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노무현 대통령을 상대로 ‘국가 정체성 논란’을 촉발했던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과 여권의 조직적인 반격 앞에 고민스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이 지난 7월3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비전향 장기수 민주화운동 기여 판정 논란에 대해 ‘과거사에 대한 포괄적 진상 규명 권한 부여’라는 초강경 카드로 일격을 가하자 대응 수위를 놓고 논쟁 주도세력들 내부에서 이견이 속출하는 등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김덕룡 원내대표와 이정현 부대변인 등 당의 공식라인에는 여전히 강경론이 득세하고 있다. 김 대표는 노 대통령 발언 직후 기자회견을 자청해 “오기정치 선동정치의 극치”라며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나 법제사법위원회 차원의 의문사위 조사, 청문회나 국정조사 등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이정현 부대변인도 “노 대통령이 직속기관을 남발해 국정을 사조직 운영하듯 한다”고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노 대통령의 헌법 수호 원칙을 의심하고 있다”며 논쟁을 주도했던 박 대표는 명확한 태도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박 대표는 한 측근 의원을 통해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고 밝혔을 뿐이다. 강경론을 주창하는 김덕룡 원내대표도 “박 대표와 상의한 것은 아니다”며 당 차원의 최종 판단이 아니라는 여운을 남겼다.
왜 이런 혼란스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까. 박 대표와 가까운 부산지역 한 의원은 “박 대표가 정체성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정치 전략적 차원보다는 안보 문제 등에서 국가의 중심인 정체성이 자꾸 흔들리면서 경제 분야로 문제가 파급되는 게 아니냐는 국민적 우려를 대신한 것”이라며 “정수장학회 문제와 유신 논쟁이 터지면서 정체성 논쟁의 본질이 완전히 변질됐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지금처럼 국가경영 기조에 대한 논쟁이 아닌 박 대표 개인에 대한 흠집내기 차원의 논쟁을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국면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덧붙였다.
박 대표가 주도한 정체성 공방이 초반에는 지지층 결속, 박 대표의 강단과 애국주의적 모습 부각 등으로 재미를 봤지만, 노 대통령의 ‘유신 대 반유신’ 대결 발언 이후 오히려 부메랑이 됐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최근 “박 대표는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주며 민생 행보에 주력하고, 정체성 논쟁은 당 차원의 기구 등을 통해 제기했어야 하는데, 박 대표가 너무 전면에서 깊숙이 개입했다”는 반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정체성 논쟁을 적극 옹호했던 남경필, 박형준 의원 등 일부 소장파들마저 논쟁 과정에서 파생된 정수장학회 문제 등을 털고 가야 한다는 의견을 내면서, 박 대표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하는 등 복잡한 양상이다.
한 소장파 의원은 “박 대표 스스로 정체성 논쟁에서 정당성을 획득하고 국민을 설득하려면, 이제 자기 문제에 대해 털어내는 깨끗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다면, 현재의 논란은 빨리 매듭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나라당 전체가 정체성 논쟁을 이어갈 만한 실익이나 명분도 없지만, 퇴로를 찾기도 어려운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