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데스리가보다 치열한 전투축구의 산실… 이젠 생각하는 축구로 더듭나야

많은 나라들에서 축구클럽은 그 나라 축구의 모태이자 요람이다. 한국 축구에도 요람이라고 할 만한 곳이 있을까? 있다면 그곳은 클럽도 학교도 조기축구회도 아니고, 바로 군대가 아닐까. 엄청난 규모의 공식·비공식 선수들을 배출했고, 오늘도 70만명의 젊은이들이 가담하고 있는 그들만의 리그,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사시사철 개막하는 격전의 무대, 분데스리가보다 백배는 치열한 저 ‘군대스리가’ 말이다.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군대란 되돌이키기 싫은 심정과 허풍 섞어 떠벌리고 싶은 욕망이 병존하는 대상이다. 대개의 한국 남자들은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심리 사이에서 분열을 겪는다(두 심리의 뿌리는 실은 하나인지 모른다. 상처를 자가치유하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만난다).

겸손의 미덕과 가혹한 책벌

그렇듯이 군대축구에도 빛과 그늘이 있다. 한편으로 군대에서 축구하기란 모든 권리가 유보된 곳에서 제 몸을 마음대로 놀릴 자유를 잠깐이나마 반납받는 경험이다. 그 자유가 그토록 달지 않다면 (아무리 쵸코파이나 닭발 같은 전리품이 기다린다 해도) 제복의 청년들이 몰아의 경지에서 뛰어다니는 풍경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몸의 정직성을 배운다. 우리 몸의 요구와 한계에 순응하는 법,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원리를 깨닫는다. 그 협력의 끝에서 그들이 차지한 닭발 한 봉지는 순수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닭발의 순수 맞은편에는 우리 군대의 오랜 관습이 축구에 드리운 짙은 그늘이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는 승리주의, 결정적인 골 찬스가 나더라도 저만치 처진 고참이나 간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겸손의 미덕, 시합에 질 경우 이유를 묻지 않고 내려지는 책벌 따위가 그 관습들이다. 이것들이 오늘의 병영에서도 신성하게 지켜지는지 나는 모른다. 하여튼 합리성과 거리가 먼 이 관습들은 오랫동안 우리의 군대축구를 다스려온 율법이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자장 안에 있는 한, 한국축구는 비록 민간인의 옷을 입었을망정 어디까지나 군대축구의 연장이었다.

실제로 지난날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민간인 신분인데도 군대나 준군사조직 소속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는지. 예를 들면 1950년대에 이름을 날린 최정민 선수는 김창룡 휘하의 군 특무대 소속이었고, 60년대 말 이회택·이세연·박이천·김정남 등은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는 양지팀에서 뛴 역사가 있다. 축구팀이 정보기관 소속이라는 기묘한 사태의 배경은 단순하다. 월드컵 8강까지 오른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였다. 축구는 전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주목할 만한 승전보는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하다. 축구는 전투적인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 참여하는 상무에 거는 기대

축구를 전투로 여기는 관점은 지금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 남다른 성취를 바란다면 선수들을 가혹하게 ‘굴려야’ 한다는 주장도 여지껏 만만찮다. 박종환 감독이 혹독한 훈련으로 청소년대표팀을 세계 4강에 올려놓은 일, 또 그가 서울시청 선수들을 특전사에 입소시켜 전국대회 우승을 따낸 사례가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공 사례들은 무수한 반증 앞에 대단히 허약하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오늘 한국 축구가 얻은 결론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본에 충실한 축구, 창의적이고 생각하는 축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행로는 과거 군대축구의 잘못된 관습과 결별하는 일을 포함한다. 결별이 뜻하는 바는 ‘군대스리가’의 몰락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축구를 통해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알고 수단과 방법을 슬기롭게 가릴 능력이 있는 청년들을 길러낼 또 다른 계기가 주어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를 위해서나 군대 자신을 위해서나 이로운 일일 것이다. 군 축구팀인 상무가 프로리그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최근의 소식을 들으며 떠오른 생각이다.

손경목/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