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겸 기자/ 한겨레 정치부 kyummy@hani.co.kr

여자의 마음을 간질이는 남자의 달콤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유행가 가수는 딱 굶어죽기 십상이다.

심수봉씨의 노래처럼 “이별에 눈물 보이고 돌아서면 웃어버리는 남자”들이기에, 여자들은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에 한숨짓고 때론 훌쩍인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하지만….

△ 여성의 표심을 자극하려는 ‘술수’였단 말인가.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여성광역선거구제’법안을 ‘없던 일’로 마무리했다.(이용호 기자)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이런 ‘애정 사기극’이 벌어져, 6일 만에 들통이 났다. ‘여성광역선거구제’란 감미로운 유혹을 둘러싼 사건이다.

넉달 동안 묵혔다 6일 동안 수면 위로

여성광역선거구제란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 말고도, 전국을 26개로 나눠 여성 후보들만을 대상으로 국회의원을 별도로 선출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4·15 총선에 유권자가 각각 지역구 후보, 비례대표 후보, 여성 후보에게 1표를 행사하는 ‘1인3표제’가 된다.

한꺼번에 여성의원이 26명씩 늘어나는 여성광역선거구제는 민주당에서 강운태 의원이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들고 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당시 몇몇 신문에만 한 귀퉁이에 보일락말락한 크기로 나왔을 뿐이다.

강 의원은 사석에서 “민주당이 여성을 위해 선진적인 안을 내놓았는데, 왜 기사들을 쓰지 않느냐”고 기자들을 채근했다. 눈치 빠른 한 여기자가 이렇게 쏘아붙였다. “여성표를 끌어들이려고 그러시나 본데, 좀 그럴듯해야지 그걸로 되겠어요?”

강 의원도 실현 가능성보다는 여자들의 환심사기용에 무게를 실었던 듯하다. 장성원 의원이 정개특위 간사로 나와서는 이 제도의 내용도 파악하지 못한 채 당론과는 거리가 먼 얘기를 늘어놓고는 했다. 강 의원이 별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여성광역선거구제는 그 뒤 넉달 동안 주목 한번 받지 못했다. 2월 초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이 국회 정개특위에서 이 제도를 다시 제기해 불씨를 살리려 했으나, 워낙 힘없는 소수 여당이라 눈길 한번 받지 못했다. 그러다 한나라당이 2월13일 운영위원회의를 열어, “위헌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여성광역선거구제를 정개특위 최종 협상에서 다루기로 결정하면서 갑자기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전재희 의원 등이 바람을 잡고 최병렬 대표가 뒤에서 거들며 이 안을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호성을 지른 것은 당연히 여성계다. 비례대표가 줄며 정계 진출의 길이 좁아들어 마음 졸이던 여성계로서는 엉뚱한 곳에서 대박이 터진 셈이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정개특위는 16일 간사회의에서도, 17일 선거법 협상소위에서도 여성광역선거구제를 물흐르듯이 통과시켰다. 26명의 여성 대표는 인구 기준에 따라 서울·경기는 각각 5명, 부산·경남은 각각 2명을 뽑고, 나머지 12개 시·도에서 각각 1명을 뽑기로 해, 여성 광역의원의 탄생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남은 것은 18일 정개특위 전체회의를 열어 방망이만 두드리면 되는데, 방망이를 쥔 이재오 정개특위 위원장이 회의를 소집해놓고는 말을 빙빙 돌렸다. “왜 회의를 안 열고 간사회의로 대체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있다”고만 말했다. 이 위원장은 비공개 회의에서 “다른 정치개혁 법안은 다 개정 사항인데 여성광역선거구제는 신설 법안이어서 공청회를 거치는 등 일정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여성광역선거구제 처리에 제동을 걸었다.

회의 참석자는 “이 위원장이 원론적인 절차를 내세워 여성광역선거구제를 처리하고 싶지 않은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날 오후 정개특위 전체회의가 열리자 막혔던 불만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왔다.

