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02월19일 제49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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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개혁’과 함께 사라지다

서동만 전 기조실장은 왜 1년도 못 채우고 물러났나… ‘안정’ 강조한 고 원장과의 갈등설도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 의욕적으로 국정원 개혁을 추진하다 1년도 못 채우고 물러난 서동만 전 기조실장. 그와 고영구 원장은 개혁의 방향을 놓고 갈등해온 것으로 알려졌다.(이용호 기자)

외교부에 이어 국정원 내부의 ‘파열음’이 심상치 않다.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은 지난해 4월30일 “국정원 기조실장은 국정원 개혁의 핵심 간부”라며 한나라당과 국회 정보위가 이례적으로 ‘절대 불가’ 의견을 낸 서동만 상지대 교수의 기조실장 임명 배경을 발표했다. 그는 이어 “서 실장은 북한을 잘 아는 통일·안보 분야의 전문가로서, 고영구 국정원장을 보필해 국정원 조직 개혁을 추진할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서 실장은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개혁의 깃발을 뒤로 한 채 물러났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정권에서도 원장이나 차장들이 수시로 갈린 적은 있으나, 외부 활동부서를 지원하는 업무를 맡는 기조실장이 이처럼 조기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기조실장은 인사와 예산, 조직을 모두 틀어쥐는 자리다. 이런 자리의 성격 탓에 기조실장은 대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인물이 대개 맡는데다, ‘외풍’의 직격탄을 맞는 경우도 드물다.

부서장 인사 둘러싸고 충돌

서 실장이 더욱 주목을 받은 것은 이전과는 달리 ‘국정원 개혁’이라는 뚜렷한 임무를 부여받고 국정원에 들어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갑작스런 경질 사유는 뚜렷하지 않다. 정찬용 인사보좌관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답답하다.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했다”고 얼버무려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많은 이들은 서 실장이 노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인 실세인데다, 정치권과의 어정쩡한 타협을 거부하고, 사리사욕이 없는 청렴·강직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국정원 개혁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어왔다. 실제로 그는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국정원을 만들기 위해 개혁의 청사진을 직접 짰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바쳐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국정원 개혁의 핵심은 국내 정치와의 단절에 있었다. 정치사찰 시비를 최소화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확고히 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우수한 국정원 직원들의 역량을 동북아 중심국가 등 핵심 국정과제 수행에 필요한 정보의 제공에 집중시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 지난해 2월25일 청와대에서 임명장 수여식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고영구 국정원장. 청와대는 국정원의 내부 갈등을 조기 진화하기 위해 고 원장의 손을 들어줬다.(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런 서 실장이 말 없이 국정원을 떠났다. 기조실장 임명을 둘러싼 무차별 색깔공세까지 꿋꿋이 이겨냈던 그다. 어떤 말 못할 사정이 그를 바깥으로 내몬 걸까. 그리고 앞으로의 국정원 개혁은 어떻게 되나. 4월 총선을 앞둔 시점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인사라는 점에서 서 실장의 경질과 국정원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곱지 않다. 국정원 내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들의 말을 모아보면 서 실장의 교체 배경에는 국정원 내부 갈등이 고조돼왔고, 이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서 실장과 고영구 원장 사이의 ‘불화설’이 단연 눈길을 끈다. 언론들은 ‘안정적 개혁’을 내세우는 고 원장과 다소 급진적 개혁을 추진한 서 실장 사이의 마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 않아 보인다. 지난 연말 인사 때 기조실장 밑에서 인사와 예산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부서의 장 인사를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내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들에 따르면 고 원장은 조직 안정에 무게를 둔 인사를 원했고, 서 실장은 세대교체에 비중을 둔 인사안을 냈다. 문제는 고 원장이 서 실장의 견해를 무시한 채 노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의 인사 발령을 낸 점이다.

서 실장은 이런 관행이 내부 개혁의 명분을 크게 약화시킬 뿐 아니라, 후속 인사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고 원장의 ‘재고’를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 내부의 다른 고위 간부들도 서 실장의 견해가 일리가 있다고 동의를 표시했으나, 고 원장은 인사를 강행했다는 게 소식통들의 귀띔이다. 문제의 국장은 특정 지역 출신으로 계급정년도 얼마 안 남은 인물로 알려졌다.

