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특집 > 이슈추적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2월07일 제596호
[한-미 FTA] 투사가 아니면 거지가 될지어다

사회적 합의를 막고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드는 통상 협상의 밀실주의
이해당사자의 반발을 지렛대로 삼으라는 주장은 순진한 발상에 불과한가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세간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지난 1월10일 서울행정법원 제5부(재판장 김창석)에선 쌀 개방 협상안과 관련한 판결이 내려졌다. 쌀 관세화 유예 협상 과정의 ‘이면 합의’(쌀 관세화 유예 연장을 위해 미국, 중국 등 개별 국가들과 벌인 협상의 합의 내용)를 공개하라며 농민단체가 낸 소송을 기각한다는 내용이다.

언론에서 ‘기각’ 결론으로만 짤막하게 다뤄진 이 판결문에는 한 가지 눈길을 끄는 대목이 포함돼 있다. 정부가 이면 합의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로 든 두 가지 사유 가운데 하나가 법원에 의해 부정된 것이다. 재판부는 정부가 쌀 협상 이면 합의를 국가정보원법과 보안업무 규정에 따라 ‘3급 비밀’로 분류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못박았다. 이면 합의 내용을 담은 정보가 ‘누설되는 경우 국가 안전보장에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비밀’(보안업무규정 제4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면서도 이면 합의 내용이 공표될 경우 다른 나라들이 교섭 정보로 활용할 수 있다는 피고(외교통상부) 쪽의 주장만은 받아들여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협상안 관철’ 능동적 사고의 실종

여기서 하나 새삼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점은 쌀 협상안의 이면 합의가 ‘국가 안전보장과 관련된 비밀’로 분류돼왔다는 사실이다. 법원 판결에서 보듯 명백히 잘못된 분류였는데, 이는 단순히 행정적인 착오나 과잉보호 본능에서 비롯된 것일까?

통상법 전문인 송기호 변호사(수륜법률사무소)는 이를 “통상 이슈를 다루는 우리 정부의 기본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으로 풀이한다. 국가적인 실리를 두고 다투는 통상 문제가 외교·군사적 이슈의 종속 변수로 취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해석이다. 이는 통상 협상의 밀실주의와 연결돼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막음으로써 통상 협상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의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문제를 꼬이게 만든다. 통상 협상이 외교·군사적 이슈의 종속 변수로 취급됐다는 비판은 쌀 개방 협상안에 한정된 것일까?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선결 과제로 꼽혀온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의무상영 일수)를 146일에서 절반인 73일로 줄이겠다고 공식 발표한 것은 설 연휴 직전인 1월26일이었다. 반면, 우리 정부가 한-미 FTA 체결을 위한 협상 개시를 공식화한 것은 2월2일. 상식적으로 볼 때 본격적인 FTA 협상이 벌어진 뒤 한국과 미국 사이에 밀고 당기기가 진행되면서 결정돼야 할 스크린쿼터 축소 일수가 미리 정해져 공식 발표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납득하기 힘든 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덕수 부총리의 발표 즈음에 알려진 대로 스크린쿼터를 절반으로 내리는 결정은 사실상 1년 전에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에 합의돼 있었다. 그럼에도 스크린쿼터 주관 부서인 문화관광부는 한 부총리의 발표 직전까지 ‘결론난 게 없다’는 말만 되뇌었다.

통상교섭본부는 독립적? 과연 그런가

권경애 변호사(열린합동법률사무소)는 “행정부의 태도뿐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도 통상·외교 문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고 말한다. “미국 같은 경우 자국 내 이해집단의 요구를 통상 협상 때 다른 나라에 대한 압박의 근거로 활용하는데, 우리 쪽에선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사고 자체가 없다. 미국의 요구에 반발하지 않게 (국내 이해관계자들을) 눌러주는 역할만을 하고 있다. 행정부의 기본 태도가 사대적이다.” ‘미국의 요구를 들어줘야 우리한테 살길이 있다’는 식의 태도가 너무 강해 우리의 협상안을 관철시켜나가려는 능동적인 사고가 실종돼 있다는 것이다. ‘수출만이 살길’이란 구호 아래 개방의 실익을 가장 크게 누리는 대자본이 수출로 연명해가는 이들(노동자, 하청 중소업체 등)의 생존 불안과 공포심을 이용하는 국내 억압 구조가 이런 사대적 태도의 내적 바탕을 제공한다는 해석도 있다.


