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로 근거지 옮긴 고려인 3세 강발레리씨… 농사짓기 · 한국어 배우기로 ‘진짜 터전’ 꿈꾼다
미하일로프카= 글 · 사진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옛 소련 공산주의 시절이 그리워요.”
강발레리(45)씨, 그는 “요즘 생활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숨부터 길게 내쉰다. “많이 힘들어요. 오히려 공산주의 때가 나았던 것 같아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에 다소 놀랐다. 공산주의 하면 이제 지긋지긋해 치를 떨 줄 알았으나 그는 스스럼없이 당시가 나았다고 말한다. 실제 주변 고려인들을 둘러보니 공산주의 향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가난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시절에는 직장을 못 구해 걱정하는 일도 없었고, 무료로 교육이나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너무 달라졌어요. 아이들 학비와 의료비조차 마련 못해 벌벌 떨 때가 많지요.” 그랬다. 연해주 고려인들의 삶은 참으로 고단해 보였다. 아이 셋을 키우는 발레리씨는 변변한 돈벌이가 없어 아이들을 맘껏 먹이고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프다.
중앙아시아 배타 정책에 또다시 대이동
발레리씨는 러시아 고려인 3세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났다. 조부모와 부모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한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중앙아시아 고려인 후손들은 얼마 전 또 한 차례 대이동을 해야 했다.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나라들은 고려인에게 러시아어가 아닌 국어만 쓰기를 강요하는 매우 배타적인 소수민족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말이 안 통해 직장을 얻을 수 없었던 3세대 고려인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등지고 조상들의 고향인 연해주로 떠나야 했다. 이렇게 중앙아시아 나라들의 소수민족 박해를 피해 연해주로 돌아온 이들만도 4만~5만명에 이른다. “빈손으로 무작정 떠나왔지요. 그저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여기로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어차피 그곳(카자흐스탄)에서 더는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요.” 그는 조상들의 터전이었던 연해주로 건너오기 위해 거의 일년 동안 번 돈을 모아 간신히 비행기표를 살 수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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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로프카에 있는 ‘고려인 우정마을’의 전경.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30여 가구의 고려인들이 오손도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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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적어도 마음 편히 몸을 누일 보금자리는 걱정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9월 한국의 주택건설사업협회 등은 연해주에 흩어져 힘겹게 생계를 유지하는 고려인들의 정착촌을 마련해주기 위해 1차로 38세대가 입주할 수 있는 25평형 한옥 건물을 지어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북쪽으로 120km 떨어진 농촌마을 미하일로프카군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인 우정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발레리씨는 자신의 집을 지어준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처음 연해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게 어려웠지만, 그나마 집이 있어 다행이었어요. 그저 한국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게 과제다. 발레리씨는 처음 우정마을에 입주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일반 직장을 다닌 터라 농사일은 생소했다.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손발이 불어터지도록 논밭을 갈고, 씨앗을 심었다. 우정마을이 들어선 곳은 원래 러시아 군대가 사용하던 비행장 터였다. 엘친 전 대통령은 1937년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스탈린 정책은 잘못된 것이라며 연해주로 되돌아오는 고려인들을 위해 군대가 철수한 지역을 영구적으로 무상 임대하는 조처를 취했다. 하지만 군대가 오랫동안 사용하다 떠난 자리는 농사를 짓기에 그리 좋은 땅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농사에 가장 중요한 변변한 관개수로조차 정비되어 있지 않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그저 하늘의 처분에 모든 걸 맡기는 원시적인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여기 와서 한 2년 농사를 지었는데, 수확을 거의 거둘 수가 없었어요. 한 해는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논밭이 다 떠내려갔고, 한번은 너무 추워 작물이 다 얼어버렸어요. 그저 허탈할 뿐이지요.”
그는 이제서야 관개수로를 만들기 위해 맨삽으로 거친 땅을 파고 있었다. 농사에만 생계를 기댈 수가 없어 요즘은 석탄으로 벽돌을 찍어 시장에 팔기도 한다. 부인은 회계사 출신이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그나마 안정된 직장을 보장할 수 있는 자격증이다. 하지만 연해주로 옮겨온 뒤로는 일자리를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러시아에서는 40살이 넘으면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단다.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집에서 국수를 만들어 인근 중국 시장에 내다 판다. 그렇다고 딱히 안정된 납품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장을 오가면서 손님의 소매를 끌어 국수를 판다.
한국 시민단체 도움받아 ‘문화센터’ 세워
발레리씨는 그래도 농사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오래 전에 강제 이주당한 조상들은 연해주의 농업을 부흥시킨 장본인들이다. 지금도 러시아 극동 당국이 고려인들에게 가장 기대하고 있는 지역개발 분야가 농사이기도 하다. 발레리씨는 이곳 농사의 성패는 관개수로를 탄탄하게 정비하는 것도 과제지만, 기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사계절 내내 각종 농업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비밀하우스 확보에 달렸다고 믿고 있다.
그는 연해주에 와서 비로소 한국말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거주 고려인 동포 1세는 거의가 우리말을 알고 있으나 2~3세로 가면 대강 알아듣는 수준이 30%이며, 초·중등학교와 대학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10~20대의 4세들은 10% 수준만 어느 정도 한국어를 쓰는 것으로 알려진다. 발레리씨는 아직 한국 사람과 자유자재로 의사를 소통하는 데 버거워한다. 이제 갓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말을 꼭 배워야 한다고 인식한 지 오래다. 그만큼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이 커진 탓도 있지만 능숙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고려인은 취직의 기회도 넓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세 자식의 한국어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쏟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가 않다. 가까운 곳에는 한국어를 배울 만한 곳도 없는데다, 가르칠 선생도 없다. “약 2년 전에 한국의 한 종교단체 성직자들이 찾아와서 얼마간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어 큰 보탬이 되었으나 그들이 곧 떠나버리는 바람에 좋다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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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리스크 ‘카레이스키돔’(한국의 집)에 있는 한글 교실. 고려인과 일부 러시아인을 포함해 10여명이 한글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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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곧 들어설 우정마을 생활공동체인 ‘문화센터’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한민족살리기 프로젝트인 ‘연해주 물결운동’을 일으키는 국내 시민단체인 동북아평화연대(공동대표 도재영)가 거들고 있다. 이 문화센터는 장차 부당한 강제이주로 잃어버린 언어, 학교, 문화를 원상 복원하는 일은 물론 정착 지원의 거점으로 쓰일 전망이다. 책임자 격인 동북아평화연대의 김현동 사무국장은 아예 가족까지 데리고 이곳에 2~3년 눌러살면서 고려인들을 도울 자세다. 올 여름에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대학생 농활팀도 합류한다. 세계청년봉사단원으로 와 있는 대학생 송상윤씨는 “7월11일부터 한달간 이곳에서 고려인들과 함께 지내며 낮에는 고려인들의 농사를 돕고 수로도 함께 파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줄 수 있는 대학생들을 모으고 있다”며 “동포인 고려인들의 삶과 러시아 연해주를 이해하는 데 다시 없는 기회인 만큼 진취적인 학생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러시아 소수민족으로 당당히 살고파”
올해는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맞는 해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그 긴 모진 세월을 그렇게 지내왔듯이 아직도 여전히 유랑 중이라는 느낌이 든다. “당장은 고려인들을 연해주로 많이 모아야 한다. 그러려면 이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해야 한다. 처음 이곳에 오면 경제·법률적으로 부닥칠 어려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는 러시아 소수민족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당당한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고려인 사회가 발전하면 덩달아 한국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현지 고려인 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강니콜라이(70) 동북아평화연대 우수리스크 사무장의 말은 길게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