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정치 > 정치21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5년12월14일 제589호
펄펄 끓는 ‘정동영 음모론’

당의장 강화·기간당원 규정 완화 등 보고서 유출되면서 당헌·당규 개정 논란
“정 장관의 당 장악 시나리오” 비난에 “개혁당 그룹의 역음모”라는 반박도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유령처럼 떠도는 낭설을 근거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반개혁적 인물로 낙인찍으려는 세력의 흑색선전인가, 아니면 정동영 장관의 당 장악 시나리오가 치밀하게 추진되고 있는 것인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빅매치’를 펼칠 2월18일 전당대회를 앞둔 열린우리당이 최근 당헌·당규 개정 논란에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창당 정신 무시한 쿠데타적 발상”

그동안 물밑 신경전만 거듭됐던 당헌·당규 개정 논란은 지난 12월5일 임시 지도부인 비상집행위원회 안에 설치된 당헌·당규 개정소위(위원장 유재건 의원)의 ‘당헌개정안 1차 실무검토 보고서’가 언론에 유출되면서 급속히 증폭됐다. 보고서에 △당 의장과 원내대표로 이원화된 ‘투톱’ 지도 체제를 당 의장 중심으로 재편하고 △기간당원제를 폐지하거나, 기간당원의 권리행사 규정을 완화하는 쪽에 무게가 실린 듯한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비상집행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정세균 의장은 “실무자들이 과거 지도부에서 논의된 이런저런 의견들을 (소위 위원들이) 참고하십사 하고 회의자료로 만들어놓은 것일 뿐, 채택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다”고 즉각 진화에 나섰다.


△ 열린우리당 당헌·당규 개정 논란에 당내 계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11월26일 특별강연회에 나란히 참석한 김근태 장관(왼쪽)과 정동영 장관. (사진/ 연합)

그러나 당내 각 계파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당장 유시민·이광철 의원 등이 소속된 참여정치실천연대(참정연)는 “창당 정신을 무시한 쿠데타적 발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10·26 재선거 참패 뒤 당내 주류인 실용파 일각에서 △기간당원제도 개선 △중앙위원회 권한 조정 의견이 제기됐을 때 이미 “정동영 장관 쪽이 민주당과 합당에 결사반대하는 개혁당 그룹을 당에서 쫓아내려 한다”는 의혹을 품어온 참정연 인사들은 “결국 올 것이 왔다”며 분노했다. 참정연 소속의 한 의원은 “당 안에서 정동영계가 12월에 기간당원제 폐지 등을 담은 당헌 개정안을 전격 추진할 것이라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면서 “우리가 계속 반대할 경우 당에서 털어내자고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참정연의 의혹 제기는 나름의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 일단 당헌·당규 개정 소위의 검토시안이 그동안 당내 주류를 형성한 정동영 장관과 가까운 인사들이 주창해온 내용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당 의장 선거전에 출마할 정 장관의 정치적 이해와도 맞아떨어진다. 현재 대중 지지도와 당내 역학관계 등을 볼 때 정 장관이 당 의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당 안팎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하지만 원외 인사인 그가 당 의장이 돼도 원내대표와 중앙위원회에 권한이 집중된 현행 제도 아래서는 당을 힘있게 이끌 수 없다. 기간당원이 공직 후보를 선출하는 만큼 내년 5월 지방선거의 공천권도 행사하기 어렵다. 반면 5월 지방선거에 패배할 경우 책임 논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런 앞뒤 상황을 고려할 때 당 의장의 권한 강화와 기간당원제 폐지 또는 완화는 정 장관의 당 복귀와 대권 행보를 위한 ‘길닦기’라는 것이다.

의장 권한 강화는 당의 자연스런 고민?

물론 정동영 장관 쪽은 참정연의 이런 의심을 계파적 이해와 억측에 근거한 일방적인 문제 제기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정 장관의 핵심 측근은 “전당대회에서 1등 한 당 의장이 2~5등 한 경쟁자들에게 집중 견제를 받는 상임중앙위원회, 그나마 상임중앙위원회에서 결정된 사안조차 계파적 이해에 따라 다시 뒤집는 당 중앙위원회로는 침몰 중인 당을 되살릴 수 없다”면서 “제왕적 총재 시절 폐해를 너무 의식해 당 의장을 과도하게 견제하는 구도, 비서실장 임명 외에는 아무 권한도 없는 당 의장으로는 당을 효율적으로 이끌기 어렵다는 게 다수의 컨센서스”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안에서 의장 권한 강화 방안이 제기되는 것은 평균 4개월짜리 단명 의장을 수차례 경험하고 계파 간에 견제와 반목만 거듭해온 당의 현실을 몸소 체험한 당원과 의원 다수의 여론이 반영된 자연스런 고민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인사는 “공천권이 당원들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당 의장이 정책위의장 등 일부 당직에 대한 인사권을 갖는 게 뭐 그리 심각한 과거로의 회귀인지 되묻고 싶다”면서 “침몰하는 당을 다시 물 위로 띄우기 위해 당 안팎에서 제기된 개선책을 고민하는 것일 뿐 특정 계파를 배제하거나 과거 제왕적 총재처럼 당을 장악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 참여정치실천연대는 당헌개정안 1차 보고서 내용이 "창당 정신을 무시한 큐데타적 발상"이라고 반발한다. 7월15일 열린 참정연 기자회견. (사진/ 연합)

