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독자적으로 사내이사 및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하면서, 최태원 회장의 경영권을 빼앗겠다고 나섰던 SK(주)의 2대주주 소버린이 지난 3월12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표대결 끝에 완패했다.

앞으로 밀려들 거대한 파도의 시작

이날 주주총회에는 SK(주) 이사회와 소버린쪽에서 제안한 15건의 안건이 올라와 표대결이 벌어졌지만, 소버린의 제안은 모두 부결되고 회사쪽 추천 이사들의 선임안만 통과됐다. 이로써 소버린이 SK(주)의 주식 14.99%를 확보하면서 시작된 최태원 회장쪽의 경영권 박탈 위기는 수습됐다.

△ 지난 3월12일 열린 주식회사 SK 정기 주주총회에서 최태원 회장쪽과 2대주주인 소버린쪽이 표대결을 벌였으나 당초 예상과 달리 SK의 일방적인 우세로 끝났다.(강재훈 기자)

주주총회에서 SK(주)는 신헌철 SK가스 부사장을 사내이사로, 서윤석 이화여대 경영대학장, 조순 전 부총리, 오세종 전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 김태유 전 대통령비서실 정보과학기술보좌관, 남대우 전 가스공사 사외이사 등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주주들은 소버린이 추천한 이사 후보에 대해서는 SK쪽이 공동 추천한 남대우씨를 제외한 4명의 선임안을 부결시켰다. 팽팽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표 차이도 비교적 컸다. SK쪽 후보들은 60% 가까운 찬성표를 얻었으나, 소버린쪽은 40%대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소버린쪽은 자체 지분에 템플턴자산운용, 헤르메스 등 우호지분을 포함해 실제 외국인 지분 22% 중 20%를 확보했으나 국내법인 및 소액주주들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한 것으로 분석된다.

소버린이 경영권 확보를 전면에 내걸고 최대주주와 격돌하면서,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겠다는 소버린의 애초 선언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소버린은 주총에 집중투표제와 서면·전자투표제 도입 등을, SK쪽은 투명경영위원회 신설과 사외이사로만 구성된 감사위원회 설치 등을 담은 정관개정안을 각각 냈다. 그러나 어느 쪽도 개정안 통과에 필요한 3분의 2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는 주가상승을 위해 ‘갈등의 장기화’를 노리는 소버린쪽의 의도가 관철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주총이 열리기 전 “빅쇼를 위해서는 내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소버린에 이어 다른 외국인 주주들의 재벌 총수 흔들기가 시작되고 있다. SK주총에 참석한 소버린쪽 관계자들.(강재훈 기자)

그러나 이번 사태는 국내 재벌기업의 취약한 경영권을 외국인 투자자들이 얼마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앞으로 밀려들 거대한 파도의 시작이라는 분석이 많다. 지금껏 국내 재벌총수들은 적은 지분으로 많은 계열사의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한두 계열사에 대해서만 본인 지분을 갖고, 나머지는 거의 계열사들의 순환출자에 의존해왔다. 그런 상황에서, 외국인들이 핵심 계열사의 지분을 일부 사들여 경영 개입에 나서더라도, 재벌들은 그들의 요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최소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최대주주의 경영권에 간섭하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주가를 끌어올려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다.

크레스트 시큐러티라는 자회사를 통해 소버린이 SK(주)의 주식을 사들인 것은 지난해 3월 하순이었다. 소버린이 사들인 주식은 1902만여주로, 평균 매수단가는 9300원가량이다. 소버린이 이번 주총에서 경영권을 장악하지는 못했으나, 소버린의 ‘투자’는 현재까지 대성공이다. 3월14일 현재 SK(주)의 주가는 3만8750원에 이른다. 최태원 회장쪽은 소버린이 경영권을 장악해 SK(주)가 보유한 SK텔레콤 지분을 팔아치우는 사태를 가장 우려한다. 그렇게 되면 SK(주)의 주가는 오르겠지만, SK텔레콤에 대한 경영권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영국계 헤르메스, 삼성물산을 노린다

