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정치 > 정치21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6월21일 제615호
이율배반의 정치, 미션 임파서블!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왜 지지자들에게까지 심판을 받아야 했는가… 한때 그들을 선택했던 문학평론가가 말하는 배반당한 3년과 현재

▣ 함돈균 문학평론가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5·31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충격적인 참패를 둘러싸고 쏟아지는 각계의 분석은 다양하다. 이 시점에서 아무래도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당사자인 여당과 대통령이 내린 자가진단일 터이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선거 직후 ‘패닉 상태’에 빠진 여당의 모임에서 주로 논의된 것은 부동산 양도세 인하와 기준시가 6억원(시가 기준으로는 9억~10억원 정도) 이상의 고가주택에 대해 1가구1주택의 경우 보유세 인하를 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참고로 이 개정된 보유세는 아직 집행도 되지 않았으며, 법안이 원안에서 후퇴를 거듭한 끝에 세율도 영미 쪽에 비해 턱없이 낮은 0.6%로 결정됐다). 선거 참패 이후 첫 번째로 내놓은 여당의 민심 수습책이 전 국민의 상위 5%를 달래는 경제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중도개혁 세력을 자처하는 열린우리당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일 뿐 아니라, ‘정치공학’의 측면에서도 그들이 얼마나 안이한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호남이 왜 돌아섰는지 그대들만 모른다

무엇보다도 필자에게 이 일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집권 여당과 대통령의 이율배반적 정치 행태를 또다시 극명하게 드러낸 해프닝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필자는 이 이율배반성이야말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그들이 지지자들에게조차 참혹한 ‘심판’을 받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본다. 한때 그들을 선택했던 유권자이기도 한 필자는 이 관점으로 ‘배반당한’ 3년과 현재를 살펴봄으로써 이번 선거의 의미를 잠시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앞서 언급한 여당의 ‘해법’이 이미 끔찍하게 올라버린 부동산 시장을 제어하고 불로소득을 환수하겠다고 허둥대고 있는 정부의 정책과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가 하는 점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을 놓고 당청 간의 불협화음이 또 불거져나온 거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물론 이러한 여당의 해법에 대해 대통령이 정책의 일관성 문제를 제기하며 난색을 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필자가 보기에 부동산 문제에 대해 국민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잃게 한 사람은 오히려 대통령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아파트 시장의 안정을 위해 다수의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놓은 기본적 해법 중 하나가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였으며, 필자가 기억하기에 이는 대통령과 여당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시장주의 숭배자인 노 대통령은 이를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했다(아파트 가격을 잡겠다는 것 자체가 시장원리에 어긋나는 일임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대통령은 자신이 한 입으로 두 말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게 아닐까?).


△ 지역구도 해소가 명분이었지만 한나라당에 권력의 반을 주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발언은 많은 지지자들에게 배신감을 갖게 했다. 노대통령은 하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에게도 연정 제안을 거부당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정부의 요란한 구호와는 달리 뇌관을 제거한 2003년 10·29 부동산 대책 이후, 시장이 이러한 정부의 이중적 행태에 ‘감’을 잡고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정치 행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동영·임종석으로 대표되는 여당 내 정치공학자들은 여당의 위기를 ‘반한나라 연합’이라는 명목하에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해결해보자는 식의 의견을 벌써부터 피력해온 바 있다. 국민을 위한 정책구상은 없고, 오직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에만 관심이 있는 이들이 지역주의에 기반한 합종연횡에 골몰하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물론 이는 탈지역주의를 내건 열린우리당의 창당 명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에 대해 대통령을 비롯해 여당 내 노 대통령의 대리인인 김두관 의원은 이를 퇴행적 정치논리로 비판해왔다. 이 비판의 방향은 분명 옳다.

