, 사무라이 정신의 정수를 이어받은 ‘부국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천인공노할 김재규의 흉탄에 서거하신 것도 통탄할 일이지. 두 대통령께서 큰 꿈을 더 펼칠 기회를 가지셨다면, 지금보다 먹고살기가 훨씬 좋았을 텐데. 독립운동이니 민주화운동이니 하는 거 다 헛지랄이야. 그 작자들 명분은 그럴듯하게 내세우지만, 다 능력 없고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런 거야. 그래봤자 먹고사는 데 뭔 도움이 되나? 독립운동한답시고 만주로 갔던 사람들의 후손이 지금 서울 변두리 골목 떡공장 따위에 빌붙어 먹고사는 거 알기는 하나? 그러고 싶어? 아이들한테 바른 역사 교육을 해야 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갉아먹는 친북좌빨들의 쥐새끼 같은 행태를 더 이상 좌시해선 안 되지. 권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야. 목적이 정당하니까 절차상 하자는 눈 질끈 감자고. 결과가 중요하잖아. 당장 욕을 먹더라도 미래를 위해 큰길을 가는 거, 이게 바로 애국이지 뭐가 애국인가?”

11월8일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2009 개정 교육과정’의 중학교 새 역사교과서(2013년부터 사용) 집필 기준에 담긴 역사관의 속내를 나는 이렇게 받아들인다. 이 집필 기준은 뉴라이트 계열의 한국현대사학회와 조·중·동이 바람을 잡고, 이명박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이던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총대를 메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어이없는 내용으로 가득한데, 두 가지만 보자.
“친일파 청산 관련 내용은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아도 된다.”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 개발 공동연구진의 일원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한국현대사학회 교과서위원장)의 말이다. 무덤 속의 김구 선생이 피눈물을 쏟을 일이다.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매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벌이다 세상을 등진 김학순·박옥련 할머니 등에게 ‘위안부는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라는 후안무치한 비수를 날리는 자들이 어깨춤을 출 일이다. 1992년 1월 시작된 수요집회는 12월14일로 1000 회를 맞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집회다.
‘독재’를 역사교과서에서 빼려다 실패하자 그들이 동원한 게 “장기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라는 이상한 표현이다. 전두환의 광주 학살과 그에 맞선 5·18 민주화운동도 장기집권과 직접 관련이 없으니 역사교과서에서 가르칠 일이 없다.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국립’과 ‘민주’를 지우려는 떼쓰기가 벌어질 날도 머지않았다. 교과부가 집필 기준을 제시하며 강조한 ‘기대효과’인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올바른 역사관”의 실체가 바로 이런 거다. 오수창·이익주 교수 등 역사 교육과정과 집필 기준 개발에 참여한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직을 사퇴하고 여러 역사 관련 학회가 반대 성명을 내는데도 교과부는 오불관언이다.
샤를 드골의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들을 총살했고, 중국의 루쉰은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밖에 약이 없다”고 했다. 이 땅에서 대청소를 더 미루다간 쓰레기에 깔려 죽게 생겼다.
이제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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