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예정지의 슬픔과 분노, 희망에 울고 웃는 영화 <1번가의 기적>…가난에 대한 문제의식과 적나라한 현실 묘사는 그 자체로 놀라운 기적
▣ 황진미 영화평론가
<1번가의 기적>은 철거 예정지에 강제로 동의서를 받으러 온 양아치(임창정)가, 그곳 아이들과 여성 복서(하지원)에게 정이 드는 과정을 그린 휴먼 드라마이다. 영화는 코미디로 홍보되고 있고, 임창정과 아역 배우들의 대사가 적지 않은 웃음을 터뜨리지만, 영화 전체가 품은 정서는 슬픔과 분노이다. 영화는 코미디의 외피 속에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스템적인 폭력과 부조리를 고발하며, 슬픔과 분노를 희망의 이름으로 정화한다.
코미디이면서 슬프다니, 그럼 (과장된 상황으로 헛웃음을 유발하다가, 작위적인 슬픔으로 감정을 착취하는) 이른바 ‘웃기다 울리는 영화’란 말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1번가의 기적>이 던지는 웃음은 과장 없이 담백하며, 슬픔 또한 극히 현실적이다. 임창정의 ‘양아치’ 연기는 오버하지 않고 절제되어 있으며, 분신 장면을 카메라가 직접 잡지 않는 등 슬픔에 대해서도 선정성을 피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게다가 웃음과 슬픔의 절묘한 배합으로 감정선을 무너뜨리지 않는데, 가령 너무나 슬픈 토마토 세례 장면에서 눈물을 잡아빼며 길게 끌지 않고, 곧 즐거운 물장난 장면으로 이어나가며, 다시금 희망의 끈을 부여잡는 식이다. 이처럼 감정선이 살아 있는 자연스러운 편집을 이 영화의 최대 장점으로 꼽을 만하다.
밥상을 덮치는 포클레인의 악몽
형식적인 측면에서 영화의 균형감도 놀랍지만, 진정 놀라운 것은 가난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1번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외부에서 온 임창정이 그들의 삶에 동화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외부인이 지역민에게 동화되는 서사는 특별한 게 아니다. <선생 김봉두>나 <마파도> 등 비슷한 서사가 많다. 그러나 <1번가의 기적>은 이들 영화와 달리 ‘1번가’를 이상향으로 그리지 않는다. 영화는 가난한 사람들을 미화하거나, 가난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적나라한 방식으로 구체적인 그들의 사연에 밀착해나간다. 암에 걸린 고물장수 할아버지가 돌보던 부모 없는 아이들, 권투선수였으나 부상으로 수십 년 째 누워 있는 홀아비를 돌보기 위해 일당 2만5천원을 받으며 막일을 하는 여성 복서, 홀어머니와 달동네를 창피하게 여기며 매일 슈퍼에 맡긴 운동화를 갈아신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아가씨, 언제나 몽둥이를 들고 철거 용역을 내쫓다가 마침내 라이터 불을 그어대는 아주머니 등등. 그들은 착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억척에다 막무가내이다. 동네에 하나뿐인 푸세식 공중화장실에, 수돗물도 안 나오고, 비 오면 지붕이 줄줄 새는 열악한 환경에서, 그래도 이 마지막 터전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악을 쓰는 그들. 그들은 안다. 보상금 수백만원으론 월세방 얻기도 빠듯하며, 그들의 수입으론 조만간 월세를 감당치 못하고 다시 쫓겨날 것이란 사실을. 그들의 가난은 무지나 의지 부족 탓이 아니며,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벼랑 끝까지 내모는 사회적 폭력에 의한 것임을 영화는 분명히 한다.

△ <1번가의 기적>은 가난을 낭만화하지도, 섣부른 화해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금 여기의 분노와 슬픔을 직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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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막 같은 곳도 추억이 될까
영화 속 철거 장면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인가?’ 반문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그동안 부동산 재개발과 철거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 있어왔지만, 대부분 조폭의 입장에서 ‘철거는 험하고 부담스럽지만, 처리해야 할 업무’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1번가의 기적>은 철거민의 시선으로 철거를 바라본다. 무력하지만 악을 쓰며 저항하는 부녀자들과 영문도 모른 채 집이 박살나는 광경을 보아야 하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철거란 삶의 터전을 파괴당하는 공포스러운 외상(外傷)임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할아버지와 아이들의 밥상을 덮치는 포클레인의 악몽! 영화 속 아이들은 동요를 두 번 부른다. 첫 번째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임창정이 받는다. “너희들 강변 살고 싶구나, 강변 땅값이 얼만지 알아?” 두 번째 임창정이 아이들에게 시킨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헌집이 부서지면 새집이 지어지겠지만, 그 집이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누구나 안다. 마치 소설 <상록수>에서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이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는 <농민독본>의 구절을 “목구멍이 찢어져라 바락바락” 부르짖듯, 이 노래는 처참한 역설이자 발악이 된다.
영화의 말미는 판타지로 장식되지만, 이것이 무성의한 봉합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의 서사에서 불가능한 화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하지원이 최선을 다한 경기의 마지막, 관장은 “네가 이긴 거야” 말하지만 3:0으로 판정패한다. 그러나 라커룸에서 아버지로부터 챔피언 벨트를 받는 그녀는 새로운 용기를 얻는다. 임창정은 조직에 저항하지만, 얻어맞을 뿐 철거를 막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희구하게 된다. 그들은 객관적으로는 패하지만 주관적으로는 승리한다. 영화는 판타지를 통해 각자 꿈꾸는 가장 좋은 미래를 보여준다. 소년은 하늘을 날고, 동네는 그림 속 놀이동산이 되고, 아이들은 엄마를 만나고, 연애는 결실을 맺고, 복서는 챔피언이 된다. 그리고 내레이션이 흐른다. “이 사막 같은 곳도 추억이 될까요?” “그건 우리 마음에 달렸지.”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지만, 빈곤 문제는 <다세포 소녀>에서처럼 희화화되기 일쑤이고, 슬픔과 분노 역시 <그놈 목소리>에서처럼 과거의 특정 사건으로 국지화되는 상황에서, <1번가의 기적>이 취하는 태도는 올바르다. 지금 이 사회에서 실제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슬픔과 분노를 직시하고, 동시에 이를 이겨나가기 위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이 영화의 놀라운 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