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2003년11월05일 제483호 

[아시아의 모계사회 | 인도 나야르족] 여자가 배워야 집안이 산다

법률적 모계상속 뒤에도 풍습 그대로 유지… 자식 교육 책임지며 문중 제례도 주도

인도 서남부 케랄라주에 사는 나야르 카스트는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모계사회였다. 나야르 카스트는 성과 재산을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상속하는 모계사회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1956년부터 시작된 수정법(MYSURE ALIYA SANTANA Amendment Act)에 따라 재산을 누이의 자식에게 상속하는 법이 개정돼 자기 자식에게 직접 상속하는 부계상속 체제로 바뀌었다. 이전까지 좋은 남자상은 자기 부인에 연연하지 않고 친정의 누이와 누이의 자식에게 잘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법이 바뀌면서 나야르 남자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게 됐다. 자신들도 재산 상속을 받을 수 있고, 자신의 재산을 자식에게 직접 물려줄 수 있는 것이다.


△ 챠라깔 빤자야뜨 마을의 사원을 지키는 가야가푸라의 두 할머니와 자손들.

부계상속도 여자의 권한 축소 못해

나야르족의 모계상속은 47년 전에 끝났다. 하지만 법률이 바뀐다고 풍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사회 구석구석에서 모계사회의 흔적을 생생히 볼 수 있다. 힌두교는 인도 사람 대부분이 믿는 종교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인도에도 다른 종교가 엄연히 자리잡고 있다. 케랄라주에는 ‘떼이얌’ 굿이 있다. 이 굿은 토착종교가 힌두교와 결합한 형태를 띤다. 떼이얌 행사를 치르는 사원에 가면 사원을 유지 관리하는 ‘가야가뿌라’라는 집안이 있다.


△ 나야르족이 사는 케랄라주의 해변(왼쪽). 챠라깔 빤자야뜨 마을의 굿을 하는 사원과 가야가뿌라(오른쪽).

놀랍게도 이 사원의 대표는 가야가뿌라 집안의 장녀이고, 모계로 지위가 이어진다. 집안의 장녀들은 각지에 흩어져 살다가도 떼이얌 행사를 할 때 사원에 집결해 무당에게 쌀을 뿌리는 ‘아리이들’이라는 의식을 주도한다. 그리고 이들이 속한 문중을 ‘따라왓’이라 하는데, 한 문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자를 ‘따라와땀마’라고 부른다. 따라와땀마는 문중에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며, 문중 사람들은 그녀의 의견을 따른다. 한 집안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어머니 혹은 외할머니가 집안 일과 아이들의 교육에 걸쳐 권한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집안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남자 구성원이 연장 여자의 동생일 때는 실질적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외부 일에도 고문 구실을 한다.


△ 올라체리 가문의 굿(왼쪽). 여자 대표가 굿이 끝난 무당에게 아리이들을 한다. 무타판사원(오른쪽).



▷ 무당에게 뿌릴 쌀을 준비하는 장녀들.



△ 사원의 대표인 할머니가 굿거리가 끝난 무당에게 축복의 쌀을 뿌려주고 있다(왼쪽). 올라체리 가문의 장녀들이 무당에게 ‘아리이들’을 하고 있다(오른쪽).

뿐만 아니라 자녀를 기르는 것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몫이다. 어머니가 자녀를 제대로 훈육하기 위해서는 남편보다 똑똑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대부분 아내가 남편보다 교육 수준이 높다. 나야르족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내를 공부시키는 남편이 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편이 식당이나 영세공장 등지에서 일하며 받은 월급으로 대학에 다니는 아내의 학비를 대는 식이다. 남편들이 이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자식을 키우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아내가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올라체리 가문의 장녀들. 타지에 살다가도 굿을 할 때면 꼭 참석해야 한다.


고졸 남편이 대학생 아내 학비 댄다

나야르족에게 남아 있는 모계풍습은 떼이얌 행사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떼이얌 행사는 문중별로 해마다 한 차례씩 열린다. 올라체리가에서도 해마다 떼이얌을 치른다. 이 행사는 다른 지역에 사는 모든 올라체리가의 사람들과 이웃들도 참석해 수백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다. 형제자매가 행사를 주관하는 올라체리가의 떼이얌은 지금부터 300여년 전에 시작되었다. 당시 한 집안이던 올라체리 문중은 세월이 흐르면서 4개의 집안으로 나뉘어졌다. 그래도 이들은 서로 돈을 모아 1년에 한번씩 떼이얌을 치르고 있었다.

올라체리가의 장녀들은 무당의 굿거리가 끝날 즈음 사원 옆 건물 앞에 서서 쌀을 두 손에 움켜쥐고 무당을 기다린다. 무당이 굿 한 거리를 끝내면 장녀 앞으로 간다. 그러면 올라체리의 장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무당에게 쌀을 던진다. 축복의 의미다. 나야르 카스트의 모계상속은 법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전통적인 행사 떼이얌을 통해 모계풍습은 오롯이 이어지고 있다. 사원에서 아리이들 의식을 거행하는 장녀들은 엄숙한 종교 성직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끝]

* 이번호까지 4회 동안 연재된 ‘아시아의 모계사회’에 실린 백지순 작가의 사진이 11월11일부터 18일까지 서울 관훈동 갤러리 룩스(02-720-8488)에서 전시됩니다.

케랄라(인도)= 글 · 사진 백지순 | 사진가 bekjis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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