청와대, 내부 갈등 조기 진화 의도

이런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고 원장은 왜 무리수를 둔 걸까. 정보기관 수장의 복잡한 속내를 투명하게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는 게 현실이다. 고 원장은 일단 조직의 안정에 비중을 둔 듯하다. 서 실장의 개혁 의지를 ‘과잉 의욕’으로 해석했을 가능성도 있다. 외교부에 이어 국정원까지 내부 갈등의 불씨를 조기에 진화하지 못하고 방치할 경우 노무현 정부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는 우려도 한 듯하다. 1년도 채 안 된 기조실장을, 그것도 노무현 대통령 탄생의 일등공신을 조기에 퇴출시킬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뭔가 ‘다급한 사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노 대통령은 결국 상급자인 고 원장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노 대통령의 이런 쉽지 않은 결단을 놓고 여러 분석들을 내놓았지만, 대체로 국정원 기득권 세력을 더는 흔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김만복 국가안보회의(NSC) 정보관리실장을 후임 기조실장으로 임명한 것도 노 대통령의 의중을 잘 보여준다. 청와대쪽은 김 실장이 30년 동안 국정원에 몸담아온 인물로서 원만한 대인관계를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개혁보다는 조직 내부 동요를 잠재우는 적임자를 선택한 셈이다.


△ 김만복 신임 기조실장. 청와대쪽은 그의 원만한 대인관계를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한겨레)

서 실장은 국정원 개혁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으로 ‘인사’에 주목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그는 다른 부처에 비해 국정원 간부들의 나이가 너무 많아 이들에게 개혁작업을 맡기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고민을 토로했다. 또 그는 특정 지역 편중 인사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도 여러 차례 비쳤고, 실제로 점진적인 세대교체를 개혁의 핵심 과제로 삼았다. 그래서 지난 5월 인사 때 조직 개편을 통해 1~2급 부서장을 큰 폭으로 물갈이하는 1단계 인사를 단행했다. 그동안 국정원 간부의 주축을 이루던 공채 10기(1974년 입사) 이상을 모두 부서장에서 보직해임해 대기발령하고, 아래의 공채 11~13기 출신 20명을 1급으로 승진시켜 각 부서장에 발탁한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 고위간부 인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이전 정권처럼 강제로 옷을 벗길 수 없고,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인사를 해야 하는 터라 아무래도 세대교체는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서 실장은 젊고 개혁적인 성향의 직원들로부터는 호평을 받았으나, 고위 인사들과는 늘 약간의 긴장을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연말 정기 인사 때 특정 국장 인사를 놓고 고 원장과 팽팽하게 맞섰던 까닭도 그가 특정 지역 출신 인사라기보다는 세대교체를 관철시키려는 절박함으로 읽힌다.

고위간부들의 조직적 반발도 한몫

‘반서동만 정서’를 가진 일부 고위간부들의 조직적 반발도 이번 인사에 한몫한 듯하다. 이들은 고 원장쪽에 밀착해 서 실장을 강하게 압박하고,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게 내부 소식에 밝은 인사들의 지적이다. 기조실장으로서 건방지다거나 지나치게 비타협적이라느니, 조직 장악과 업무수행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얘기들이 지난 연말에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내부 인사를 두고도, 서 실장이 호남인맥을 뿌리뽑으려 한다는 악의적 소문을 퍼뜨려 동조자를 규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이런 사태는 일찍이 예견되었던 일이기도 하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서 실장의 취임 이전 그의 국정원 입성을 막기 위해 총력전을 폈던 이들로 알려지고 있다. 총선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서 국정원의 역할 강화를 촉구하는 청와대 일부 세력과 여권이 ‘상대하기에 부담스러운’ 서 실장의 사퇴를 은근히 부추겼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정권이 흔들릴수록 정보기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역대 정권의 경험에 비춘 분석이다. 국정원이 이런 바깥의 우려의 시선들을 어떻게 거둬들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