△ 총선여성연대가 지난 19일 여성 비례대표 확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이용호 기자)

정의화 한나라당 의원은 “없던 제도를 새로 도입하는 것이므로 졸속 입법을 방지하기 위해 공청회 등 국민적 합의 도출 절차를 거치자”고 제안했다. 선거가 50일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공청회를 하자는 것은 하지 말자는 얘기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이방호 한나라당 의원은 “중대한 제도를 충분한 토론도 없이 여론에 떠밀려 갑자기 시행하면 안 된다”며 “굳이 한다면 26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서 이 가운데 50%를 여성에게 할당하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졸속 입법 내세우는 정당들의 속내

이런 반대파 의원들은 자신의 의견을 펴기 전에 꼭 먼저 하는 말이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가 절실한 문제라 개인적으로는 적극 찬성한다”는 전제를 달고 반대론을 편 것이다.

이는 열린우리당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근태·천정배·유시민·김성호 의원 정도만 분명한 찬성의 뜻을 나타냈고, 나머지 의원들은 대부분 침묵하거나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민주당의 한 의원도 “한나라당이 그렇게 쉽게 받을 줄 몰랐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다들 생색만 낼 생각이었는데, 덜컥 현실로 받아들여지자 갑자기 거부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남성의원들은 왜 모두들 반대하는 것일까? 여성들끼리만 덤으로 더 뽑는 것이라, 밥그릇 뺏길 일도 아닌데 말이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희소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정서적 충격이라는 것이 유시민 의원의 해석이다. 유 의원은 “사무실에서 커피 타고 은행 심부름 가던 김양이 어느 날 머리에 빨간 띠 두르고 노사 협상 테이블에 나타나 눈 똑바로 쳐다보며 ‘존대말 써주세요’라고 말하면 한국 남자들 대부분은 뒤집어진다”고 표현했다. 또 유 의원은 “여성의 정계 진출을 위한 법안을 남성의원들이 주무르는 것은 마치 노동3법을 사용자들끼리 모여서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그럴 일이라면 처음부터 반대하지 왜 버젓이 당론으로 정했을까? 특히 과반수 의석을 쥔 한나라당의 태도가 불투명하다. 김성호 의원은 ‘판흔들기 전략’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열린우리당의 반대로 지역구 의원 증원이 최소한으로 동결되니, 논의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려고 새로운 미끼를 던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이 최병렬 대표 퇴진론으로 어수선한 상황이어서 그런 정도로 ‘심모원려’가 이뤄졌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저 ‘입발린 말’이었을 가능성이 더 커보인다.

실제로 이재오 정개특위 위원장은 2월19일 민주노동당의 여성부 대표를 바로 앞에 두고 “여성광역선거구는 립 서비스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며, 내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 절대 통과시킬 생각이 없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또 2월13일에는 여성단체 대표들의 방문을 받고 면담하는 자리에서 “여성단체의 전략이 잘못됐다. 비례직을 다 없애고 여성광역선거구 46개를 요구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훈수를 두었다는 것이 여성계의 주장이다. 이쯤 되면 어느 것이 진심이고 어느 말이 립 서비스인지조차도 헷갈릴 지경이 된다.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든 것은 여자 가운데서도 반대파가 나왔다는 점이다. 지역구에 출마하려는 여성의원들이다. 17대 총선이 1인3표로 치러진다면 한 표는 여성이 50%를 차지하는 전국구로 돌아가고, 또 한 표는 여성선거구에 찍게 되는데, 유권자들이 지역구에서마저 여성의원에게 표를 던지겠느냐는 걱정이다. 여성의원들로서는 속타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제도는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분명 차원 높은 복잡성을 띠는 게 확실해 보인다.

여성의원도 의견분분… “남자는 다 그래”

대표적인 장면이 열린우리당의 의원총회가 열린 원내대표실 바깥에서 벌어졌다. 누가 여성광역선거구제를 반대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고은광순 중앙위원은 대표실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드나드는 의원들에게 눈빛으로나마 압력을 넣기 위해서다. 마침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김희선 의원이 나오자 고 위원이 다가갔고, 김 의원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이러면 우리끼리 싸우는지 알잖아”라며 고 위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결국 둘 사이에는 고성이 터져나왔고, 이를 지켜보던 남성의원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여자들끼리 싸우는구먼”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18일 정개특위 전체회의를 지켜보며 여성계는 남자들의 진심을 알아버렸다. 총선여성연대는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여성광역선거구제 대신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해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하라고 촉구했다. 현실의 벽을 절감하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정공법을 택한 셈이다. 이로써 여성광역선거구제는 엿새 만에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나마 각 당의 셈법이 너무 달라 비례대표를 얼마나 늘려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여성계는 그저 다시 한번 남성의원들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남자는 다 그래”라는 체념 어린 말로 위안을 삼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