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일수씨가 비정규직 차별에 항의하며 분신한 지난 2월14일,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던 또 한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 유아무개(55)씨. 박일수씨의 외침에 가려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가진 것이라곤 몸밖에 없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 지난 2000년 조선업 노동자들의 산재 관련 시위 모습. 산재발생은 계속 늘지만 비정규직 증가에 따른 노동계의 세력 약화로 산재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있다.

현장복귀의 공포감까지는 치료 못해

유씨는 산재 치료를 받던 노동자였다. 지난해 산재 판정을 받아 허리 수술을 했지만, 복직한 지 얼마 안 돼 재발했다. 유씨는 재요양을 위해 병원에 입원한 뒤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유씨가 남긴 일기에는 “허리가 너무 아프고 괴롭다. 살기 싫다”는 등의 신병을 비관하는 내용이 많았다. 현대중공업 노조 관계자는 “유씨가 산재에 따른 심리적 부담을 이기지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유씨처럼 산재 치료 중 자살한 노동자가 점점 늘고 있어 노동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001년 근로복지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산재 치료 중 사망한 노동자 수는 지난 1998년 5명에 그쳤던 것이 이듬해 14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고, 2000년에는 다시 20명으로 증가했다. 공단 관계자는 “공식적인 통계는 아니지만 2002년에는 17명으로 다소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며 “최근에는 집계를 해보지 못했다”고 밝혔다. 민주노총 조태상 산업안전부장은 “최근 산재 치료 중 자살을 택하는 노동자 수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며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산재 치료 중인 노동자들이 자살을 택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산재 치료 시스템이 부실한 탓이라고 입을 모은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임상혁 소장(산업의학과)은 “산재 제도는 산재가 재발하지 않도록 작업 환경을 개선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이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도록 치료도 완벽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하지만 국내 제도는 이런 수준에 한참 모자란다”고 꼬집었다.

△ 구조조정에 따른 노동강도 증가로 생산적 노동자들은 근골격계 질환과 뇌심혈관 질환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현대모비스 제공)

산재를 당하면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겪게 된다. 정신적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은 산재를 당했던 현장에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오는 공포감이다. 임 소장은 “공포감을 없애려면 산재가 발생한 원인을 반드시 해결해야 된다”며 “유럽 선진국들은 산재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가 반드시 산재 원인을 해결하도록 강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심리치료는 엄두도 못 내

그러나 국내 산재 제도는 사업주에 대한 별다른 강제 조항이 없다. 산재가 많이 발생하는 업체는 노동부의 근로관리감독 대상에 오르지만 사망사고가 아니면 실제로 감독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산재가 발생했을 경우 사업주에 대한 불이익도 거의 없다. 기껏해야 산재보험금 부담액이 높아지지만, 사업주가 전혀 부담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작다.

환자의 공포감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심리치료도 병행돼야 하지만 국내 산재 노동자들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임 소장은 “6개월 동안 산재 치료를 받은 환자의 진료기록을 보면 대부분 8∼10장에 불과한데, 이는 분만을 위해 2∼3일 입원한 산모의 진료기록과 비슷한 수준”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산재 환자들에 대한 심리치료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산재 치료 뒤 현장 복귀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담당 의사보다 근로복지공단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담당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가장 잘 파악하기 마련인데, 산재 치료가 끝난 뒤 환자가 담당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 재요양을 신청할 경우 근로복지공단에 의해 불승인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근로복지공단이 의학적 관점이 아닌 행정편의적인 관점에서 산재 업무를 처리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 산재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는 현행 제도는 산재 노동자를 두번 울리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산재 승인을 판정하는 근로복지공단 본부.

노동계에서는 부실한 산재치료 못지않게 사업주가 산재를 은폐하게 만드는 제도적 결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실제로 지난 2002년 연세대 김진수 교수(사회복지정책)가 노동부의 의뢰를 받아 수행한 연구용역에 따르면, 2001년 한햇동안 건설업과 조선업의 산재 은폐 비율은 평균 45%에 육박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00건의 산재가 발생할 경우 그 중 절반에 가까운 45건이 산재로 처리되지 않고 공상(사업주가 치료비를 부담하는 것)이나 노동자의 자비 부담으로 처리됐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선진국은 산재 제도가 잘 정착돼 있기 때문에 산재가 사회 문제가 되지 않는데, 우리는 산재 관련 제도가 현실과 동떨어진 측면이 있어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산재 치료 리스트가 블랙리스트로…

사업주가 산재를 은폐하는 이유는 뭘까. 김 교수는 “산재 제도의 본래 취지와는 동떨어진 각종 인센티브 제도가 사업주의 산재 은폐를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산재 발생 원인을 제거하도록 하는 ‘채찍’은 없고, 조세 감면과 근로감독 면제 등 각종 ‘당근’만 제시하기 때문에 오히려 산재를 은폐하는 역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조태상 산업안전부장은 “업체들이 산재 발생 정도를 부서장 승진 때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것도 작업 현장의 산재 은폐를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산재를 노동 통제의 수단으로 악용해 노동자가 스스로 산재를 은폐하도록 유도하는 업주들도 있다. 울산산재추방연합 현미향 사무국장은 “과거 노동운동을 위해 위장 취업하는 학생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듯이 산재 치료를 받은 하청 노동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하청 계약을 맺을 때 고용하지 않는 업체들이 많다”며 “비정규직이 점차 확산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산재 사망자 수 영국보다 20배 높아 노무현 정권 출범 뒤에도 악몽은 계속… 추락·진폐 등의 전통적 원인보다 뇌심혈관질환 더 늘어 ‘대한민국은 산재공화국’. 박정희 정권 때의 얘기가 아니다.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권도 개발독재 시대 때의 ‘오명’을 떼내지 못했다. 지난 2000년 사망만인율(노동자 1만명당 사망자 수)을 주요 선진국들과 비교해보면 국내 노동자들은 여전히 산재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재로 인한 사망자 수가 영국보다 20배나 높고, 미국과 일본에 비해서도 4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해율은 미국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노동계는 우리나라의 산재은폐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노동부의 통계가 잘못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뒤에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산재가 더 늘어 상황이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부의 통계를 보면 노 정권 출범 첫해인 2003년 1월부터 9월까지 산재 노동자는 모두 6만9960명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만명 이상 늘었다. 산재로 인한 사망자 수도 268명이나 더 늘었다. 지난 2000년과 비교해봐도 사망만인율이 0.57포인트(2.06-1.49)나 더 늘어 노동환경이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망 원인을 분석해보면 추락이나 진폐 등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사고보다, 정신적 스트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뇌심혈관질환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생산설비의 자동화로 위험한 일은 크게 줄었지만, 구조조정으로 인해 노동자 한명에게 집중되는 노동강도는 크게 높아진 때문으로 분석된다. 신자유주의에 무방비로 노출된 현대의 노동자는 과도한 노동강도로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