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 처리 막판 타협 긴박하지만 당사자들은 논의 테이블에서 완전히 빠져
고용 형태 복잡해 쟁점도 다양… “정규직 고용이 원칙”이라는 기준 먼저 지켜야
▣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지난해 세밑 이맘때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요구하는 법안을 달리하는 여러 단체들의 각종 농성 천막이 들어섰다. 국가보안법, 비정규직법, 과거사법, 사립학교법 등 수많은 쟁점 법안들이 정기국회 처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국회 앞을 지키는 농성 천막은 몇 개 안 된다. 게다가 대부분 비정규직 법안(‘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 및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과 관련된 천막이다.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가 ‘비정규직 권리입법 쟁취’를 내걸고 세운 천막, 민주노동당이 설치한 천막, 사내하청·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친 농성 천막…. 지난 2001년부터 논의가 시작된 비정규직 법안은 지난해 말 국회 통과가 임박했으나 끝내 해를 넘겼고 올해 또다시 연내 입법화가 추진되면서 막판 타협이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다.
노동자 58%, 820만 명의 사안
비정규직 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각축이 벌어지고 있는 교섭 테이블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와 정부, 그리고 양대 노총 교섭대표들로 구성돼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 노조를 대표하는 단체는 논의 테이블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비정규직 법안 심사가 열리고 있던 12월6일 오전. 천막농성장에서 만난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오민규 집행위원장(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조)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김주환 기획국장은 전날 밤을 농성 천막의 차가운 바닥에서 새우고 까칠한 모습이었다. “지금 비정규직 법안을 비정규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이란 원칙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으로 풀려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법안의 주요 내용 중 하나인 불법 파견 철폐 투쟁을 하다 여러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결하고 분신하고, 100여 명이 해고되고 20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에 걸리고 또 감옥에 간 노동자가 15명이 넘는다.”(오 집행위원장) “비정규직 차별 시정도 중요하지만 별 실효성도 없는 그것 하나 받자고 기간제 사용사유 제한이나 불법 파견 정규직화 같은 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 법안은 82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목숨줄이 걸린 사안이다.”(김 국장)
오 집행위원장과 김 국장은 지난해부터 줄곧 비정규직 법안 논의 동향을 시시각각 전국의 비정규 노조에 알리는가 하면 성명서를 만들어 날마다 언론에 뿌리는 등 ‘비정규 노동자의 처지와 시선으로’ 법안을 바라보고 또 싸워온 사람들이다. 오 집행위원장은 “비정규직 관련 법안인데도 TV토론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위원장만 토론자로 부를 뿐 우리 비정규직 대표는 방청석의 질문자에 그치고 있다”며 “양대 노총 교섭대표가 정부·여당과 법안 교섭을 할 때 바깥 투쟁은 정규직 노조는 거의 다 빠지고 사실상 비정규 노동자들만 해왔다”고 말했다.

△ 제2의 근로기준법으로 불리는 비정규직 법안의 국회 처리가 임박했다. 민주노총이 연 비정규 권리입법 촉구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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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논의에서 막판 쟁점을 보면, 기간제 법률은 △기간제(임시직) 사용사유 제한과 사용기간 △차별에 대한 규정을 놓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또 파견법은 △불법 파견의 경우 고용의무로 규율할 것이냐 고용의제(정규직화)로 할 것이냐 △차별에 대한 규정 △파견기간 등 3가지로 압축된다. 이에 덧붙여 △사내하청은 원청·사용사업주의 책임을 인정하고 △특수고용 노동자(학습지교사·보험모집인·레미콘노동자 등)에게 노동3권을 보장할 것인지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우선 차별 해소 방식으로는 노동계가 ‘동등 유사한 기술, 작업수행 능력에 대한 동등 처우’의 명문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정부와 여당은 ‘불합리한 차별 금지’ 또는 ‘동등 유사한 기술, 작업수행 능력에 대한 차별 금지’를 제시하고 있다. ‘동등 처우’가 동일가치 노동 동일임금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차별 금지’는 권고 조항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쟁점 가이드라인 ‘사용사유 제한’
기간제의 경우 핵심 논란은 ‘사용사유 제한’이다. 기간제 노동자를 일시적·임시적인 업무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사유를 제한하는 방식은 지난 4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비정규직 입법안의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면서 논의의 한복판에 떠올랐다. 사용사유 제한은 비정규직의 입구를 제한함으로써 비정규직 확산을 제도적으로 막자는 것이다. 애초 민주노동당과 양대 노총은 단병호 의원안으로 일시적 업무 등 4가지 형태의 기간제 사용사유를 제안했으나 지난 8일 사용사유의 범위를 10가지로 확대하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환경노동위원회)은 “정규직 조직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사유 제한을 두고 싶어할 수 있지만, 비정규직을 보호하면서 입구를 차단하게 되면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거 실업자로 내몰리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며 “민주노동당이 제시한 사용사유에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고용의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도 들어 있는데, 이렇게 되면 무엇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고용이냐는 것을 놓고 현장에서 수많은 충돌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은 사유 제한 없이 2년까지 기간제 사용을 자유롭게 허용하자는 주장을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다. 오히려 “사유 제한을 도입했을 때 대량 실업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를 대보라”고 노동계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사용사유가 제한되지 않으면 대부분의 기간제 노동자는 지금처럼 2년이 되기 전에 계약이 해지되어 다른 임시직으로 대체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또 기존의 정규직 일자리까지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대체될 공산이 크고, 사용자가 2년까지 A노동자를 계약직으로 쓰고 자른 뒤에 똑같은 업무에 B라는 계약직 또는 C라는 파견직을 써도 규제할 방법이 없게 된다. 