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는 계속 좋아지는데, 왜 끔찍한 죽음은 계속되는가
이제 외부에서 병역제도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해야 할 때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2년 가을 내가 사병 월급 문제를 처음 제기할 때 표지이야기의 제목이 ‘대한민국 사병은 거지인가’였다. 그리고 2005년 2월에 논산훈련사 인분 사건으로 ‘대한민국 사병은 똥개인가’라는 글을 쓰게 되었으니 스스로도 참 한심했다. 이제 귀중한 생명 여덟을 앗아간 총기 사건이 터졌으니 또 어떤 제목으로 글을 써야 한단 말인가? 참담하기 짝이 없다.
언론에서는 저마다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내놓기에 분주‘했’다. (과거형! 며칠이 지났다고 벌써 잠잠해지는 기운이다.) 다들 나름대로 일리 있는 이야기지만, 나는 총기 사건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가혹행위 금지, 사병 인권 존중, 병영문화 개선 등등 길게는 지난 몇년간, 짧게는 인분 사건 이후 솔직히 군이 안 해본 게 있는가?
해마다 사망자, 어떻게 더 줄일까
언론에 거론되는 웬만한 대책은 다 나왔던 이야기들이다. 남은 것은 딱 하나, 진짜 군의 구조 개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구조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 다 해보았다는 것, 언론에 남발되는 ‘특단의 조치’ 정도가 아니라 정말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이런 사고를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런 마음을 먹지 않으면 우리는 평온한 일요일 오전 우리에게 충격을 준 그런 비극적인 사건을 피해갈 수 없다. 대책이 없다는 것,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우리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젊은 목숨들이 저렇게 스러지는 것을 또 보고 싶지 않다면….

△ 과연 우리 군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김 일병이라는 정신이상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김 일병의 동료들이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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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누구보다도 군에 대해 쓴소리를 많이 해왔다. 그리고 한국의 군이 여전히 엄청나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군을 비판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지만 그동안 사병 인권 개선과 관련해 군이 거둔 성과를 가벼이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군의 개혁 문제는 군 안에서 해야 할 일보다 군대 바깥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믿음 때문이다.
인권 개선과 관련해 군이 거둔 성과라니? 군은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 아닌가? 그렇다. 군은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지만, 지난 10년 사이에 군에서 불행하게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수는 ‘경이적’으로 줄어들었다. 1980년부터 1995년 5월까지 15년여 동안 군대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의 수는 무려 8951명이다. 이 기간에 우리가 혹시 다른 나라와 남모르게 전쟁이라도 치렀던가? 전쟁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해마다 600명 가까운 ‘군인’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1997년 우리 군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는 273명으로 처음으로 200명대로 떨어졌으며, 2000년에는 182명, 2003년에는 150명, 2004년에는 134명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표 참조).
좋아진 군대, 더 좋아진 세상
최근 2~3년간 한국군의 연간 사망자 수는 150명선으로 1995년에 비하면 절반 이하이고, 1980~95의 평균 사망 인원에 비하면 4분의 1 정도다. 이렇게 사망자 수가 격감한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어오르고, 또 한편으로는 수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노력하면 이렇게 줄일 수 있는데도 매년 수백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은 것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지만, 그래도 이렇게 줄어든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어떻게 더 줄일 것인가다.
그런데 이번 내무반 총기 사건이 일어나자 아주 엉뚱한 진단과 대책도 난무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주장은 인권이니 민주화니 찾다가 한국군이 군기가 빠져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남북 화해니 민족 공조니 하고 떠들어대더니 주적 개념이 흔들려서 그렇게 됐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의 정치적 의도는 차치하고라도, 이들의 주장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이 말이 되려면, 이들이 그리워하던 시절에는 이런 총기 사고 같은 것이 전혀 없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일어난 부대에서 20년 전에 닮은꼴 사건이 먼저 있었을 뿐 아니라, 군기 바짝 들고, 남북 대치도 확실했던 그 시절은 매년 지금의 4배 가까운 인원이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져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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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오 사건’이 일어난 뒤 40년이 지나도 불행한 죽음은 계속된다. 2000년 10월17일 ‘전국군폭력희생자유가족협회’ 회원들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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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주장은 모든 책임을 김 일병에게 돌리는 것이다. 김 일병을 변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연 우리 군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김 일병이라는 정신이상자가 갑자기 나타나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한 것일까? 이런 사건이 10년 만에 처음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동안 군대를 거쳐간 사병이 족히 300만명은 될 테니 김 일병 같은 반응을 보인 병사는 매우 드물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이야기해보자. 군대생활 하면서 수류탄 까던지고 싶었던, 총으로 긁어버리고 싶었던, 그도 아니면 자살하고 싶었던 충동을 한번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눈이 홱 돌아갈 만한 그 순간 수류탄이 없어서, 실탄이 없어서, 또는 어머니 얼굴이 떠올라서 차마 그 짓을 못했을지 모르지만, 군에 갔다 온 사람의 절대다수는 한번쯤은 김 일병 근처까지 간 적이 있었을 것이다.
