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터진 대형 테러가 유럽 전역을 긴장 속에 몰아넣고 있다.

△ 스페인 총선거를 사흘 앞둔 지난 3월11일 마드리드 기차역에서 발생한 동시다발 테러로 1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GAMMA)

3월12일 오전 7시39분에서 42분 사이 동일 노선(교외열차 1번선)을 달리던 열차를 겨냥해 장치된 13개의 폭발물 가운데 10개가 세 군데의 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이로 인해 200여명의 사망자와 1400여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스페인 전국은 3일간 공식적인 국상을 치렀다. 테러 당일 ‘스페인의 9·11’이라는 보도로 한탄과 분노를 터뜨렸던 스페인의 주요 언론들은 다음날 ‘11-M’, 즉 3월11일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붙여 테러의 참상과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을 전했다. 하루에 21만6천여명의 승객을 실어 나르는 마드리드 1번선 교외열차는 7칸의 객차로 이루어졌고, 바쁜 출퇴근 시간에는 객차마다 100여명의 승객이 타고 내린다. 평일 스페인의 수도, 그것도 일반 시민이 출근길에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외열차와 역을 겨냥한 끔찍한 테러였다. 기술적으로 적어도 8~9명이 동시에 참여해야 하는 난해한 테러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렇듯 많은 희생자를 낳은 치밀한 테러를 저지른 주범은 과연 누구일까. 테러 발생 당일인 3월11일 스페인 당국이나 유럽의 테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분리주의자들인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조직원의 소행이라는 설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다 당일 오후 테러 발생 지역 부근에서 7개의 폭발물 뇌관과 코란의 구절을 담은 카세트를 실은 트럭이 발견되었고, 런던 주재 한 아랍권 신문사에 정확한 출처는 알려지지 않은 채 알카에다의 이름으로 ‘테러 인정 발언설’이 도착되었다는 소식이 나돌면서 3월12일부터는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보는 분석이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바스크 분리주의자 지목

이미 저질러진 테러지만 ETA냐 아니면 알카에다의 소행이냐에 따라 국제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내무부 장관 아체베스는 기자회견에서 ETA를 지목했다. ETA가 저지른 테러라면 스페인에선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벌써 30년 넘게 일어났다. ETA는 1959년 독재자 프랑코 정권 시절(1936~75)에 독재에 저항하며 스페인 북쪽 바스크 지방에서 마르크시즘을 표방하는 젊은이들이 ‘바스크 조국과 자유’를 외치며 만든 일종의 바스크 독립운동 조직이다.

ETA는 반세기의 생존 역사 중 36년간을 스페인 곳곳에서 테러를 저질러온 집단을 일컫기도 한다. 65년 동안 85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200여명의 ETA 멤버들이 숨지면서, 스페인 정부를 대상으로 바스크의 독립을 주창하며 전쟁을 해온 터다. 스페인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가 암살 표적이 되기도 했고, 지금의 총리인 아스나르도 취임 직전인 1995년 암살을 당할 뻔했다. 정치적인 운동인 만큼 조직의 건설 초기부터 정치범 암살에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1987년 바르셀로나의 한 슈퍼마켓에서 저지른 테러로 21명의 무고한 사망자를 낸 적도 있어 그야말로 예측이 불가능한 테러집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는 이번 사태를 바스크의 소행으로 몰아붙였으나, ETA는 자신들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GAMMA)

ETA는 아스나르가 정권을 잡은 뒤 1998년 가을 정부와 휴전협정을 맺기도 했으나 14개월 뒤인 1999년 12월 협정을 파기하면서 위협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2001년 9·11 테러 이후 서방 세계에 울려 퍼진 반테러리즘의 메아리는 스페인 정부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고, 행정부의 수반이자 총리인 아스나르는 ETA 진압을 위해 여러 가지 강경책들을 실행했다.

