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02월12일 제49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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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위원’ 입증 쉽지 않소이다

송두율 교수 법정 공방 막바지… 학술회의 통한 주체사상 전파 가능한가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지난해 가을,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간첩’이라는 해묵은 단어가 세상을 뜨겁게 달궜다. 사문화됐던 국가보안법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한가하던 일부 보수 정치인에게는 ‘재기의 발판’이 마련됐다.


△ 지난해 가을, 송두율 교수를 둘러싼 논란은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송 교수 사건은 세간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지만, 법정에서의 치열한 공방은 어느덧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다.(한겨레 김종수 기자)

37년 만에 고향을 찾은 송두율 교수는 보수언론이 주도한 여론재판에서 검찰의 기소 내용에도 없는 ‘간첩’이 되어버렸고, 양력과 음력 새해를 모두 구치소에서 맞았다. 이미 송 교수 소식은 대부분의 언론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지만, ‘죄과’를 둘러싼 변호인과 검찰의 치열한 공방은 조용하고 꾸준하게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다.

한주나 두주를 거른 화요일, 송 교수의 재판이 열리는 서울지방법원 311호 재판정은 항상 100여명의 방청객들로 북적댄다. 개인적 호기심에서 찾은 대학생부터 “재판부가 (송 교수를) 너무 봐준다”며 불만을 털어놓는 6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

한때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 회원들과 송 교수 대책위 관계자들이 마찰을 빚는 일도 있었지만, 송 교수 사건이 잊혀지면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재판정을 찾는 발길도 잦아들었다. 덕분에 재판장이 재판 도중 “조용히 하세요” 하고 방청객들에게 경고하는 횟수도 크게 줄었다.

송 교수는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가입 및 지도적 임무 종사 △특수탈출 및 회합통신 △사기미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가장 큰 쟁점은 국가보안법 3조인 ‘반국가단체 가입·지도적 임무 종사’ 혐의다.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을 받을 정도의 중형이다.

노동당 가입이나 금품 수수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정치국 후보위원 혐의는 아직 시효가 지나지 않아 처벌이 가능하다. 검찰은 송 교수가 1991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뒤, “북의 지령을 받고 북한의 현실을 호도하고 찬양하기 위한 저술활동”을 했고, “북의 지령을 받고 주체사상 전파를 위해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 송두율 교수의 공판이 있는 날이면 보수단체 회원들과 송 교수 대책위 관계자들은 종종 마찰을 빚기도 한다.(한겨레 임종진 기자)

정치국 후보위원 물증 뚜렷이 없어

검찰은 “어디서·어떻게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됐는지 명시하지 않고 있다”는 변호인의 주장에 대해, “북한은 노동당 규약을 무시하고 후보위원을 선임할 수 있다”며 “재판 과정에서 증거를 제시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아직 뚜렷한 증거는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변호인쪽 증인으로 나선 유영구 전 중앙일보 북한 전문기자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은 부총리급 이상에게 주어지는 자리로, 송 교수처럼 해외에 있는 외국인에게 그런 자리를 주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증언했다. 북한이 송 교수가 후보위원이었다고 확인해주거나 확실한 물증이 나오지 않는 이상, 후보위원 선임은 증명되지 못할 공산이 크다. 결국 송 교수가 저서와 남북통일학술회의를 통해 주체사상 전파의 ‘지도적 임무’를 했는지가 재판의 쟁점이 되는 셈이다.