군 당국도 그렇고 많은 예비역들이 이 사건이 일어나자 구타나 가혹행위가 없었다면서 김 일병을 비난했다. 지난번 인분 사건 때도 지적했지만, 요즘 군대에서는 정말 2년가량 복무하면서 뺨 한대 맞지 않고 제대하는 병사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물리적 폭력이 없었다고 가혹행위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는 폭력과 가혹행위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육체적 폭력을 가하지 않고 얼마든지 사람의 피를 말리고 죽기보다 괴로운 순간 속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다들 그런다. 격려의 의미였다고, 잘하라고 그런 것이라고, 친근감의 표시였다고, 귀여워서 그랬다고, 또는 장난이었다고…. 그 정도도 용납되지 않는다면 삭막해서 어디 군대생활 하겠냐고…. 오히려 고참들이 이등병 눈치 보는 세상이 되었다고…. 어쩌면 그렇게 성희롱 사건 때 나오는 가해자쪽 변명과 똑같을까? 과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지금은 다 성희롱의 범주에 들어간다. 관점과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의 세상에서 힘이 없는 자가 힘있는 자와 대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 인정되면서 세상은 바뀌어간 것이다.
‘연애편지’가 부른 학보병 최영오 사건
이미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군대도 좋아졌다지만, 세상은 더 좋아졌다. 21세기의 군대에서 무조건의 복종이란 통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신세대 탓을 하지만, 신세대 장병이라고 해서 군대가 요구하는 규율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군대에서 사병들이 받는 훈련 중에서 가장 힘든 훈련은 유격훈련이나 행군일 것이다. 그러나 행군이나 유격훈련이 힘들어서 자살하는 병사는 거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무생활이 힘들어 많은 젊은이들이 탈영을 하고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그 폭력을 밖으로 돌린다. 김 일병처럼. 전체 사망 사건은 줄었지만, 그 결과 전체 사망 건수에서 자살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증가하고 있다. 군 당국은 자꾸 문제를 가정환경이나 개인 문제로 돌리지만, 군대가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이 자살자들 중에 군에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김 일병은 사회에 있었더라도 흉악한 살인범이 되었을까, 아니면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 되었을까?
지금부터 40여년 전인 196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총기 사건이 있었다. 학보병 최영오 일병 사건. 학보병(學保兵)이란 대학 재학 중 입대한 병사를 1년6개월 만에 제대시키는 제도로 최 일병 역시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온 연애편지를 짓궂은 고참들이 뜯어 읽었고, 최 일병은 소원수리를 통해 이에 항의하다가 고참들에게 구타당해 상처를 입었다. 이에 격분한 최 일병은 두 고참을 살해하고 자신은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4·19 부정선거에 항의해 광화문까지 진출했던 젊은 천문기상학도는 그 꿈을 펴지 못하고 군대에서 살인자가 되었다. 육군참모총장은 특별담화를 통해 사신(私信) 검열은 육군 규정을 어긴 것이며, 사적(私的) 제재 금지와 서신의 기밀 유지로써 인권 옹호에 만전을 기할 것을 강조했다.

△ 이제 병역제도 개혁에 시민사회 전체가 나서야 할 때다. 2004년 3월17일 열린 군 사망사고 관련 인권단체 간담회. (사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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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최영오 일병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최 일병의 사형이 집행되던 날 그의 어머니는 한강에 몸을 던져 아들의 뒤를 따랐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연애편지의 주인공이 된 최 일병의 연인은 기상학도였던 최 일병이 연애 시절 “우리가 만나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맑게 갰습니다”라는 일기예보를 했다고 전했다. 최영오 일병은 옥중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물론 연서로 인해 살인한 것이 피상적인 동기가 된 것은 부인 못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연서 자체 때문에 살인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 이하의 불의에 항거하였으며, 또 그것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어 그는 “나는 저 인간됨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노리개를 갖고 그것을 향락하려는 씹고 싶도록 잔인한 근성을 삭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부르짖었다.
사병은 간부의 진급 수단으로 전락
나는 저 불행한 최 일병으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에 군대생활을 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군대와 사회>라는 과목을 가르치면서 또 나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에 군대생활을 한 복학생들에게서 군대 체험담을 듣는다. 이번 학기 한 학생의 보고서 내용이다. “일병 고참들은 나에게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계속 쪼아대었고, 상병 고참들은 나에게 끊임없는 암기와 움직임을 요구했다. 병장 고참들은 나에게 사람이 아닌 장난감이 되기를 요구하면서 빨래해주겠다며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겨냈다.” 이 학생은 군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도 않았고, 군 생활이 그래도 자신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고 믿는 학생이다.