행정부는 2002년 6월 ‘테러집단과 연계가 있는 당은 정치활동을 못하게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바스크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정계활동 및 지역정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던 바스크 독립당 ‘바타수나’(batasuna)를 ETA와의 내연관계를 들먹이며 정치활동을 정지시켰다. 또 2003년에는 바스크 지역 일간지 를 폐간시켰다. 아스나르 정부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테러리즘 박멸을 명분으로 바스크 독립주의자들을 구석으로 몰아왔다. 이런 강경책에 힘입어 아스나르의 8년 연임기간 중에는 ETA의 쇠락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 테러는 ETA가 곤경에서 벗어나려는 최악의 발악이라는 분석도 있다.

스페인의 이라크침공에 대한 복수?

그러나 200여명의 많은 사망자를 내면서 스페인 전역에서 국민들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게 과연 ETA의 부활에 도움이 될까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자살 행위와 다름없다는 분석이다. ETA의 한 관계자는 3월12일 전화로 그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밝혔다. 테러 때마다 사전예고나 사후인정을 해왔던 ETA의 관례를 감안하면 테러 바로 다음날 그들이 범행을 부인한 것은 처음이라고 알려졌다. ETA의 테러 관여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의 하나다.

△ 3월11일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바스크 분리주의 무장단체 ETA에 반대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GAMMA)

그렇다면 알카에다가 이번 테러에 연루된 걸까. 폭탄물의 동시다발성과 일정한 표적 없이 무고한 시민을 겨냥했다는 점, 그리고 난해한 기술성에 초점을 맞춰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가 부각되고 있다. 유로폴과 인터폴의 수사 방향도 알카에다를 겨누고 있다. 이번 테러가 알카에다의 소행이라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과연 알카에다는 스페인에 어떤 원한을 갖고 있는 걸까. 이라크 전쟁 직전 국민 절대다수의 거센 반전 물결에도 불구하고 아스나르 정부는 처음부터 미-영 이라크 침공에 적극 가담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와 독일과는 달리 영국·이탈리아·폴란드와 함께 미국과 긴밀한 협력으로 새로운 유럽을 이끌 주역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따라서 유럽에서 알카에다의 표적으로 영국과 스페인이 포함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미국과 스페인에 테러가 발생한 9월11일과 3월11일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짜인 11일에 일어났다는 점과, 2001년 9월11일 테러로부터 ‘911일’이 지난 날이 2004년 3월11일이었다는 점까지 겹쳐져 알카에다의 소행이라는 견해도 크게 부각되고 있다. 테러 기술과 테러 당일 폭파되지 않은 폭발물들을 살펴본 결과 ETA와 알카에다의 전적을 섞어놓은 듯하여 두 테러집단의 공동작품일지 모른다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문화, 언어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다르고 테러 목적 또한 상이한 두 집단이 공모했을 리 없다는 전문가들의 의혹도 적지 않다.

3월14일 총선을 앞둔 시점에 발생한 테러는 스페인 정치의 향방과도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다. 만일 ETA의 소행이라면 반테러를 적극 추진해온 현 우파 총리 아스나르의 당이자 집권여당인 국민당(PP)이 압도적인 표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국민당은 테러 직전 여러 여론 조사에서 좌익 사회당을 훨씬 앞서 있기도 했다.

유럽공격 암시하는 첫신호일까

반면 알카에다의 소행이라면 오히려 국민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친미 노선을 밟고 이라크 전쟁에 가담했던 아스나르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할 판이다. 스페인이나 서구 언론들이 점차 알카에다 테러설을 제기하고 있으나, 스페인 정부가 서둘러 테러 발생 첫날 ETA의 소행으로 발표하고 이튿날부터는 아직 주범의 신분을 알아낼 만한 정확한 증거가 없다고 일관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스페인 정부가 투표가 끝날 때까지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유럽 입장에서도 테러의 진범이 ETA냐 아니면 알카에다냐에 따라 심각한 파문에 맞닥뜨릴 수 있다. ETA로 밝혀질 경우 궁극적으로 스페인의 내부 문제로 귀결되지만, 알카에다의 소행이라면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대형 테러의 첫 유럽 진출이고 또 다른 테러의 위험을 예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 각국의 향후 정치는 물론이고 오는 6월의 유럽의원 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