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특집 > 초점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4년06월09일 제513호
주역들이여, 제 구실을 찾아라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열린우리당의 6·5 재보선 패배 원인이 다기다양하게 거론된다. 김혁규 카드 강행에서 총선 뒤 여권 내부 논공행상, 청와대 음주가무 만찬,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공약 철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권의 정치 주역들은 이에 앞서 ‘제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좀더 근본적 문제점들을 드러내온 것으로 지적된다.


△ 노무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씨와 함께 5월29일 열린 열린우리당 17대 총선 당선자 및 중앙위원들과의 만찬장에 들어오고 있다.(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이와 관련해선 노무현 대통령의 ‘억울해요 정치’를 첫 번째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6월4일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당-청 협의에서 “(재보선 후보) 공천에 의견조차 내지 않았는데… 사실 공천에 의견도 말 못하는데도 심판은 내가 받는 게 억울해요”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 “예를 들면 부산, 경남에서 득표율이 높으면 그건 심판을 어떻게 읽어야 하죠. 우리가 이기면 심판은 누가 받는 거요. 대통령 심판 안 받게 잘 좀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말은 당-정 분리에 따라 대통령이 선거를 진두지휘하는 것도 아닌데 대통령에게 선거 패배의 책임이 돌아오는 점을 못마땅해하는 것으로 읽혔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재보선을 앞두고 김혁규 전 경남지사의 총리 지명 가능성을 일찍부터 띄움으로써 사실상 선거에 깊이 간여한 상태였다. 즉, 자신의 행보가 몰고 온 파장 때문에 크게 억울할 게 없음에도 억울함을 주장하는 기이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움직임도 총선 민의에 따른 ‘새 정치’ 요구에 미치지 못했다. 의원들은 국회 개원 이전부터 ‘초선 모임’ ‘새로운 생각’(386세대 중심) 등의 선수별 또는 세대별 조직을 잇달아 결성하고 있다. 심지어 참여정부 1년차 청와대 참모와 고위 관료 출신들이 참여하는 속칭 ‘직계 모임’까지 추진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수별, 세대별 모임은 16대 시절 민주당에서 활발했다. 재선 중심의 ‘바른정치모임’(정동영 신기남 천정배 등), 초선 중심의 ‘새벽21’(정범구 박인상 등)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선수별 모임은 정책과제 연구보다는 정풍운동과 같은 당내 권력투쟁의 틀로 좀더 유용하게 기능했던 게 사실이다.

선수별, 세대별 모임이 활발히 결성되는 최근의 흐름은 17대 국회에 들어와서도 정책경쟁보다는 당내 권력게임의 정치가 또다시 득세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실제로 민족정기연구모임(회장 김희선)처럼 순수 정책연구 성격의 모임들은 회원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재보선 패배 직후 조기 전당대회론이 서슴없이 거론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당대회 판을 열면 또다시 정책 현안은 미뤄지고 ‘그들만의’ 권력게임이 펼쳐지기 십상이다.

신기남 의장을 비롯한 여당 지도부도 ‘제 구실’에 서툴렀다. 신 의장은 노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참석하는 당-청 협의 정례화’를 거듭 요구했다가, “정례화보다는 필요할 때 격식을 가릴 것 없이 언제든지…”라는 답변을 들었다. 대통령과 여당 의장간 대화는 사실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여당 지도부가 정례화를 굳이 요구하는 행보에선, 대통령과의 만남을 당내 권위 확보의 원천으로 여기는 듯한 구시대 코드가 읽혔다.

과거 경험칙으로 볼 때 청와대와 여당은 당분간 선거 패배 책임을 둘러싸고 일대 논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각 정치 주역들의 ‘제 구실 찾기’가 이뤄지지 않는 한, 논쟁을 통해 유용한 활로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