다들 이등병 때는 동기들과 우리가 고참 되면 저러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올챙이적 기억하는 개구리는 없다. 부대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어떤 복학생은 “이등병, 일병 때는 죽을 것처럼 힘들더니 상병, 병장이 되니 군대라는 곳이 집보다도 편해지더라”고 했다. ‘인간 리모컨’까지 있는 군대가 아닌가? 그러나 “병장이 되어 내 세상(?)이 되었을 때 이제는 사병과 사병이 아닌 간부와의 전쟁이 시작”됐다면서 “이등병 때나 일병 땐 잘해주시고 부모님 같기도 했던 간부들이 상병, 병장이 되니 사사건건 문제를 삼고 툭하면 시비 걸고 괴롭히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구타나 물리적인 가혹행위가 없어졌지만, 이제 신세대들은 더 군대생활을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들이 나약해져서가 아니다. 일과시간과 자유시간의 구분이 안 되고, 입대 날짜에 따라 고참과 졸병이 나뉘는 불합리한 군대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정보화가 진행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군대도 더 이상 성역으로 남지 않게 되면서 온갖 병역 비리 이야기도 사회에 돌게 되었다. 매년 징집대상 31만9천여명 중 현역으로는 16만5천명만이 가고, 3만2천여명은 공익이나 연구ㆍ산업요원으로 근무하고, 11만4천명은 경비교도, 전투경찰 등 전환복무하고, 7천여명은 면제받고 500~600명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감옥에 가는 현실 속에서 군복을 입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불이익이고 불만인 것이다.
게다가 사회가 민주화되고 나니, 군대 내에서 간부들의 진급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군사독재 시절에야 장관이다, 국회의원이다, 국영기업체 간부다 해서 장성급은 장성급대로, 영관급은 영관급대로 갈 수 있는 자리가 많았지만, 이젠 그런 자리가 널려 있지 않다. 옷 벗고 나가서 갈 자리가 없어 군대생활이라도 오래 하라고 계급정년을 늘려놓으니, 이제 진급은 더더욱 안 된다. 5·16 군사반란 무렵 김종필이 36살의 고참 중령으로 진급이 안 되어 큰 불만을 가졌다지만, 지금은 그보다 10살 더 먹은 중령은 얘깃거리도 아니다.
시민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간부나 지휘관들의 진급이 어려워지니 진급 평점에 영향을 미치는 검열이나 훈련은 물론이고 평시에도 상급 지휘관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사병들은 진급의 수단이 된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우주의 존재 이유가 되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의 진급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처참한 현실을 머리 큰 병사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주적 논쟁이 한창일 때 인터넷을 달구었던 비수 같은 한마디를 난 잊지 못한다. “대한민국 국군의 주적은 북한이지만, 대한민국 사병들의 주적은 간부”라고…. 훌륭한 간부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간부들도 너무 많다. 군 내부의 진급 부담은 군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민주화의 대가로 우리 사회 전체가 끌어안고 해결책을 모색해야만 한다.

△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단 한번도 병역제도를 근본적으로 검토해본 적이 없다. 김 일병 총기난사 현장. (사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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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방 개혁은 최대의 과제다. 정말 이 난을 통해 여러 번 강조했지만, 다시 한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부르짖는다. 병역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자. 꼭 모병제를 하자는 애기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단 한번도 병역제도를 근본적으로 검토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민주화도, 경제 발전도, 인구 변화도, 세계화도, 교육 수준의 향상도, 남북 화해의 진전도, 전쟁 양상의 변화도 아랑곳없이 한국의 병역제도는 1950년대의 큰 틀을 의연히 유지하고 있다.
군대의 개혁은 군대가 안에서 하는 것도 있지만, 밖에서 큰 틀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일단 군복을 벗으면 군대생활 한 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안 눈다는 말처럼 군대 문제에 관심이 없다. 10명의 의원이 적어서였을까? 기대했던 민주노동당조차 국방위원회에 한명의 의원도 배치하지 않았다. 한국 같은 군사주의 사회에서 군대를 안 바꾸고 노동운동의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제 시민사회 전체가 군대 문제와 국방 개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 수업을 들은 한 여학생은 “민간인들은 군대 문제에 대해서는 무식하다고 할 만큼 무지하며 관심도 없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고 바꿀 수 있는 힘과 역량은 예비역들에게 있는 것인데 예비역들도 이런 문제들에 관심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지적했다. 사회 전반의 민주화에 크게 힘입은 것이지만, 군 내부에서 매년 600명 가깝던 사망자 수를 150명선으로 줄여놓았다. 그러나 군대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그 수는 이제 별로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멀쩡하게 걸어들어간 젊은이들이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어찌 군만의 과제이겠는가? 건국 이래 최초로 사병 출신 대통령에 50년 만에 처음으로 해군 출신이 국방장관을 맡고 있는 오늘, 시민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8명, 젊은 넋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