SK(주)에 대한 외국인 지분은 계속 늘고 있다. 이번 주총에서 보듯 외국인들은 소버린을 지지한다. 이에 대응하려면 최태원 회장쪽은 주식을 추가 매입해야 하지만, 그럴 현금 여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최악의 경우 SK는 소버린이 보유한 주식을 고스란히 사줘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기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총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최근 헤르메스는 삼성물산의 주식을 5% 보유했다고 신고함으로써, 소버린이 시작한 외국인들의 재벌 흔들기가 앞으로 계속될 것임을 보여줬다. 영국계 연기금펀드 운용사인 헤르메스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는 지난 3월6일 삼성물산 주식 777만2천주(5%)를 사들였다고 공시했다. 헤르메스는 그 전에도 삼성물산 주식을 갖고 있었으나, 지분을 추가 매입했음을 시장에 알리고 싶어한 흔적이 역력했다. 지분율을 딱 5%에 맞춰, 공시 요건을 갖춘 것이다. 헤르메스의 삼성물산 주식 매수는 단순히 시세차익을 노린 것일까?

헤르메스는 공시 이후 며칠 만에 삼성물산에 컨퍼런스 콜(전화면담)을 통해 대주주로서 요구를 하고 나섰다. 이는 이번 주식매수가 재벌의 약점을 노려 이익을 보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삼성물산은 5% 이상 주식을 보유한 주주가 없다. 지난해 3분기 말을 기준으로 보면, 최대주주인 삼성SDI가 4.52%를 갖고 있고, 이건희 회장이 1.38%를 갖고 있다. 자사주펀드까지 포함해도 내부지분율은 8.17%에 불과하다. 여기에다 삼성생명이 4.67%를 갖고 있다. 한 분석가는 “건설업종의 특성은 부정비리에 연루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라며 “따라서 오너인 이건희 회장 일가가 경영에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는 점을 외국인들이 노리기 쉽다”고 말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적은 지분으로 이사회를 흔들면서 실속을 차리기 쉬운 구조라는 것이다.

SK텔레콤의 최대주주인 SK처럼 삼성물산도 삼성전자의 주식을 대거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외국인들에게는 유혹이 된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3.82%(591만주)를 갖고 있는데, 이는 시장가치로 3조1540억원어치에 이른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주식을 3469원에 샀기 때문에 평가차익만 2조8070억원에 달한다. 헤르메스는 컨퍼런스콜을 통해 삼성물산에 크게 4가지 뜻을 전달했다. 자본구조 효율화 측면에서 불합리한 우선주를 매입·소각할 의향이 없는지, 삼성 계열사로부터 삼성 브랜드 가치를 지불받을 의향이 없는지, 그리고 기업 지배구조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나머지 한 가지는 바로 삼성전자 지분 매각 문제다. 회사 빚이 많은데, 삼성전자 주식을 투자 차원 이상으로 그렇게 많이 갖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 매각할 의향이 없느냐는 것이다.

삼성물산 다음엔 누구?

헤르메스는 이번 컨퍼런스콜이 단순히 삼성물산의 뜻을 물은 것일 뿐이라고 한다. 헤르메스쪽 관계자는 “우리가 단일주주 기준 최대주주가 됐으니 주주로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얘기하고 삼성물산의 뜻을 물은 것이다. 삼성물산에 언제까지 시한을 정해 답변을 요청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일단 질문을 던지고 이들 사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체크를 하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헤르메스의 주식매입이 삼성의 약점을 공략해 단순한 시세차익 이상의 것을 얻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증권업계는 삼성물산이 제2의 SK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분석한다. 이건희 회장이나 삼성그룹은 SK와 달리 현금동원 능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물산이 총수의 경영권 안정을 위해 큰 이득이 되지 않는 수조원어치의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약점은 헤르메스가 주식을 되팔기 전에는 언제든 건드릴 수 있는 호재로 남아 있다.

삼성물산 다음엔 누구 차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