그러나 정작 집권 여당의 지지자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던 것은 뜬금없이 지난해 대통령이 제기했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논의였다. 뿌리도 다르고 정책적 이슈에 대한 공감도 없는 한나라당과의 연정론은, 지지자들의 동의도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른바 대의정치라는 허울 좋은 명목하에서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가 어떻게 배반당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으며, 어떻게 지역주의가 오늘의 시점에서도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여당 내에서조차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했던 이 사건은 해프닝이 되었지만, 이에 대해 대통령과 이 논리의 옹색한 변호자였던 유시민 장관이 그의 지지자들에게 사과했던 기억은 없다. 물론 이러한 이율배반적 정치 행태로 인해 그의 지지자들과 호남의 정서가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된 것은 당연했다(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전남에서 전멸한 것이 이 때문이라는 것은 대통령과 여당만 빼고는 다 알고 있다).

끝없이 배신당한 시대정신

이러한 모순적 정치 행태는 현 정부 내내 일관되게 ‘추진’돼왔다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박정희 시대의 모든 유산에 무조건적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황우석 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윤리의식 없는 수출지상주의 행태를 반복하는 모순을 보였고, 민주적인 정부를 지향한다면서 시장에서 정부의 역할을 철저히 방기했으며, 사회 안정을 꾀한다면서 노동을 극단적인 시장 유연성의 논리로 내몰고 노동계급 전체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급기야 최근에는 사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미국과의 조속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그 해법으로 제시하는 무지(?)를 드러냈다. 민주주의를 시장지상주의를 통해, 사회 양극화를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통해, 자립적인 국가 경쟁력의 성장을 자국 산업에 대한 보호 해제와 다국적 자본에 대한 규제 해제를 통해 성취하려는 이 이율배반의 정치 행태를 누가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하지 않을 것인가? 남북 화해를 운운하면서도 집권 초기 특검을 수용해 남북 관계를 6·15 회담 이전 상황으로 후퇴시키고, 주체적 외교 운운하면서 명분도 실효도 없이(FTA를 보라, 미국은 파병을 대가로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다)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하고, 최근 평택 미군기지 이전 사건에서 본 것처럼 광주사태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에 대한 일사불란한 군사작전을 실행하며, ‘앞선 정권이 한 것이니 내 책임이 아니다’는 식의 관료주의적 관성을 반복하며 새만금의 마지막 숨통을 흙과 시멘트로 끊어놓은 것이 ‘참여정부’의 정책 과정이었다.

‘참여정부’를 내세운 이 정부에 과연 진정 국민의 동의와 참여에 입각한 정책추진 과정이 있었는가?


△ 참여정부라는 노무현정권 아래서 군경을 동원해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농민과 시위대를 강제 진압한 것은 한-미 FTA 추진과 함게 이율배반의 정치 사례이다.(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현 정부의 탄생을 도운 지지자들을 당황하게 하고 분노하게까지 만든 수많은 이율배반적 정치 행태에 대해,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그의 지지자들에게조차 정중하게 의견을 묻거나 진심 어린 양해를 구해본 일이 없다. 집권 3년 동안 우리가 목격해온 것은 우리가 그들을 선택한 이유였던 시대정신의 끊임없는 배반이었으며, 자기 일관성조차 지키지 못하는 이율배반의 정치공학뿐이었다. 그리고 도덕적 우월주의로 무장한 대통령의 ‘히스테리컬’한 아집과 창조성 없는 여당의 지리멸렬함이 덤으로 얹혀졌다.

대통령은 ‘독선의 논리’ 경고하지만…

필자처럼 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인간성에 대한 대단한 신뢰나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진보에 대한 바람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바람은 지극히 소박한 수준으로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 수준에서 개탄하게 되는 것이 바로 현재 우리 정치 공동체에 드리운 신뢰의 위기다. 구체적으로 이는 사회 정책을 책임진 사람들의 자기 일관성의 결여와 관련된다. 최근 현충일 담화에서 대통령은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인지 독선의 논리가 지닌 위험성을 경고했다. 지난 3년여 동안 대통령과 여당의 줄기찬 이율배반과 독선에 질려버린 국민 중에서 이것이 자기 반성의 고백을 담은 경고일 거라고 믿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