△ 휴대전화 수출을 위해 중국산 마늘에 대한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풀기로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던 한-중 마늘 협상은 통상 협상의 밀실주의를 잘 보여준 전형으로 꼽힌다. 2002년 7월 한-중 마늘 협상 파문이 불거진 뒤 열린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에 참석한 정부 쪽 인사들(왼쪽) (사진/ 연합) 과 한-중 마늘 협상 재고와 쌀개방 반대를 요구하는 농민들. (사진/ 윤운식 기자)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의 전비호 통상홍보기획관은 이와 관련해 “통상교섭본부는 외통부의 정부 사이드와는 준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예산도 분리돼 있다”며 통상 문제가 외교 이슈에 종속돼 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1998년 출범 때부터 통상교섭본부에는 변호사, 경제부처 공무원, 민간기업 출신 등 민간의 각계 전문가들이 들어와 같이 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통상 협상이 행정부 관료조직의 일방주의로 흐를 수 없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2·3대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황두연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은 “우리나라 의회가 미국처럼 통상교섭권을 갖고 있진 않아도 국민에게 의무와 부담을 지우는 협상안에 대해선 동의권 행사를 통해 이해집단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상교섭본부 쪽의 설명처럼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우리나라의 통상 협상에서도 국회나 농민, 영화인 등 이해당사자를 완전히 배제한다고 볼 수는 없다. 헌법(60조) 규정에 따라 국회는 쌀 개방 협상안, FTA 체결 같은 사안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문구상의 권한일 뿐 실제론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을 줄곧 받아왔다. 행정부 차원의 통상 협정이 이미 맺어진 단계에서 동의 여부만을 밝혀야 할 국회는 국제적 신뢰를 해칠 수 없다는 족쇄에 얽혀 ‘찬성 거수기’ 노릇에 머물게 된다. 통상 협정이 맺어지기 이전 단계에서 국회는 위원회 활동을 통한 국정 보고와 자료를 받는 수준에 그칠 뿐 통상 협정의 내용에는 관여할 수 없는 실정이다.

통상 협상에서 이해당사자의 참여가 매우 형식적이라는 비판 또한 새삼스럽지 않다. 실제 외교통상부의 민간 자문조직 구성은 실제적인 이해집단인 노동계나 농업계는 배제된 4대 경제단체와 학계에 몰려 있다. 예컨대 FTA 민간자문위원회는 해양수산부 추천 1명을 포함한 학계 10명, 농림부·문광부 추천 각 1명을 포함한 14명 등 24명으로 구성돼 노동계, 농업계, 관련 시민단체를 아우르지 못한다. 그나마 위원회는 2004년 구성 뒤 지금까지 두 차례 모임을 여는 데 그쳐 형식적 운영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개방에 따라 피해를 보는 쪽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추진되는 통상 협상은 국내 각 부문을 통합하는 과제와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국회는 ‘토론의 마당’이 아닌 ‘실력 대결의 장’이 된다. 통상 협상의 결과에 따른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국내 여론은 둘로 선명하게 갈라진다. 농민으로 대표되는 이해당사자는 ‘투사’ 아니면 ‘거지’가 되는 선택으로 내몰린다. 천사도 악마도 아닌 세계무역기구(WTO)나 협상 상대국이 한쪽에서는 천사로, 다른 한쪽에서는 악마로 그려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다.

여야 의원 41명의 ‘통상절차법 발의’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을 비롯한 여야 의원 41명이 2월2일 ‘통상 협정 체결 절차 등에 관한 법률(통상절차법) 제정안’을 발의한 것은 이런 문제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제정안을 보면, 통상정책을 세우는 국무총리 산하 통상위원회 구성을 명시하고 이 위원회를 중심으로 행정부 내 심의 의결기구를 규정하고 있다. 또 사회적 합의를 위한 민간 자문기구 구성과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통상 협상 전체의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를 규정하고 이를 조정 감독할 국회 내 통상특별위원회 구성 근거를 마련했다. 통상절차법은 입법 가능성이나 입법 뒤의 효과를 떠나 통상 협상 관행에 대한 반성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해당사자의 반발을 협상력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은 대미종속적인 우리의 처지를 감안할 때 순진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 걸까?

통상교섭본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이런 글귀가 실려 있다. “통상교섭본부는 통상 교섭 외에도 우리나라의 대외경제 관련 외교정책을 종합적으로 조정 수립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국민’ 여러분들의 든든한 ‘성원’이 있어야 참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국민의 성원이 참여에서 나오는 게 상식이라면, 글귀에 맞는 협상 방식이 마련돼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