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정치지도자의 고백/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4]
94년 수하르토와의 밀담 추진과 98년 5월 혁명까지의 격동의 시절, 나의 판단은 과연 옳았는가
▣ 압두라만 와히드(Abdurrahman Wahid)/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 구술정리 아흐마드 타우픽(Ahmad Taufik)/ 시사주간지 <템포> 기자
1994년 내가 나들라툴 울라마(NU) 의장에 다시 선출되면서 비롯된 수하르토의 압박은 1996년 들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하르토는 NU 회원을 공격하면서 그 압박을 사회 전체로 확대해나갔다. NU 소속 사업가들은 정부와 맺은 사업계약을 해지당했고, 지역 지도자들은 군인들로부터 협박당했다. 그런 가운데 시투본도(와히드 지지 지역)에서 NU 청소년 회원이 고문 끝에 살해당하자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수하르토와의 ‘거래’를 비판당하다
이어 1996년 7월27일 메가와티 지지자들을 공격하는 폭동이 일어나 100명이 넘는 이들이 살해당했다. 충격을 받은 나는 내무장관 무르디오노를 통해 수하르토와의 밀담을 추진했다. 당시 나는 그것 말고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1996년 11월2일 NU 자매단체인 라비타 마히드 이슬라미야(Rabithah Maahid Islamiyah) 전국총회에서 수하르토와 만나고 말았다.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다는 자바 문화를 놓고 볼 때, 그 만남은 나를 몹시 당황스럽게 했다. 수하르토는 예고 없이 출입구에 나타났고, 이미 현장에 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수하르토와 악수를 나누며 총회장으로 함께 들어가는 어색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그이와 담판을 벌이겠다는 내 뜻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졌고, 나는 결국 모든 걸 공개적으로 밝히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나는 NU가 수하르토의 차기를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NU 내부에서는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나의 민주진영 친구들은 모두 충격을 받고 내게 큰 실망을 드러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나는 수하르토의 골카당(Golka)이 1997년 선거에서 급격히 퇴조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미 극악한 태도를 드러내기 시작한 수하르토가 선거 결과에 따라 공황상태에 빠지면 사태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 것이라 여겼던 탓이다. 한국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무렵 인도네시아 정치는 수하르토가 총선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군부를 통해 무력통치를 계속해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나는 당시 유혈사태가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수하르토를 물리적으로 쫓아낼 수도 없거니와, 또 그럴 만큼 시간이 무르익지도 않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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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년간 철권통치를 휘둘렀던 수하르토 전 대통령. 그가 전격적으로 물러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사진/ SYG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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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 목숨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하여 나는 동지들에게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역설했다. 그러면서 나는 저절로 정치가가 되고 말았다. 나는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전술을 설명해나갔다. 그 시절 내 위치나 철학으로 볼 때, 내게 ‘평화’ 말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내 결정이 나의 개인적인 신변안전 문제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 판단은 나를 따르던 수천만 NU 회원들과 시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내 판단이 청년·학생들의 분노를 살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상했던 것처럼 나는 학생들에게서 심하게 욕을 먹었다. 심지어 NU 회원 학생들마저 나와 수하르토의 ‘거래’를 놓고 나를 비판했다.
어쨌든 나와 수하르토의 ‘화해’로 NU는 다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나는 수하르토와의 화해 못지않게 중요한 사안으로 여긴 무슬림 경쟁단체 모하마디야(Mohammadiya)와도 화해했다. 1996년 12월1일 나는 모하마디야 의장 아민 라이스를 자카르타 순다 케라파 모스크에서 만났다. 그것은 ‘현대주의자’와 ‘전통주의자’의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나는 아민과 내가 뜻을 모으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변화’ 동력이 발생할 것이라 믿었다. 그 무렵 나는 독재정권의 ‘적개심’이 문제이므로 그 적개심을 없애야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어 조용하게 전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아민은 이슬람 우익보수단체들과 가까이하면서 의식적으로 정치무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민은 결국 1997년 8월 ‘개혁’과 ‘수하르토 퇴진’을 외치는 선두그룹 가운데 한명으로 나섰다.
그렇게 사회가 혼란 속에 빠져드는 가운데 하루는 위란토 장군이 나를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위란토는 수하르토의 사위이자 군부 내 강경파인 프라보워 장군 세력이 커지는 걸 매우 염려하고 있었다. 나는 위란토에게 아민과 메가와티가 외치는 개혁 대열에 합류하라고 강하게 권유했다.
