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이양 문제를 두고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와 미 점령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이, 이라크 국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폭압적인 옛 정권은 무너졌지만, 새로 들어설 정부 역시 그들이 원하는 모습과 점차 거리가 느껴지는 탓이다.
지난해 12월29일 과도통치위는 불과 15분여의 토론 끝에 그동안 민사법원이 관할해온 결혼과 이혼, 상속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종교지도자에게 넘기는 것을 뼈대로 한 ‘행정명령 137호’를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새 정부가 들어선 뒤 한 남자가 몇명의 부인을 거느릴 수 있는지에서 이혼시 자녀 양육권, 여성의 상속권 인정 여부 등이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석기시대로 회귀하려느냐”며 여성계가 집단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해방정국’을 맞아 희망보다 걱정이 앞서는 건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1월21일치 기사에서 <알자지라>에 나와 직접선거를 통한 임시정부 구성을 촉구하는 시아파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시스타니의 주장에 찬성하는 의견을 내놓은 지 12시간 만에 살해된 알둘 라티프 마야흐 무스탄시리아대학 교수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 대학에선 마야흐를 포함해 지난 8개월 동안 모두 4명의 교수가 정치적 소신을 밝힌 뒤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은 마야흐의 동료 교수 아흐메드 아라위의 말을 따 “그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면, 반대편에서 암살을 시도했을 것”이라며 “누구든 암살자의 목표물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이어지는 한, 지식인들은 소신을 펴는 걸 극도로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라크의 언론 상황 역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미국 정부가 아랍권 위성방송에 대항하기 위해 960억달러를 들여 설립한 <알이라키아>는 개국 이전부터 ‘점령당국의 대변인’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신문시장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지난 1월8일 <워싱턴포스트>는 “이라크에서 현재 발행되고 있는 6개 일간지 가운데 독립언론은 고작 1개에 불과하며, 나머지 5개는 각 정당이나 미 점령당국이 운영하는 것들”이라고 전했다. 이라크인들이 <알자지라>나 <알아라비아> 등 해외 위성방송 보도만 믿으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라크 침공에 앞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독재자를 몰아내고 이라크에서 민주주의를 싹틔워 중동 전역에 ‘민주화 도미노’를 일으키겠다”고 호언했다. 그로부터 10개월여가 흐른 지금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라크인들이 마주할 민주주의의 모습은 미국인들이 누리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리라는 점이다.
정인환 기자/ 한겨레 국제부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