정 장관 쪽은 오히려 당 일각에서 마치 자신들이 기간당원제 폐지 드라이브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에 대해 ‘역음모론’을 제기했다. 정 장관 쪽 핵심인 한 의원은 “정 장관은 기간당원제를 폐지해 얻을 수 있는 실익도 없고, 폐지를 검토해본 적도 없다”면서 “정 장관이 기간당원제 폐지를 배후 조종하는 것처럼 비판하는 것은 그를 반개혁 세력으로 낙인찍어 정치적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개혁당 그룹과 일부 할 일 없는 중앙위원들의 음모”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정 장관 쪽 관계자들은 정 장관의 고민은 기간당원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직 후보 선출과정에 국민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 선거인단에 기간당원과 일반당원, 국민의 비율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에 모아지고 있다면서 ‘정동영=기간당원제 폐지론’은 명백한 정치적 흑색선전이라고 주장했다. 정 장관 쪽은 현재 △공직후보 선거인단에 기간당원 비율을 당헌에 규정된 30% 이상으로 유지하되, 8개월 동안 월 2천원씩 당비를 납부한 실적뿐 아니라 실제 당원교육 이수 여부 등을 투표권 행사 자격 요건으로 부과해 입후보 예정자가 양산한 기간당원을 걸러내고, △전당대회를 중앙선관위에 위탁관리하는 방식 등의 개선책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근태쪽, 당헌·당규 고수 방침 확정

하지만 정 장관 쪽의 진정성 호소가 어느 정도 반향을 불러올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당장 정 장관과 당권 경쟁에 나설 김근태 장관 쪽이 최근 당헌·당규 개정 문제에 대해 ‘원안 고수’ 방침을 확정하고 정 장관의 정치적 노림수를 문제 삼고 나선 때문이다. 김 장관의 핵심 측근은 “당 의장과 원내대표로 이원화된 지도 체제를 당 의장 중심으로 바꾸고, 기간당원제를 손보려는 것은 원내 중심 정당, 당원 중심 정당이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겠다던 창당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사당화 음모로 반대 세력을 배제하고 당을 깨자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측근 인사는 “당 의장·원내대표 투톱 체제는 당 의장의 도덕적 권위와 리더십을 통해 상호 협조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고, 기간당원의 공직후보 선출권 역시 일부 부작용이 있더라도 과거 밀실공천과 계파 나눠먹기식 공천보다는 훨씬 진일보한 것인 만큼 지켜내야 한다”면서 “도입 2년도 안 돼 당 의장 중심 체제로 전환하고 기간당원제를 손대려는 것은 단세포적 발상”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당 의장 권한 및 기간당원제도 개선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알려졌던 김 장관 진영이 정 장관과 정반대로 방향을 잡으면서 당내 각 계파는 두 잠재적 대권주자를 중심으로 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당장 당헌·당규 개정 움직임에 가장 강력히 반발해온 참정연 쪽은 김 장관과의 공조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참정연의 좌장 격인 유시민 의원은 지난 4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 장관 쪽의 기간당원제 훼손 움직임 등을 비판하며 ‘반정동영계, 친김근태계’를 선언한 바 있다.

‘최대주주’ 두 사람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당헌·당규 문제에 대해 당 안팎의 친노무현 세력들은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장외 친노 세력의 대표 격인 ‘국민참여 1219’는 당 의장 권한 강화 조치는 필요하지만, 기간당원제도는 손댈 수 없다는 분위기다. 국참연대 출범의 주역인 이상호 열린우리당 전국청년위원장은 “제왕적 총재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지도체제를 이원화했지만, 당 의장에게 인사권과 중앙위원회에 안건 상정 권한조차 주지않고 당을 이끌라는 것은 중대한 문제”라며 “정책위원회를 당 의장 영향권 아래에 두고 의장이 원내대표보다 상위에 있다는 걸 명시하는 정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상 정 장관 손을 들어준 것이다.


△ 4월2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투표하고 있는 대의원들. 기간당원제에 대한 정동영-김근태 진영의 논쟁이 치열하다. (사진/ 류우종 기자)

하지만 기간당원제에 대해서는 “현행 ‘당헌 114조, 상향식 공천 규정’에 기간당원 경선과 국민참여경선을 할 수 있고, 국민참여 경선의 경우 기간당원 30~50%, 국민 50~70% 비율로 배분할 수 있도록 돼 있다”면서 “기간당원 제도가 제대로 정착된 지역은 기간당원경선을, 동원 기간당원이 문제되는 지역은 국민참여경선으로 일반 국민의 참여 비율을 늘리는 등 운용 방식의 변화로도 충분히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다”며 “기간당원제는 일자일획도 손대면 안 된다”말했다. 김근태 장관 쪽 의견에 더 가까운 것이다.

절충적 입장 보이는 친노 세력

친노 직계 현역 의원들의 모임인 신의정연구센터도 국민참여 1219와 같은 태도다. 신의정연구센터 간사인 이화영 의원은 “투톱 체제로 원내정당화 목표는 달성했지만, 당의 정책권한과 홍보권한이 마비되면서 당 전체가 의제를 설정하고 국민적 지지를 획득할 수 없는 자기모순에 빠졌다”면서 “최소한 정책위의장 임명권과 당 외곽조직인 열린정책연구원은 당 의장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간당원제는 “현행 당헌·당규에 70%까지 일반 당원 및 국민들의 참여가 보장된 만큼 운영의 묘를 살려 폐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