결국 1∼2년마다 상시적으로 해고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비록 ‘사용기간 2년을 경과하면 무기계약으로 간주한다’고 규정하더라도 그전에 해고한다면 아무런 보호장치도 될 수 없다. 노동계가 “사용사유 제한이 포함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비정규직 법안도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사용사유 제한’은 장래에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청년 세대한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현재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개별 노동자들의 관심은 △법안 제정 이후 내가 과연 정규직이 될 수 있는가 △임금차별을 받지 않게 되는가 △고용이 안정되는가에 쏠려 있다. 이와 관련된 쟁점이 기간제 사용기간 만료 이후 ‘고용의무’를 부과할 것인지 ‘고용의제’를 부과할 것인지 여부다. 고용의무는 사용기간이 경과한 뒤에는 해고하지 못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고, 고용의제는 사용기간이 경과하면 ‘이미 고용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규정이다. 그런데 고용의무의 경우에는 다툼이 발생했을 때 소송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 일쑤고, 사용자는 지키지 않더라도 3천만원의 과태료만 물면 된다. 또 고용의무는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이유 없이 기간 만료만을 이유로 해고할 수 없다’는 의미일 뿐이다. 반면 노동계가 요구하는 ‘고용의제’는 부당 해고로 판정될 경우 그동안 밀린 임금까지 모두 지급해야 할 의무가 발생하기 때문에 사용자들이 쉽게 해고할 수 없게 된다.

△ 12월6일 국회 앞에서 열린 비정규직 법안 집회(왼쪽). 국회 앞에 설치된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촉구 농성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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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과 임금 격차 줄면 만사 해결?
특히 비정규직 고용이 기간제·임시직·파견제·사내하청·특수고용 노동자 등 복잡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비정규직 법안도 자연히 복잡한 양상을 띤다. 여러 가지 법안 내용 중에서 기간제 노동자는 정규직으로의 고용의제를, 파견 노동자는 불법 파견 정규직화를, 사내하청 노동자는 원청·사용사업주의 책임 인정을,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노동3권 보장을 핵심 요구안으로 제 각각 내걸고 있다. 반면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사용사유 제한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자신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파견 노동자의 요구만 수용하고 특수고용 노동자의 요구는 묵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원식 의원은 “비정규직이 다양한 형태지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건 차별 시정 아니냐?”며 “차별 시정 기구를 통해 정규직과의 임금 차이를 크게 줄이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차별만 없애면 자신들이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오민규 집행위원장은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3권과 기간제 사용사유 제한 등은 서로 주고받고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기존의 차별을 시정해줄 테니 정규직화 투쟁을 중단하고 만년 비정규직으로 체념하고 살라는 것이냐?”고 말했다.
실제로 일터에서의 비정규 노동자 차별은 차별시정기구가 존재해도 다양한 형태로 계속 나타날 수 있고, 차별을 시정하는 데도 기나긴 소송 싸움 등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 노조 쪽은 차별 구제 못지않게 비정규직 ‘권리 보장’이 법안에 명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기본권을 바탕으로 조직화해서 권리를 주장하고 싸울 수 있어야만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차별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정규직 법안을 놓고 여러 쟁점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근본적인 논란은 839만 명에 달할 정도로 이미 대량 확산된 비정규직의 현실을 인정하고 비정규직 법안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이 현상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고 법안을 설계할 것인지 여부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김성희 소장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대세 위에서 비정규직 남용과 비합리적 차별을 시정한다는 것은 빈말에 불과하다”며 “비정규직은 예외적인 선택이고 정규직 고용이 노동시장의 일반 원칙이고, 고용 형태에 의한 어떤 차별도 용인돼서는 안 된다는 기준이 지켜져야 제대로 된 비정규직 법안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여당의 비정규직 법안이 오히려 대다수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고착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왜 경총은 조용한가
지난 8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839만4천 명으로 1년 전에 비해 26만5천 명이 증가했다. 특히 기간제 고용은 254만9천 명으로 전년 대비 73만 명이나 급증했다. 이에 대해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정부가 기간제 고용을 현행 1년에서 3년까지 더 늘리는 비정규직 법안을 지난해에 제출하자 사용자들이 기존 임시직을 고용 기간이 명확하게 설정된 기간제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며 “이런 기간제 고용 증가는 비정규직의 고착화 현상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건 막판 법안 처리 국면에서 경총 등 사용자 쪽이 뜻밖에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이 58%에 이를 정도로 ‘이미 저질러진 일’이고 비정규직 법안은 이렇게 저질러진 일을 단지 ‘제도화’하는 것이라서 그런 것일까? 김주환 국장은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힘은 재계다. 대다수 파견 노동자를 쓰고 있는 사업장을 봐도 굵직한 자동차 대공장들이고, 특수고용 노동자의 경우 학습지 회사나 보험사도 거대 기업이 틀어쥐고 있지 않은가?”라며 “노동계만이 아니라 국민경제를 고려해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부·여당의 말 뒤편에는 비정규직 유지·확산을 요구하는 대기업들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