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타인들이 아름답게 찍혀 있는 사진들은 거짓이야. 예술을 감정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속물들은 그게 아름답다고 말하겠지. 그러나 이 사진 속 사람들은 슬프고, 외로워. 사진들은 세상을 언제나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
▣ 김도훈 <씨네21> 기자
얼마 전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가진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작은 카메라의 사나이였다. 그는 당시의 사진작가들이 애호하던 중형 카메라 대신 가볍게 손에 들어오는 소형의 라이카를 들고 다녔다. 그는 카메라 플래시 같은 인위적 빛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고, 인간의 눈높이를 벗어나는 시각을 왜곡된 시각이라 여겼기에 표준 렌즈만을 사용했다. 그것은 “사진은 어떤 사실의 의미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한순간에 동시에 인지되는 것”이라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유명한 사진집 <결정적 순간>은 이러한 브레송의 철학 속에서 나온 마술이었던 것이다.
최근에 조그마한 디카를 지른 나는 브레송의 잠언을 한번 실천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도저히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이 포착되지 않는다. 아마추어와 프로 사진작가들의 사이트들을 밤새 돌았다. 이상하게도, 수천 장의 사진 중 ‘결정적 순간’이라 이름 붙이고 싶은 것은 얼마 없었다. 결정적 순간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고난한 작업을 거쳐 결정‘된’ 순간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포기하다시피 한 내가 마침내 결정적 순간을 발견한 것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든 소녀들의 이름 없는 블로그에서였다. 책상에 엎드려 잠든 친구들, 교복 치마 아래로 체육복을 입고 걸레질을 하는 친구들, 그들의 흔들리는 순간이 30만 화소의 흐릿한 화질 속에 살아 있었다. 결정적 순간이구나. 무릎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