유혈 대결 국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같은 시기 인도네시아에는 경제위기가 닥쳤다. 1달러에 2400루피아이던 환율이 1998년 1월 말 1만7000루피아까지 뛰어올랐다. 인도네시아는 정치·경제적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사업가들도, 투자자들도, 시민들도 그리고 수하르토도 모두 공포에 질렸다.
그러자 수하르토와 그 가족이 시민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정확한 진단에 실패하고 엉뚱한 처방전을 내놓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수하르토는 1998년 3월 ‘차기 부통령 하비비’라는 당치도 않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하비비 카드는 관료나 군부 내에서도 외면당했다. 상황을 간파한 아민은 강도를 높여 수하르토 즉각 퇴진을 외치며, 메가와티와 내게 대중전선에 참여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아민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만약 세 사람이 반수하르토 대중전선을 결성하면 군부 내 강경파들이 유혈 대결 국면으로 끌어갈 것이라는 정보를 군부 내에서 다양한 채널을 통해 알려왔기 때문이다. 당시 모든 시민들은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거역할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군부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내겐 참으로 무겁고 긴장된 시간이 이어졌다. “언제 움직일 것인가.” 내 말 한마디를 기다리며 나를 지켜보는 수천만 NU 회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사고가 일어났다. 자카르타 NU 사무실에서 쉬고 있던 나는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모두가 절망한 상태에서 의사이기도 한 내 동생 우마르는 포기한 전문의에게 내 수술을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형에게 빚을 지고 있소.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봅시다. 그는 기적적으로 회생하는 능력을 지녔으니 염려 마시고…. 신이 그이를 반드시 되돌려놓을 것이오.”
다음날 나는 문병 온 이들과 대화를 나눌 만큼 저절로 회복됐고 결국 수술도 필요 없게 되었다. 병세가 호전된 나는 몇주 뒤 집으로 옮겼다. 의사가 방문자를 제한하라고 조언했지만 당시는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언론이 매일매일 내 병세와 상황을 추적 보도하는 가운데 나는 수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상황을 읽어나갔다.
3월 들어 국민협의회(MPR)는 위란토를 육군총사령관으로, 그리고 프라보워를 중장으로 승진시켜 전략예비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어 수하르토가 새 내각을 발표하자 인도네시아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새 내각 명단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고 충동적이었다. 새 내각은 수하르토의 딸 투툿과 수하르토의 골프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봅 하산 같은 족벌들로 메워져 있었다. 새 내각 명단은 곧장 경제계에 경보를 울렸고 학생들을 자극했다. 시민들은 수하르토에게 더 이상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 즈음 나는 호전성이 최고조에 달한 수하르토가 폭동을 조작해 상황을 진압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감정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3월11일 수하르토가 자신의 7번째 대통령 임기를 선언하던 날, 족자카르타의 가자마다대학에서는 2만5천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나와 아민에게 동참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수하르토의 잔학상을 잘 아는 나는 그 순간까지도 학생들과 시민들의 희생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과 4월 긴장이 높아갔지만 수하르토는 여전히 통제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5월4일 수하르토 통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하르토가 국제통화기금 처방전에 따라 유류 70% 제한 공급을 밝히면서 유가가 폭등하자 전국적으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폭동 조작을 염려했으나…
아민은 학생들에게 거리로 뛰쳐나갈 것을 요구했지만, 나는 여전히 냉정을 호소했다. 5월9일 수하르토가 카이로 경제정상회담에 참여하는 동안 학생들은 거대한 동원력을 보이며 거리를 휩쓸었다. 그리고 5월12일 트리삭티대학 학생 6명이 교내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폭동과 약탈이 판을 쳤고, 특히 중국계가 치명타를 입었다. 그 과정에서 1200명에 이르는 시민이 사망했다.
그리고 5월22일 수하르토가 전격적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해서 32년 수하르토 통치도 막을 내렸다. 시민들은 32년 만에 처음으로 수하르토가 없는 날을 맞았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노회한 수하르토가 더욱 강압적인 태도로 사태를 진압할 것으로만 여겼지, 그이가 퇴진할 것으로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상황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한 사회 지도자로서 절망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과연 내가 인도네시아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오직 이 화두를 붙들고 깊은 사색에 들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