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문화&과학 > 문화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2월09일 제596호
폭력의 순환, 그 음울한 세밀화

‘CNN 스펙터클’이 현실이 된 시대, 영화 <뮌헨>은 무엇을 말하려는가
이스라엘 암살단과 팔레스타인 테러범에게서 발견한 복수의 정치학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지금, 지구촌에서 폭력은 스펙터클이 됐다. 이라크에 폭탄을 퍼붓는 미국의 공습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돌진하는 알카에다의 테러도 스펙터클로 재연된다. 의 카메라를 통해 마치 영화처럼. 우리는 거대하게 구성된 폭력의 스펙터클, 폭력의 표면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폭력이 휩쓸고 간 비극의 잔해들을 구경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뮌헨>은 폭력의 스펙터클 뒤에 감춰진 인간의 이야기다. 스필버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폭력의 적대적인 상호의존성에 대해 163분의 러닝타임 동안 음울하게 이야기한다.

5인조 암살단의 흔들리는 믿음


<뮌헨>은 테러의 발생학에서 시작한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현대적 의미의 테러가 시작됐다. 팔레스타인 테러조직 ‘검은 9월단’의 조직원 8명은 올림픽 선수촌으로 침입해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인질로 잡는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감옥에 갇힌 팔레스타인인의 석방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타협을 거부한다. 결국 테러리스트들은 인질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은 비극을 부른 테러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서 자신과 민간인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테러의 전범이 만들어졌다. <뮌헨>은 제목과 달리 뮌헨 참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뮌헨 참사 이후에 대한 이야기다. <뮌헨>은 뮌헨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인물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뮌헨의 비극이 끝난 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애브너(에릭 바나)를 주축으로 도주, 폭발물, 문서 위조, 뒤처리를 담당하는 5인조 전문가로 암살팀을 구성한다.

애브너를 비롯한 5인조 암살단은 11명의 배후인물을 차례로 살해한다. 폭력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당연히’ 이들의 믿음은 흔들리게 된다. 애브너는 우연히 죽여야 할 대상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그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 테러의 배후인물인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테러범을 응징하기 위해 민간인의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이제 윤리의 문제에 부딪힌다. 정말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깊어간다. 그렇다고 희생을 통해 (그들이 생각하는) 악의 뿌리를 뽑지도 못한다. 정작 자신들이 제거한 자리에는 (더욱 지독한) 새로운 인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그래도 ‘일’은 계속된다. 외부의 악순환을 만나면서 내면의 갈등은 심화된다. <뮌헨>이 폭력의 악순환을 다룬 영화라면, 스치듯 지나가는 텔레비전의 장면들에 주목해야 한다. 애브너의 암살과 테러범의 복수는 서로 맞물리면서 폭력의 순환을 완성한다. 애브너 암살단이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인물 한 명을 제거하면 텔레비전은 세계 각국의 이스라엘 대사관에 폭탄 우편물이 배달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두 명을 제거하면 비행기가 납치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애브너는 자신이 하는 일이 테러범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다른 동료들도 갈등하고, 동료들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거대한 폭력의 구조는 애브너와 동료들을 비켜가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구조의 일부분이 돼버렸고, 폭력의 칼날은 어느새 그들의 목도 겨누고 있다. 이스라엘을 위해 살인을 마다 않았던 확신범들은 마침내 자신을 회의하고, 모두를 믿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복수의 정치학이라고 <뮌헨>은 말한다.

복수하는 자들은, 저항하는 자들은 불가피한 폭력이 있다고 말한다. 더 큰 폭력을, 더 비참한 비극을 막기 위해서 사용되는 폭력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테러범의 명분이기도 하고, 테러를 응징하는 국가폭력의 명분이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알리바이가 된다(저들을 보라!). <뮌헨>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자들을 대면시킨다. 애브너 암살단은 팔레스타인 조직원들과 한집에서 마주치게 된다. 신분을 속이는 데 성공한 애브너는 팔레스타인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애브너는 팔레스타인인들도 집을 잃고 고향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치 선조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이스라엘인 자신들처럼. 하지만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타인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타인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부인하듯이, 팔레스타인은 홀로코스트를 외면한다(이란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지난해 12월 홀로코스트를 이슬람 세계의 한가운데 유대 국가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라고 말했다). <뮌헨>에서도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는 비행기 납치범들의 인터뷰가 나온다. 마치 영웅처럼 의기양양한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고통만을 보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부인한다. 이처럼 <뮌헨>은 테러범을 영웅으로 비추는 미디어의 정치학부터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는 테러의 정치학까지 폭력에 관련된 세밀한 묘사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뮌헨>이 팔레스타인의 편은 아니다. <뮌헨>이 이스라엘에 비판적이라면 맞는 말이지만, 테러에 우호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유대인인 스필버그가 <뮌헨>을 찍고 유대인 친구들을 잃을 것을 걱정했다는데, 그것이 기우에 그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의 편협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 이스라엘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했던 5인조 암살단은 복수를 거듭할수록 내면의 갈등에 휩싸인다. 폭력의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대신 폭력의 내면을 응시한다.

빼어난 연기, 아름다운 풍광

<뮌헨>의 2시간30분이 넘는 상영시간을 지루하기 않게 만드는 것은 아름다운 화면의 힘이다. 비극이 벌어지는 거리들은 아름답다. 동유럽의 부다페스트, 지중해의 몰타 등에서 재현된 70년대의 거리는 이국적인 풍광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가득하다. <뮌헨>의 공기는 이국적면서도 서글픔을 머금고 있다. 비극의 전조를 품은 공기는 <뮌헨>의 쓸쓸한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우주전쟁> 등에서 스필버그와 함께 작업한 촬영감독 야누시 카민스키가 담아낸 유럽과 중동의 풍경은 서글프지만 매혹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빼어나다. 주인공 애브너를 연기하는 에릭 바나는 단호함 속에 깃든 망설임을 흔들리는 눈빛 하나로 표현한다. 애브너의 4명의 동료들을 연기한 각국의 배우들도 뚜렷한 개성을 발휘하면서 영화에 사실감을 부여한다. 탄탄한 스토리도 <뮌헨>을 끌어가는 바탕이다. <뮌헨>은 1984년 출간된 이스라엘 정보요원 회고록 <복수>(Vengeance)를 기초로 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극작가 토니 커시너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뮌헨의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스필버그의 영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졌다. 유대인 스필버그는 좌파 성향의 토니 커시너를 파트너로 택함으로써 영화의 균형을 잡았다.

어쩌면 고루한 말이다. <뮌헨>은 결국 “폭력은 나쁘다”고 이야기한다. 폭력이 악순환한다는 말은 폭력이 나쁘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뮌헨>은 우리가 잊고 있는, 보지 못하는 사실을 새삼 보여준다. 한순간의 폭발음에 묻힌, 거대한 스펙터클에 가려진 인간의 숨결을 낮은 목소리로 전한다. 테러와 반테러가 공존하는 끔찍한 세계에서, 누구도 행복하기란 힘들다.