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3년11월05일 제483호 

가압류에 죽거나 말거나…

손배 · 가압류 제도 정부 개선안 미봉책에 그쳐… 파업 합법성 강화 · 가압류 범위 조정 이견 여전

파업 손해배상·가압류를 둘러싼 노사 대립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정부가 최근 잇따르고 있는 노동자 자살 사태와 관련해 가압류 개선책을 내놨으나 노동계와 재계 양쪽으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다. 노동계는 근본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경우 11월12일 전면 총파업을 강행하는 등 강경 투쟁을 예고했고, 재계는 파업 손배·가압류 제도를 현행대로 고수할 것을 정부에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29일 강금실 법무장관,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 권기홍 노동부 장관이 합동 담화문을 발표하고 가압류 개선책을 제시했다. 정부는 가압류 한도를 현행 임금 채권의 50%에서 최저임금 또는 최저생계비로 낮추고, 신원보증인의 재산에는 가압류를 하지 않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파업에 참가해 가압류를 당하더라도 노동자의 최저생계를 보장해주겠다는 의도다. 정부의 이런 방침에 따라 대법원도 사용자가 가압류를 신청할 때 공탁금을 걸게 하고, 한번 기각된 가압류는 다시 받아들이지 않는 등 가압류 심사기준을 강화하기로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가압류는 노동 문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고 민사법 체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며 “이 정도 수준이면 노동계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파업 손해배상 · 가압류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지난 10월25일 대학로에서 가압류에 맞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위원장 추모 집회가 열리고 있다.(류우종 기자)

노동계는 근본 대책, 재계는 현행 고수

그러나 노동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민주노총은 정부 대책이 발표된 직후 “정부 대책은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없는 미봉책”이라고 혹평했다. 민주노총 법률원 강문대 변호사는 “최저생계비나 최저임금은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가압류 기준으로 삼기가 어렵다”며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를 가압류 한도로 한다면 이를 둘러싼 노사 대립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도 이런 의견에 동의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이형준 법제팀장은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는 정확히 산정하기도 어렵고 유동적이어서 채권자(사용자)의 이익을 보호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를 가압류 한도로 할 경우 노동자에게 꼭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지난 8월 최저임금위원회가 결정한 올해 최저임금은 한달 56만원인데, 월급이 120만원이 넘는 노동자의 경우 파업으로 가압류를 당했을 때 최저임금을 한도로 하면 종전보다 더 적은 월급을 받게 된다. 최저생계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올 초 발표한 최저생계비는 4인 가족은 100만원, 2인 가족은 58만원이지만 1인은 35만원으로 최저임금보다 훨씬 적다. 노동부 관계자는 “노동자의 최저생활을 보장한다는 취지로 개선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노동계는 더욱 근본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업 과정에서 심각한 폭력행위가 없는 한 노조나 조합원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권영국 변호사는 “현행법은 합법 파업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도록 돼 있는데, 합법 파업의 범위가 너무 좁아서 쟁의행위가 폭력적이지 않고 단순히 노무 제공을 집단적으로 거부하는 형태로 이뤄지는 것도 거의 배상책임을 부담하게 돼 있다”며 “파업 손해배상의 범위를 제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손해배상 책임이 있는 경우에라도 가압류는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압류가 ‘채권 강제집행을 위한 보전’이라는 본래 목적보다 노조 탄압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권 변호사는 “이런 내용의 노동법 개정안을 입법청원 형식으로 국회에 제출했으나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라고 국회의 무관심을 꼬집었다.

재계가 노동계의 이런 주장에 동의할 리 만무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경총은 “파업 손배·가압류는 불법파업에 대한 사용자의 정당한 자구책이므로 노동자에게 특혜를 줘서는 안 된다”며 “외국의 경우에도 불법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제한하거나 민사집행상의 특혜를 인정한 사례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미국은 물론 노조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유럽의 나라들도 파업에 대한 손배·가압류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신 프랑스의 경우 가압류에 대한 노동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가압류 범위를 세분화했다. 건국대 조용만 교수(노동법)는 “프랑스는 임금을 액수에 따라 7단계로 나눈 뒤 각각의 수준에 맞게 가압류 범위를 조정한다”며 “그 결과 가압류를 당한 노동자가 우리나라에 비해 생계에 압박을 덜 받는다”고 말했다.


사진/ 정부는 지나친 손배 가압류를 막기 위한 법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0월29일 노동자의 자살·분신 사태와 관련, 행정자치·법무·노동부 장관 등이 공동명의의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한겨레 김종수 기자)


도대체 합법 파업이 가능하단 말인가

학계에서는 파업 손배·가압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파업의 정당성(합법성)을 둘러싼 노·사·정의 대립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용만 교수는 “프랑스나 독일에서 파업 손배·가압류가 사회 문제로 비화되지 않는 것은 합법 파업의 범위가 넓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이 불법이지만, 프랑스는 합법적인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올해(10월30일 현재) 총 302건의 파업 중 25건이 불법파업으로 판정받았는데, 불법 판정의 이유는 구조조정이나 민영화 반대, 직권중재 기간 중 파업 등 목적이나 절차를 위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중앙대 유성재 교수(노동법)는 “국가가 노사 관계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파업의 정당성 범위를 더 넓게 열어서 노사가 극한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막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사가 합의를 통해 파업의 합법성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는 것은 아득해 보인다. 눈앞에 닥친 가압류 문제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재계가 합법 파업의 범위를 넓히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고, 재계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회도 노동계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노동계의 제안은 노동법을 개정해야 가능한 일인데, 그것이 과연 국회를 통과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게 한국 노사문화의 현실이다. 노동계와 재계는 지금 ‘동투’(冬鬪)를 향해 마주 보고 달리고 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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