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아니, 그 대기업 임원 부인들 가운데서 바람 안 피우는 사람은 딱 한명밖에 없더라니까!”

몇년 전 서울지검(현재는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찰 간부한테서 기자가 직접 들은 얘기다. 검찰 특수부 수사팀이 부실 경영과 관련해 한 대기업을 수사하면서 임원진들의 전화를 감청한 결과를 말해준 것이었다. 감청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통신비밀보호법에는 ‘통신제한’이라는 모호한 말로 표현해놓았지만 감청은 사실 ‘합법화된 도청’이다. 수사상의 필요 때문이라지만 실제로 24시간 동안 통화 내용을 다 듣다보니 한 사람(을 포함한 그 가족)을 통째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통화 내용 중에는 수사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부분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률은 수사 과정에서 얻은 감청 내용을 외부에 누설·공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그러니까 그 검찰 간부는 불법을 저지른 셈이다!). 그나마 감청은 긴급감청(긴급한 수사상 필요에 따라 36시간 안에 감청을 집행하고 사후에 영장을 발부받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판사한테서 사전에 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이 달려 있다.

△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통화내역 조회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2월17일 SK텔레콤 서울 중부영업소를 찾아 통화내역 조회에 관한 현장검증을 하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의원들.(한겨레 김정효 기자)

애인 확인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

그렇다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통화내역(통신사실 확인) 조회는 어떤가. 통화내역 조회는 통화 내용을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감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개인의 사생활이 공개되는 범위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통화 대상자, 통화시각 및 통화지속 시간, 통화 지역(이동전화의 경우 통화가 이뤄진 기지국이 표시됨) 등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에 통화내역 조회 대상자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은 틀림없다. 조회 대상자와 통화한 상대방의 이름·전화번호·주민등록번호까지 확인되기 때문에 마음먹고 통화시각이나 통화의 빈도를 꼼꼼히 따져본다면, ‘애인’을 확인하는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일 것이다. 통화내역 조회의 대상에는 이동전화, 유선전화, 이메일이 모두 포함된다. 사실상 개인의 인간관계 대부분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통화내역 조회 자료가 본래 목적이 아닌 엉뚱한 목적에 쓰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부터 최근까지 발생한 3건의 언론 관련 통화내역 조회 사건은 ‘국가 안보에 대한 위해’와 ‘수사상 필요’라는 통화내역 조회의 2가지 목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유로도 통화내역 조회가 수시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 때문에 이 문제가 개인의 프라이버시권 침해와 함께 언론자유의 침해라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가장 최근의 사건은 군수사기관인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가 한국일보 기자의 통화내역을 조회한 것이 국회 대정부질문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한국일보가 지난해 5월28일치에 “2002년 6월 서해교전에 대해 국방부와 합참이 ‘북한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선제기습’이라고 했으나, 정보당국은 우발충돌로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한 뒤 기사를 쓴 기자의 통화내역을 조사한 바 있다고 기무사가 2월17일 밝혔다. 기무사쪽은 “기밀사항이 포함돼 있는 내용이어서 통화 조회를 했으나, 서울지검장의 승인을 받은 ‘합법적인’ 조회였다”고 덧붙였다.

△ 통화내역 조회 자료가 본래 목적이 아닌 엉뚱한 목적으로 쓰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거리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시민들.(한겨레 김종수 기자)

기무사 사건 직전에는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 국민일보 기자의 통화내역을 조회한 사실이 드러났었다. 국민일보가 올해 1월 초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외교통상부가 마찰을 빚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내자, 국정원이 기사를 쓴 기자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조회한 것이다. 청와대는 이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나 국정원이 (이 건을 제외하고) 다른 기자들의 통화내역을 조회했는지 여부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혀, 이외에도 기자들의 통화내역을 조회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어떤 목적의 조회인지 명시 안 해

지난해 10월에는 검찰이 수사보안 유출자를 찾아낸다면서 출입기자들의 이동전화 착·발신 번호 등 통화내역을 수시로 조회한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빚었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수사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는 사례가 잇따르자, 안대희 중수부장의 지시로 기사를 쓴 기자의 통화내역을 조회해 수사 정보를 유출한 검찰 관계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려 한 것이다.

3건의 사례 모두 통신비밀보호법이 규정하는 승인은 모두 얻은 ‘합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졌다고 문제가 없는 것일까. 오히려 이 사례들은 현행 법의 허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먼저 ‘국가 안보에 대한 위해’나 ‘수사상 필요’라는 통화내역 조회의 목적이 너무 모호한 점을 수사·정보 당국자들이 악용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기무사나 국정원 사건의 경우에는 국가 안보와의 관련성을 입증하기 어렵다. 국가 안보에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협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기사가 났다는 이유로 기자들의 통화내역을 조회하는 것은 국가기관이 언론자유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를 주도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검찰 사건의 경우는 심각성이 더하다. 단순히 수사상 편의에 불과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 해당 기관들이 통화내역 조회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쓰는 여러 가지 ‘편법’들이 이들 사건에서 드러났다. 국정원 사건에서는 국정원이 국민일보 기자의 통화내역을 조사하면서 관할 지검장의 승인서가 필요한 수사국이 아닌 국정원장의 승인서만으로 조회가 가능한 대테러보안국을 통해 조회를 요청한 ‘편법’이 드러났다. 또 국정원장 명의의 조회 승인서를 국정원 내부 규정에 따라 각 지부의 지부장 등이 전결 처리하는 문제점도 드러났다. 조회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판단을 국정원장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부의 지부장이 직접 한다는 것이다. 요청서가 너무 많아서 국정원장의 도장을 찍는 요식 절차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대검 중수부 사례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드러난 바 있다. 먼저 수사기관이 조회를 요구할 때 대부분 어떤 목적으로 통화내역을 조회하려는 것인지를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경찰 등 수사기관이 검사장에게 제출하는 승인서에는 전화번호와 법률 이름만 적혀 있고 통화내역 조회가 필요한 간단한 소명자료도 없다. 승인 주체로서도 왜 승인을 해주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는 셈이다. 검찰의 내부 승인 절차 역시 몹시 허술하다. 검찰은 국정원과 마찬가지로 검사장이 아니라 차장검사가 검사장 도장을 찍는 식으로 전결 처리하고 있다.

사후 승인 없는 조회 일상화

상황이 이렇다보니 불법이 일상화하고 있다. 통화내역 조회는 사전에 승인을 받아야 하고 긴급 조회의 경우에는 7일 안에 사후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2002년 3월부터 지난해 6월13일까지 1년3개월 동안 사후 승인마저 없는 불법 조회가 1966건(검찰 289건, 경찰 1665건, 군수사기관 10건, 기타 2건)이었다. 국회에서 문제가 제기되자 관련 기관들은 부랴부랴 승인서를 다시 만들었지만, 지난해 하반기 6개월 동안 다시 140건의 불법 조회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정보통신부가 공개한 지난해 통화내역 조회 건수는 모두 16만7041건이다. 그러나 이는 한건을 신청하면서 여러 개의 전화번호를 함께 요청하는 관행에 비춰보면 실제보다 훨씬 줄어든 수치다.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실이 전화번호별로 계산해본 결과 모두 65만여건(이동전화 32만여건, 유선전화 33만여건, 인터넷 1900여건 등)이었다. 1년 내내 구속사건 한건 처리하지 않는 국정원이 지난 한햇동안 한 통화내역 조회는 7281건(전년 대비 40.5% 증가)이었다. 권 의원은 “통화내역 조회를 너무나 하찮게 생각하는 수사·정보 기관들의 의식과 관행이 바뀌고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는 한 심각한 문제가 잇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