변호인쪽은 당시 학술회의를 주도했던 길승흠 전 서울대 교수와 권만학 경희대 교수 등을 증인으로 채택해 반격에 나섰다. 한국정치학회 회장을 지낸 길 전 교수는 재판에서 “송 교수가 학자 구성이나 주제 선정에 개입한 적도 없었다. 학술회의가 북한의 일방적 정책선전이라면 남한학자들은 ‘핫바지’란 말이냐”고 말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학술회의 자체가 북쪽에 의해 남쪽이 이용당한 것 아니냐”는 검찰의 의혹에 대해 권만학 교수도 “북한 학자들이 엄청나게 유능해 우리 학자를 가지고 놀았다는 주장이야말로 북한이 우리에 비해 엄청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며, 이는 곧 국가보안법 위반이다”라고 반박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송 교수 저서의 이적성을 둘러싼 공방도 재판 내내 이어졌다. ‘북한의 입장에서 북을 바라본다’는 송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이 ‘주체사상의 선전도구’인지를 가리는 것이다.

송 교수의 입북 권유 들어본 적 없어

변호인쪽 증인으로 나선 박순성 동국대 교수는 내재적 접근법에 대해 “현재 학계에서 일상화된 형태로 발전했으며, 연구방법론으로서는 ‘시민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방법론”이라고 소개했다. 또 박 교수는 송씨의 주체사상 연구에 대해서도 “연구 결과를 이념으로 재단하면 학문의 발전은 없다”고 일갈한 뒤, “주체사상을 이해한다고 해서 주체사상을 찬양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박 교수 등 북한 연구학자들은 송 교수가 한국에서 출간한 저서에 대해 단체 감정서를 제출했다.


△ 송 교수의 부인 정정희씨는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한겨레 김태형 기자)

반면, 검찰쪽은 송 교수가 ‘후보위원으로서 지도적 임무’를 수행할 만큼 친북적임을 증명하는 데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첫 번째 증인으로 김광동 나라정책원 대표를 채택해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평가를 들은 것 말고는, 송 교수의 친북 행적을 증명하는 증인들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검찰은 우선 송 교수가 지난 1985년 독일 유학생 오길남씨에 대한 입북 권유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이 불가능하지만, 검찰로서는 송 교수의 ‘친북성’을 증명할 수 있는 주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검찰쪽 증인으로 나선 오길남씨는 지난해 12월6일 비공개로 진행된 재판에서 “(입북은) 송 교수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며 “송 교수는 ‘내 권유에 따라 결단해줘 고맙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변호인쪽은 “오씨는 북에서 나온 뒤 처음에는 송 교수를 언급하지 않다 뒤늦게 언급하고, 자신의 책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줘>에도 송 교수의 입북 권유 내용은 없는 등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또 변호인쪽 증인인 고려대 환경대학연구소 양정옥 연구원도 “독일 유학 시절, 오씨에게서 방북 과정을 상세히 들었지만 송 교수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고 김아무개라는 사람을 통해 입북했다는 얘기를 몇 차례 들었다”고 증언했다.

지난 1999년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김경필씨가 작성했다는 이른바 ‘김경필 파일’에 대한 공방도 계속됐다. 이 문서에는 지난 1997년 황장엽씨가 남한으로 망명하자, 송 교수가 김씨를 만나 “황장엽이 내가 지도부 성원인 것을 알고 있느냐”며 걱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송 교수쪽은 “지도부 성원은 북에서만 쓰는 말일 뿐, 송 교수 등 외부인은 쓰지 않는다”며 “김씨가 보고를 위해 임의로 각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보법 3조 위헌성 검토 요청 예정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세계적인 석학인 위르겐 하버마스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 등 국내외 저명인사들의 탄원서는 끊임없이 재판부에 전해졌다. “38년 동안 독일인으로 살아왔다”는 부인 정정희씨는 1인 시위 등을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적극 결합하고 있다. 송 교수 변호인단은 ‘반국가단체 가입 및 지도적 임무 종사’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국가보안법 3조에 대해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할 계획이다. 김형태 변호사는 “‘지도적 임무’라는 것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이 가능하고, 이는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된다”며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직접 헌법 소원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관광버스를 타고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 시대에, 남북을 모두 안으려 했던 송 교수는 1평 남짓한 구치소 방에서 ‘에포케’(일시정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미 사라져야만 했을 것들이 아직도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다”는 송 교수의 규정은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